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평역사한옥박물관
많은 문석인과 각종 비석이 옥외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사패금표 은언군묘소자내(賜牌禁標 恩彦君墓所字內)
은언군의 묘 자내(字內), 사패지(賜牌地)에 세운 금표입니다.
농작물 경작, 가축 사육, 삼림 벌목 등을 금지한다는 의미로 추정되지만 구체적으로 표기하지 않았습니다
자내(字內)는 한양도성의 안과 밖을 감시하고 경계했던 구역.
사패지(賜牌地)는 왕이 하사한 토지.
은언군(1755~1801)
"이름은 인(裀). 사도세자의 서자로 어머니는 숙빈임씨이다. 10세에 은언군에 봉군되고, 13세에 송낙휴의 딸과 혼인했다.
1771년(영조 47) 외람되게 구종·별배를 많이 거느리고 다닌다는 이유로 은신군(恩信君) 진(禛)과 함께 관직에 기용되지 못한다는 처벌을 받고, 이어 시전 상인들에게 진 빚을 갚지 않았다 하여 은신군과 함께 충청도 직산에 유배되었다. 이어 제주도 대정으로 옮겨 위리안치되었다가, 1774년 풀려났다.
1776년 영조가 죽자 수릉관에 임명되고, 이듬해 흥록대부가 되었다. 당시 실권자이던 홍국영은 누이동생을 원빈으로 들였으나 1780년에 죽자, 은언군의 맏아들 담(湛)을 원빈의 양자로 삼아 완풍군(뒤에 상계군으로 개칭)이라 하고 왕위를 잇게 하려 했다. 그러나 담은 홍국영과 틀어져 오히려 모반죄로 몰려 유폐되고, 1786년 독살되었다. 이 일로 은언군도 정조의 명에 따라 강화도로 옮겨져 살게 되었다.
1789년 강화도에서 도망쳐 나왔으나 붙잡혀 다시 강화도에 안치되었다. 그뒤 정조가 죽고 순조가 즉위해 정순왕후(貞純王后)가 수렴청정하게 되자, 벽파 세력에 의해 우선적으로 제거될 대상으로 지목되었다. 1801년(순조 1) 신유사옥 때 처 송씨와 담의 처인 며느리 신씨가 청나라 신부 주문모로부터 영세를 받은 천주교도라 하여 붙잡혀 죽고, 그도 사사되었다. 1849년 손자 원범이 철종으로 즉위하자 신원되었다."9다음 백과)
賜牌禁標
恩彦君墓所字內
사패금표 아레에도 명문이 있으나 판독 불가합니다
우리나라의 금표(봉산)
https://blog.daum.net/12977705/8726208
2021.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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