충청북도/충주시

충주...충주 고구려 비

임병기(선과) 2022. 8. 16. 0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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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관 안으로 옮겼습니다

 

2005년 첫 인연(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카메라 없이 눈으로만 즐겼던 시절)

 

충북 충주시 가금면 입석마을의 이름 모를 촌로는 마을의 입석을 향해 평생 빌고 빌었다. 할머니의 어머니,  어머니의 할머니께서 그러셨던 것처럼  당나라, 몽고의 침입, 임진왜란 시 탄금대 전투에 동원된 자식의 무사귀환, 객지로 돈 벌러 간 자식의 안녕을 기원하며  살을 에이는 한겨울 추위에도 새벽 정한수 받아 놓고 아들 점지해달라며 그렇게 입석에게 빌고 빌었다.

 

1500년이나 된 남한 유일의 고구려비? 할머니들에게는 그냥 마을 지켜주는 장승이요, 역신을 막아주는 고을맥이며, 무병장수와 다산, 풍요를 보장해주는 미륵불이었다. 고구려가 중원의 주인공이 되고, 신라가 지배하고, 고려, 조선이 이땅의 왕권을 펼치던 말던 민초의 고단한 삶에 있어 입석은 위안의 대상이었으며, 가슴속 울분을 소리 없이 받아 주던  미륵님이었다.

 

1979년 충주의 향토 연구단체인 예성 동호회에 의하여 최초로 학계에 보고 되고, 단양 적성비를 발견했던 단국대 정영호 교수님은 우리카페 홀로세 공룡님을 비롯 제자들과 함께 해방 후 최고의 금석문이라는 고구려비라는 것을 공표 후, 입석리 마을 촌로들에게 달려가 한없이  기쁨의 고마움의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정영호 교수는 분명 이런 말을 하지 않았을까? "이렇게 잘 모셔주어 고맙습니다. 너무너무 고맙습니다. 여러분이 계시지 않았다면 위대한 우리의 고구려비는 영원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을 겁니다."

 

수많은 전란과 자연재해가 있었지만 넘어지면 일으켜 세우고, 흙속에 묻히면 깨끗이 씻어 다시 모시기를 이루 몇 차례였을까? 더더구나 입석리 주민들이 고마운 것은  산업화, 근대화란 거창한 물질문명의 대혼란기에 요원의 불길처럼 군관민 공동으로 전개된 새마을운동의 참화를 이겨낸 것이다.

 

수천 년 전통을 하루아침에 말살시키고, 조상 대대의 민속을 미신으로 치부해버린 정신 황폐화 운동 기간 중에 무수히 많은 민간신앙이  사라졌음에도 입석마을의 입석은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으니 한반도 유일의 고구려비 발견자는  바로 입석리 마을의 주민들이다!!!

 

1979년 2월에 발견된 고구려비는 단국대학교 정영호(鄭永鎬) 교수팀에 의해 발견되었는데 발견 초기에, 비 전체를 덮고 있던 돌이끼를 벗기자 (大王) (新羅土內)란 비문이 나타나 처음에는 단양 적성비와 같은 신라비로 추측되었다. 그러나 탁본에 高麗大王이란 글자가 확실히 나타났다. 高麗大王이란 高句麗大王이며 중원 땅에서 누구도 상상할 수 없었던 한반도 내 유일한 고구려비가 발견된 것이다. 하여간에 1천5백여년 전에 세워진 고구려비가 발견된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다.

 

"이 고구려비는 만주 통구에 있는 광개토대왕비를 축소한 그대로의 모습을 이어서 더욱 흥미롭다.
크고 긴 화강암 기둥돌을 그대로 다듬어서 비면을 만들었는데, 높이 약 2백㎝, 앞 뒤 넓은 면이 각 55.52㎝, 좁은 측면이 각37.32㎝이다. 이 비는 중원고구려비(中原高句麗碑)로 이름 지어지고 국보 제205호로 지정되었다. 장수왕 건립 추정. 사면비로서 전면 23자씩 10행으로 된 230자의 명문으로 한 좌측면에는 155자가 새겨졌는데 역사적으로 삼국의 관계를 밝혀주는 귀중한 금석문이다."

 

비문의 내용에는 "첫째, 처음에 ‘고려대왕(高麗大王)’이라는 글자가 있는데 이때 ‘고려’는 ‘고구 려’를 뜻하고, 둘째, ‘전부대사자(前部大使者)’, ‘제위(諸位)’, ‘사자(使者)’ 등 고구려의 관직 이름이 보이며, 셋째, 만주 집안시에 있는 광개토대왕의 비문에서와 같이 ‘고모루성(古牟婁城)’ 이 보이고, 넷째, ‘신라매금’, ‘모인삼백’, ‘신라토내’ 등 고구려가 신라를 불렀던 말이나오기 때문이다."

 

그럼, 고구려비가 우리 역사의 위대한 발견으로 여겨지는 까닭은 무엇인가?

중원고구려비가 발견되기 전까지는 고구려가 한강 이북 지역까지만 진출했다고 알고 있었다. 즉, 중원고구려비는 고구려 영토의 경계를 나타내는 표시이므로 고구려가 한강을 넘어 충주지역까지 진출하였다는 것을 알려 준 것이며 삼국의 지도가 바뀌는 큰 발견이기 때문이다.

 

비문은 "고구려, 백제, 신라간의 정치적 동향을 나타내는 내용과, 특히 고구려 세력의 남방 한계를 실증해 주는 의미가 들어 있다. 특히, 고구려와 신라 간의 우호적 맹약을 어긴 신라가 고구려 측의 요구를 수락하여 고구려의 입장을 받아들이게 되었다는 내용으로 볼 때 신라에 있어서, 5세기 후엽까지 고구려 세력의 영향을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비문에는 태자 이하 주부, 당주 등 여러 명의 수가신(隨駕臣)의 명단이 나타나 있으며, 인명 포기는 출신부, 관계, 인명, 관직의 순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대사자(大使者)나 발위 사자(拔位 使者)와 같은 사자의 분화된 명칭을 보여 주고 있어 6세기 이후에 보이는 문헌의 오류를 시정해 주고 있다."라는 내용이라고 한다.

 

아무튼, 중국이 고구려사를 중국사에 포함시키는 이른바 동북공정의 역사왜곡 정책을 가시화하는 시점에서 중원 고구려비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하겠다.

 

2005.06.19

 

보호각. 2008년 사진

두 번째 답사

 

고구려비. 2008년 사진

 

2022년

전시관이 들어섰고 비석은 실내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후면)

거의 판독이 되지 않고 巡자만 보입니다

 

(우측면)

전부(前部)는 부명(部名), 대형(大兄)은 관등명(官等名)입니다.

 

(전면)

5월에 고려 태왕(高麗太王)의 상왕공(相王公)과 …… 신라 매금(寐錦)은 세세(世世)토록 형제같이 지내기를 원하여 서로 화목하고 천도를 지키기(守天) 위해 동으로 (왔다). 매금(寐錦) 기(忌)[7], 태자(太子) 공(共), 전부(前部)의 대사자(大使者) 다혜환노(多兮桓奴) 주부(主簿) 도덕(道德) 등이 ……로 가서 궤영(跪營)에 이르렀다. 태자 공(太子 共)…… 尙 …… 上共看 명령하여 태적추(太翟鄒)를 내리고 …… 매금(寐錦)의 의복(衣服)을 내리고 건립처(建立處) 용자사지(用者賜之) 수자(隨者) …… . 노객인(奴客人) …… 제위(諸位)에게 교(敎)를 내리고 여러 사람에게 의복을 주는 교(敎)를 내렸다. 동이매금이

늦게 돌아와 매금(이 다스리는) 땅의 제중인(諸衆人)에게 절교사(節敎賜)를 내렸다. (태자 共이) 고구려 국토 내의 대위(大位), 제위(諸位) 상,하에게 의복과 수교(受敎)를 궤영에서 내렸다. 12월 23일 갑인에 동이 매금의 사람들이 우벌성(于伐城)에 와서 교(敎)를 내렸다. 전부(前部)의 대사자 다혜환노와 주부 도덕이 국경 근처에서 300명을 모았다. 신라토내당주 하부(下部) 발위사자(拔位使者) 귀도(貴道) …… 와 개로(盖盧)가 함께 신라 영토 내의 여러 사람을 모아서 움직였다.(위키백과)

 

좌측면

신유년(辛酉年) …… 十 …… 태왕국토(太王國土) ……(행 전체 마모)上有 …… 酉 …… 동이 매금의 영토…… 方 …… 桓□沙□斯色 …… 고추가(古鄒加) 공(共)의 군대가 우벌성(于伐城)에 이르렀다. ……고모루성수사(古牟婁城守事) 하부(下部) 대형(大兄) 야□(耶□)(위키 백과)

 

2022.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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