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남도/함양군

함양...일두 정여창 묘역

임병기(선과) 2022. 1. 15. 0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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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두 정여창 묘역

선생의 묘와 뒤편의 정경부인 완산이씨 묘가 있습니다

답사 포인터가 아닌 까닭에 승안사지를 세 번째 들렸으면서도 바로 옆 묘역은 처음입니다.

 

남계서원(2019년)

https://blog.daum.net/12977705/8726466

 

연산군의 스승이었지만 김종직 문하라는 연유로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함경도 종성으로 유배되었으며 그곳에서 운명하였습니다.  또한 묘는 선생 서거 직후 일어난 갑자사화로 부관참시되었던 역사의 현장입니다.

 

방형 호석

묘비

차양(遮陽) 석주

 

상석 좌우를 덧붙였습니다

향로석

 

방형 호석에는 태극문양을 새겼습니다

 

뒤편에서 바라본 묘역

 

(향좌)

석양, 망주석, 문인석

 

(향우)

 

신도비

 

증(贈) 우의정(右議政) 문헌공(文獻公) 일두(一?) 정선생(鄭先生) 신도비명(神道碑銘) 

가선대부 이조참판 겸 동지경연 의금부춘추관사 정온(鄭蘊)이 글을 짓다. 숭록대부 행 한성부판윤 겸 오위도총부도총관 이정영(李正英)이 글씨와 전서(篆書)를 쓰다.

 

우리 동방은 은(殷)나라 태사(太師)가 교화를 베푼 뒤부터 이적(夷狄)에서 변화하려는 기풍이 성대하게 일었으나 수천년간 쓸쓸히 참된 유자(儒者)가 드물었다. 고려말에 오직 정 문충공[鄭文忠公 : 정몽주(鄭夢周)] 한 사람뿐이었고 아조(我朝 :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성인의 학문을 듣고서 안 분으로 다섯 선생이 있는데, 선생은 그중의 한 분이다. 선생의 이름은 여창(汝昌)이고, 자(字)는 백욱(伯?)이며, 그 선대의 관향은 하동(河東)인데, 뒤에 함양군(咸陽郡)으로 옮겨가 살았다.

지의(之義)는 종부시판사(宗簿寺判事)이며, 복주(復周)는 전농시판사(典農寺判事)이며, 육을(六乙)은 증(贈)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이니, 이들이 선생의 증조, 조부, 선고 3세이다. 모친 최씨(崔氏)는 목사(牧使) 효손(孝孫)의 따님이다. 경태(景泰) 원년 경오년(1450, 세종 32)에 선생을 낳으니, 나면서부터 특이한 자질이 있었다. 좌윤(左尹)이 의주통판(義州通判)으로 재직할 때 선생은 어린 나이였는데 중국의 사신인 장녕(張寧)이 한번 보고는 선생이 비상한 아이임을 알고 이름을 지어 주고 이름을 풀이한 글도 지어 주었다. 뒤에 좌윤이 함길도우후(咸吉道虞侯)가 되어 반란을 일으킨 장수 이시애(李施愛)를 막다가 죽자 선생이 기절했다가 다시 깨어나서 시체더미가 쌓여 있는 속에 들어가서 부친의 유체(遺體)를 모시고 돌아와 장사를 지냈으니 당시 공의 나이가 17세였다.

삼년의 복제를 마치고 나자 상이 좌윤이 국가를 보위한 공로를 가상히 여겨 그 자손에게 관직을 줄 것을 명했는데, 선생은 아비가 죽었는데 자식이 영화를 누리는 일은 차마 할 수 없다고 하여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모부인을 봉양함에 있어서는 음식을 골고루 갖추어 올렸으며 모부인이 하는 일이 의리에 심히 해로운 것이 아니면 감히 어기지 않았다. 모부인도 아들의 뜻을 알고 상심시키지 않으려 하였다. 그러므로 모부인은 지나친 거조가 없었으며 아들도 모친의 뜻을 따르기만 하다가 잘못하는 일이 없었다.

 

계묘년(1483, 성종 14)에 진사시에 입격하였는데 모부인이 또 대과(大科)에 급제하는 것을 보고자 하였기에 태학(太學)에 들어갔다. 매일 밤늦도록 반드시 오뚝하게 단좌(端坐)하였는데, 이에 반중(泮中)에서 선생에게 도학(道學)의 공부가 있는 것을 알고 더욱 존경하였다. 고향으로 돌아오자 모부인이 바야흐로 전염병을 앓고 있었는데, 사람들이 바깥에서 안부를 묻기를 권하였다. 그러나 선생은 듣지 않고 곧장 방 안으로 들어갔다. 얼마 후에 모부인이 병으로 돌아가시자 가슴을 치며 피를 토하여 거의 목숨이 끊어지는 데까지 이르렀다. 상례를 지낼 때에 풍속에서 꺼리는 것을 돌아보지 않고 염습(斂襲)과 빈전(殯殿)을 모두 예에 맞게 하니 사람들이 심히 위험하게 여겼다. 그러나 전염병이 저절로 사라지고 선생도 결국 무사하였으니 사람들은 효성이 하늘을 감동시켰다고 말하였다.

방백(方伯)이 선생의 행실을 듣고 군관(軍官)에게 장례에 필요한 도구를 갖추어 주도록 하였는데 선생은 백성을 번거롭게 하면 원망이 어버이에게 미친다는 이유로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도와주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었으나 모두 듣지 않았다. 1년간 죽을 마시고 3년간 근심하면서 거여목 지팡이를 짚고 여막 바깥으로 나가지 않았으며 종일토록 꿇어앉아 경대(經帶 : 두건과 허리띠)를 벗지 않았다.

상례(祥禮)를 마친 뒤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두류산(頭流山)에 들어가 허둥거리며 마치 무엇인가 찾는데도 찾지 못하는 듯한 모습으로 지냈다. 사람들이 술과 고기를 권하면 문득 눈물을 흘리며 먹으려 하지 않았다. 군수인 매계(梅溪) 조위(曹偉)가 몸소 와서 타이르기를 “선왕(先王)이 제정한 제도를 감히 지나치게 해서는 안된다.” 하자 이에 감히 사양하지 않았다. 시정(寺正) 조효동(趙孝仝)과 참의(參議) 윤긍(尹兢)이 상소하여 그의 학행(學行)을 천거하자 성묘(成廟)가 가상하게 여겨 특별히 소격서참봉(昭格署參奉)에 제수하였다. 선생이 진정하는 상소를 올려 굳게 사양하니 성묘가 그 상소의 말미에 “그대의 행실을 듣고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행실은 가릴 수가 없는데 지금 오히려 이렇듯이 하니 이는 그대의 장점이다.” 하고 썼다. 형제 자매가 전토(田土)와 노비를 분배할 때 선생은 그중에서 척박한 땅과 노약자를 가려서 차지하였는데, 그래도 만족해하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자기가 차지했던 것을 다시 그들에게 주었다.

 

성묘 경술년(1490, 성종 21)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에 보임(補任)되었다가 시강원설서(侍講院設書)로 옮겨 올바른 도리로 보도(輔導)하였다. 그러나 동궁이 그리 좋아하지 않았으므로 곧 외임으로 나가기를 요구하여 갑인년(1494, 성종 25)에 안음현감(安陰縣監)으로 나아갔다. 현이 평소에 쇠퇴하고 피폐한 고을로 일컬어졌는데 선생은 먼저 백성이 고통스럽게 여기는 것을 찾아 과조(科條)를 세우고 작은 폐단까지 제거하여 백성들이 소생하게 되었다. 짧은 기간에 은혜와 신뢰가 두루 미쳐서 관리와 백성들이 서로 경계하여 감히 속이거나 배신하는 일이 없었다. 여가에는 고을이 자제들 중에 뛰어난 자들을 불러 모아 직접 가르치니 원근에서 소문을 듣고 많은 사람이 와서 배웠다.

 

무오년(1498, 연산군 4)에 사화(史禍)에 연루되어 종성(種城)에서 7년 동안 유배생활을 하였지만 조금도 원망하거나 후회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종성부에서 뜰에 횃불을 밝히는 일을 맡기자 사신이 관부에 들어올 때마다 직접 횃불 밝히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고 더욱 삼갔으니, 선생이 환난에 처신한 것이 이와 같았다. 육진(六鎭)은 오랑캐 지역과 가까워 문풍(文風)이 없어진 지가 오래되었다. 선생은 더불어 말할 만한 사람을 택하여 열심히 가르치매 오래지 않아 진사 시험에 입격한 자가 있었으니 이것이 바로 지나는 곳마다 감화를 입는다는 묘한 진리가 아니겠는가.

 

갑자년(1504, 연산군 10) 여름 4월 1일에 유배지에서 세상을 떠나니 향년 55세였다. 함양으로 모시고 돌아와 승안동(昇安洞) 간좌곤향(艮坐坤向)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이해 가을에 다시 사화가 일어났으니 그것에 대해서는 차마 말을 하지 못하겠다. 몇 년 지나지 않아 원통함이 남김없이 신원되었고 포증(褒贈)과 사전(祀典)이 갈수록 융성하였다.

고을의 유생들이 서원을 건립하니 남계서원(濫溪書院)으로 특별히 사액(賜額)하고 봄가을고 소뢰(小牢)를 써서 제사 지내도록 하였다. 무진년(1508, 중종 3) 이후부터는 관학유생(館學儒生)들이 문묘에 종사(從祀)하여 매년 제사지내기를 요청하였는데 만력(萬曆) 경술년(1610, 광해군 10) 가을에 비로소 윤허를 받았으며 8월에는 선생의 집에 사제(賜祭)하였으니 이에 선생의 도학(道學)이 세상에 더욱 빛나게 되었다.

 

선생의 학문은 염락[濂洛 : 주돈이(周敦?)와 정자(程子) 형제를 말함]을 표준으로 삼고 글을 읽을 때는 이치를 궁리하는 것을 우선으로 삼았으며 마음 씀씀이는 자신을 속이지 않는 것을 위주로 하였으며 일상생활의 공부는 성경(誠敬)을 벗어나지 않았다. 심지어 정치를 하는 율령(律令)과 격례(格例)도 연구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니 고을을 다스렸던 데서 찾아보면 그 단서를 볼 수 있다. 선생은 한훤당(寒暄堂) 김선생(金先生)과 점필재(?畢齋) 김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는데 뜻이 같고 도(道)가 합하여 막역한 사이였으며 도를 논하고 학문을 강론할 때는 언제나 서로 수행하였다.

애석하게도 그 은미한 말씀과 남은 언론이 세상에 조금도 전해지지 않고 선생이 평소에 저술했던 글도 무오년의 사화에 소실되고 말았으니 어치 후학들의 긴 통한이 되지 않겠는가? 아, 저 소인들이 비록 일시적으로 득세한다 해도 장구(長久)한 공론(公論)의 견지에서 보면 또한 숨길 수가 없다. 따라서 열성들이 포창(?彰)하여 추대한 은전과 선비들이 경모하는 정성이 바다처럼 깊고 북두성처럼 높아서 백세 후에 그 기풍을 듣고 흥기하여 감발한 것은 백이(伯夷)의 기풍을 듣고 탐욕스런 자가 청렴하게 되고 나약한 자가 강한 의지를 갖게 되는 것에 못지않으니, 비록 선생으로 하여금 당시에 낭묘(廊廟)에 있게 하였더라도 그 영향이 무궁한 데까지 미쳤을 것이라는 것이 어찌 조금이라도 과도한 말이겠는가?

 

선생은 종실인 도평군(桃平君) 말생(末生)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공정대왕(恭靖大王)의 손녀이다. 2남 4녀을 낳았으니 장남은 희직(希稷)인데 직장(直長)을 지냈고 차남은 희설(希卨)인데 정랑(正郞)이다. 희직은 적처(嫡妻)에게 후사가 없고 단지 서자(庶子)인 여산(如山)만 있다. 희설은 당제(堂弟)인 희삼(希參)의 아들 언남(彦男)을 데려다 후사로 삼았다. 장녀는 부호군(副護軍) 최호문(崔浩文)에게 시집갔으며 아들은 언청(彦淸)이며 사위는 임호신(任虎臣)이다. 2녀는 생원 조효온(趙孝溫)에게 시집갔는데 아들은 안수(安壽)이며 3녀는 이현손(梨賢孫)에게 시집가서 아들 승수(承壽)를 낳았고 4녀는 설공순(薛公諄)에게 시집가서 아들 선(璿)을 낳았다. 언남은 동지(同知)인데 아들 대민(大民)을 낳았는데 현감이다. 현감이 1남 1녀를 낳으니 아들은 홍서(弘緖)인데 문과로 학정(學正)이며 딸은 방원진(房元震)에게 시집갔는데 찰방(察訪)이다. 학정의 초취(初娶)는 증 도승지 양사형(梁士衡)의 딸인데 2남 1녀를 낳았으니 광한(光漢)은 생원이고 광연(光演)은 진사이다. 딸은 이교(李?)에게 시집갔다. 후취(後娶)는 임진상(林眞常+心)의 딸로 1녀를 두었는데 곽문완(郭汶浣)에게 시집갔다. 여산은 아들 둘을 낳았는데 천수(天壽)와 계수(桂壽)이다. 천수의 아들은 원례(元禮)와 형례(亨禮)이고 계수의 아들은 흥례(興禮)이다. 원례와 형례는 선생의 음덕으로 참봉에 제수되었다. 적서(嫡庶)의 증손 현손(玄孫)으로 남녀 약간 명이 있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아 크신 상제님이 동쪽에 치우친 우리나라가 날로 부박해지는 것을 걱정하여 이에 큰 선비를 내리시니 영남의 한 고을이요 맑은 소리 옥 같은 자태로다 선생이 태어나심에 포부가 가볍지 않았으니 문이 여기에 있지 아니한가 낙민을 거슬러 올라가 근원을 궁구하여 진리를 음미하고 문사는 숭상하지 않았으며 마음을 침잠하고 토론하여 실천하고 깊이 나아갔건만 요점은 속이지 않는 데 있었네 효와 제를 몸소 실천하고 시와 예까지 통달하여 성현처럼 되기를 희망하며 만년에 조정에 들어가서 실행할 조짐이 충분하였으니 누가 그걸 막으랴 작은 고을 맡아 다스리매 덕화를 잠깐 사이 이루었는데 혜택은 여기에 이르고 말았네 하늘은 무슨 뜻으로 선생을 내시고서 어찌하여 이렇게 인색한가 세도를 위하여 슬퍼하노라 오로지 그 밝은 빛만이 세상을 뜬 뒤에 더욱 빛나서 공묘에다 모셨다네 넘치는 물은 흘러서 양양하고 오르는 산은 높아서 푸르니 마르지 않고 떨어지지 않으리 선생의 큰 명성을 산처럼 놓고 물처럼 맑게 했으니 이 비석에 있지 아니한가 선생이 돌아가신 지 이제 180여 년이 지났다. 묘 ~2글자 마멸~ 비로소 오늘 세운 것은 또한 몇 가지가 명에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명을 받은 후에 미처 기입되지 못한 자손을 삼가 다음에 추가로 기록한다.

생원은 사인(士人) 박위(朴?)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 3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세표(世杓)로 현감이며, 딸은 이적영(李?英), 성린(成?), 장형(張炯)에게 시집갔다. 현감은 3남 2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희장(熙章), 희▨(熙▨), 희문(熙文)이며 딸은 허제(許梯)와 이지한(李之翰)에게 시집갔다. 진사는 후에 찰방에 제수되었는데 참판 박명부(朴明?)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 3녀를 두었는데 장남은 세모(世模)이며 생원이고 차남은 세정(世楨)이다. 딸은 양용제(梁甬濟), 양진남(梁鎭南), 방세망(房世望)에게 시집갔다. 또 얼자(?子)로 세억(世檍)이 있다. 생원은 2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도겸(道兼), 달겸(達兼)이며 딸은 강석제(姜錫齊), 양한기(梁漢祺)에게 각각 시집갔다. 세정은 2남 1녀를 두었는데 희도(熙道)와 희운(熙運)이며 딸은 박수태(朴壽笞)에게 시집갔다. 학정의 얼자 광윤(光潤)이 아들 셋을 낳았는데 세익(世?), 세즙(世楫), 세로(世櫓)이다. 흥례의 아들 광철(光澈)이 세빈(世彬)과 세래(世來)를 낳았고 세빈이 두귀(杜龜)를 낳았다. 동지의 얼자 수민(秀民)이 홍찬(弘纘)과 홍계(弘繼)와 홍경(弘經)을 낳고, 홍경이 광숙(光淑), 광식(光湜), 광위(光渭), 광렴(光濂)을 낳았으며 나머지는 어리다.

 

숭정 후 기사년(1689, 숙종 15) 3월 일 비석을 세우다.

각자(刻字)는 정원부(鄭元夫) 승려 삼열(三悅)이 했다.

 

(출처. 국립문화재연구소)

 

귀부

 

이수(후)

 

이수(전)

 

차양막 석주

 

부인. 정경부인 완산이씨 묘역

 

묘표

 

승안사지 답사 시에 꼭 들려보기를 권합니다

 

2021.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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