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서울과 파주 답사의 주목적은 파주 민통선 구역의 태실과 서울의 각종 비석, 금표비이었습니다.
그런데, 자료 조사 중에 진해 웅천향교 하마비가 서울에 있다는 글이 보여 검색하였더니 우리가 익히 아는 '하마비를 찾아서'를 지은 이희득 님이 올린 포스팅이었습니다.
글에 의하면 뒷면에 많은 글자가 새겨져 있어 하마비의 이건 사유와 내용이 궁금하여 이번 답사 동선에 포함시켰습니다.
삼성출판박물관(종로구 비봉길 2-2) 앞에 위치
안내문에 의하면 경남 웅천이 출처 라는 내용과 삼성출판사 김해지사에서 기증하였다는 내용 외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이곳으로 옮겨진 내력은 알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또한, 후면의 명문 내용은 육안으로는 확인 불가합니다.
다만, 이희득 님이 탁본하여 고전번역원에 의뢰하여 확인한 명문 일부를 게재한 내용으로 본래 위치를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명문
이희득 님 포스팅에 사람 이름과 세운 시기를 알 수 있는 명문 일부가 실려 있어 원위치 추적에 단서가 되었습니다.
정유 임후희화(丁酉 任侯希華)
기해 중추 정후지열(己亥 仲秋 丁侯志說)
경자 삼월 일 립(庚子 三月 日 立)
임희화에 관한 기록은 찾을 수 없었으나 정지열이 웅천 현감으로 제수받은 시기는 확인되었습니다.
일성록. 정조 2년 무술(1,778년) 7월 1일
"정지열(丁志說)을 웅천 현감(熊川縣監)으로"이라는 기록이 실려 있어, 삼성출판박물관 앞의 하마비는 웅천 향교 하마비로 추정됩니다.
즉
무술년(1,778년)에 웅천 현감으로 부임한 정지열이 기해년(1,779년)에 향교 공사에 참여하였으며 하마비는 완공 후 경자년(1,780년)에 건립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웅천 향교
여러 자료를 검색하여 보면
신동국여지승람에 "在縣北一里’로 기록하였고, 관원으로서 훈도 1명을 배치하고 있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1,530년 이전에 개교하였으며, 1,832년 간행된 웅천 읍지에도 실려 있어 당시에도 운영된 것이 확인됩니다. 폐교된 정확한 시기는 전하지 않으나, 일제강점기 1915년에 웅천현 폐지와 더불어 폐교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웅천 향교의 대문인 외삼문의 누각은 반화루(攀化樓)였으며, 철거된 외삼문은 창원 불곡사 일주문으로 활용되었습니다.
창원 불곡사(2,008년)
경자 삼월 일 립(庚子 三月 日 立)
그런데
왜 향교 기적비를 건립하지 않고 하마비 후면에 간략하게 새겼을까요?
어떤 근거도 없지만 웅천현의 재정 상태의 어려움 때문이라는 사유 외에는 떠오르지 않습니다.
(비문에 새긴 명문에 그 내용이 담겨 있는지...)
하마비 후면의 명문
전체 내용이 파악되지 않아 구체적인 해석은 한계가 있어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마지막으로
귀한 자료를 인터넷에 공유해 준 이희득 님께 감사드립니다
2020.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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