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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의성군

의성...용암사지 석조부재

by 임병기(선과) 2021. 11.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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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암사지

현재는 개인 농장 내에 위치합니다.

농장주인의 말에 의하면 석탑은 일제 강점기에 반출되었으며, 과수원에는 많은 장대석이 묻혀 있다고 합니다

 

자료에 의하면

용암사는 고려 태조 왕건이 화엄사찰로 창건하여, 명종 비 의정 왕후의 원찰이었으며, 18세기 전반에 폐사되었고, 이후 일재강점기에 만경사로 복원되어 운영되었던 사찰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문화재청 간. 한국의 사지

"용암사는 고려 초에 창건된 화엄종 사찰이다. 『新增東 國輿地勝覽』에는 사찰이 萬嶽山에 있다고 하면서 고려중 기 문신 皇甫卓의 記를 소개하였는데, 여기에 ‘고려 태조가 산 동남쪽 모퉁이에 창건했고, 밭 600묘를 내려 華嚴 圓敎를 闡揚케 했다.’고 한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또한 같은 기록에는 ‘이후 쇠락해진 사찰을 1178년(고려 명종 8) 雲美스님이 왕명으로 중건하기 시작해 이듬해 11 월 87칸 규모로 공사를 마쳤고, 고승 智英스님이 주지로 임명되었으며, 명종 비 懿靜王后의 명복을 비는 원찰로 지목되어 밭과 많은 재물을 받았다.’고도 기록되었다. 이를 통해 보면 사찰은 고려 초부터 왕실과 깊게 관련된 격이 높은 사찰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용암사는 17세기 초에 간행된 『商山誌』와 『東國輿地志』에 사명이 기록되었으나, 『輿地圖書』를 비롯한 조선후기 읍지류에는 “今無”, “今廢”라고 하여 17세기 후반~18세기 전반경에 폐사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일제강점기 1929년에 재간행된 『상산지』에는 유 일하게 ‘용암사가 폐사되고 지금 萬景寺가 되었다.’고 기 록되어 있어 주목된다. 만경사는 『丹密縣誌』에 ‘만악산에 있으며, 左右房과 東室이 있고, 부속암자로 圓通庵, 內外 院庵, 上庵이 있다.’고 하였고, 조선후기 문인 李東標는 1694년 이곳에서 3일 동안 주연을 벌이기도 했다.

 

또한 『한국사찰사전』에는 『金龍寺本末寺誌』 「天燈山萬景寺寺蹟 記」를 인용하여 ‘만경사는 본래 용암사로 慈藏法師 도량 혹은 고려 恭愍王 원당으로 전한다. 경내에 삼존불을 봉안한 大雄殿과 凝香閣, 寂默堂, 設禪堂 등 많은 전각이 있으며, 부속암자로 上庵, 圓通庵, 內院庵, 五峯庵, 洛水庵, 覺古庵이 있다.’고 하였다. 특히 사찰은 조선시대 읍지류 중에서도 용암사가 폐사된 것으로 언급된 사료에만 별도 사찰로 기재되었으며, 《廣輿圖》를 비롯한 옛 상주지도에는 현 萬景山 부근에 있는 것으로 표시되었는데, 본 사지와 위치가 유사하다.

 

이러한 사료들로 미루어 보면 만경사도 만경산 부근에서 비교적 큰 사세를 유지했던 사 찰이었음을 유추할 수 있는데, 읍지류에 언급되기 시작한 시점과 지도에 표시된 위치를 고려할 때 만경사와 용암사가 같은 지역에서 동시기에 운영되었다고는 보기 어렵다. 따라서 만경사는 17세기 경 쇠락한 용암사을 중건하면서 사명을 변경한 것이거나 폐사된 용암사 터 위에 새롭게 창건된 사찰일 것으로 추정된다. 근래 발간된 자료에 용암사는 위중리 ‘불당골’에 있으며, 당간지주와 석축이 남아 있다는 주민 전언이 소개되었으나 상세한 조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또한 만경사는 생송리 또는 만경산 남쪽 중허리 계곡에 있으며, 전언에 의하면 약 100여 년 전 빈대가 창궐하여 폐사되었다고 하여 별도 유적으로 조사된 바 있다."

 

맷돌

 

석불 연화대좌

1929년에 간행된 상산지에 대웅전에 삼존불이 있었다는 기록이 전합니다

 

 

석조부재

정치하게 다듬은 당간지주(괘불 지주 조각?), 장대석, 돌못, 심초석(?)...

일견 석축과 전각 부재로 생각됩니다

 

무엇일까요?

 

개인적으로는

사리공으로, 팔각의 덮개가 있었던 심초석으로 생각됩니다.

 

님들의 견해는 어떤지 궁금합니다.

-팔각기둥을 올린 주초

-불상, 부도 기단석

 

황보탁(黃甫倬)...용암사기(龍巖寺記)                                                                                                                                                                     

萬嶽山在丹密縣西南三十餘里自太白山盤聯起伏案衍輻輳者不知其幾許惟此山孕靈蘊質屹然作鎭山洛人目爲餘山龍岩寺倚巉岩下臨淼漫是萬嶽山之鐘美也昔我太祖統合之初於此山東南陽占得勝地乃始開創仍入田六頃竝屬樵蘇之地以爲闡揚華嚴圓敎之所厥弛廢已久頹垣破礎介在嚴崖金餠之地變爲瓦礫蓮花之界渾作荆榛逃空虛者時踵焉不能住越甲午年上乃降手詔謂寺住持雲美曰近者惡人負固犯順聚邊人謀爲不軌乃命元戎攻城致討不唯凶徒自投羅綱抑我東民殞命矢石擬憑佛力以濟艱難惟師想我哀矜之意祈禱佛天師乃與衆尋繹舊所經歷可以棲眞演法福利國家者探幽選勝以至于是寺側然有興複之意於是利器械鳩材瓦經營於戊戌春三月至己亥十一月訖凡八十七間上以爲懿靜王后薦福之場屬田四十頃又以內帑物售得租二千石用充勸學油香之費命高僧智英住持焉噫釋氏之敎使夫蔽蒙倒置之俗遷善而罪還淳而返朴則實有補於理道也彼西人所以因壘而降不而太平者庸詎知其陰功妙力皆賴於此也今玆龍巖之成也役不過煩成不過侈無替前基無廢後觀非特能弘揚佛寺卓卓如彼抑以副主上恤民救弊之意如此其至也師俗姓金氏濱州人在妙齡灑然有出塵之志投雉嶽開善寺胤公講下而受業而博學高行上爲人主之所歸敬下爲學者之所瞻仰雖道安之豫章杞榟窺基之流檀闡惠何以加此.

 

만악산(萬嶽山)이 단밀현(丹密縣) 서남방 30여 리에 있는데, 태백산(太白山)으로부터 서리서리 연하여 일어났다 엎드렸다 하고 널브러져 모여드는 것이 얼마이지 알지 못하지마는 오직 이 산만은 영기를 품고 바탕을 온축(蘊蓄)하여 홀연(屹然)히 진산(鎭山)이 되었으니 상락(上洛)사람들이 덕산이라 지목한다.

 

용암사(龍巖寺)가 위로는 뾰족한 산에 의지하고 아래로는 질펀한 물에 임하였으니 이것은 만악산이 미(美)를 모은 것이다. 옛날에 우리 고려 태조(太祖)께서 통합(統合)한 처음에 이 산 동남 모퉁이에 좋은 땅을 정하여 절을 세우고 밭 6백 묘(畝)를 주고 나무할 땅을 붙여서 화엄(華嚴) 원교(圓敎)를 천양(闡揚)하는 곳으로 삼았다.

 

그 후에 해이(解弛)하고 폐한 지가 오래라 무너진 담과 깨어진 주추가 바위 언덕에 끼어 있고, 금병(金餠) 같은 땅은 변하여 기와쪽과 조약돌이 되었고, 연화(蓮花)의 지경이 모두 가시밭이 되어서 공허한 곳으로 도피하는 자가 혹 때때로 이르나 머무를 수가 없었다. 지난 1174년(고려 명종 4) 명종임금께서 친히 쓴 조서를 내리어 절의 주지(住持) 운미(雲美)에게 이르기를, ‘근래에 서쪽 사람들이 험고(險固)한 것을 믿고 우리에게 항거하여 변방 사람을 모아서 반역을 꾀하므로, 이에 원수를 명하여 성을 쳐서 토죄(討罪)하였는데 흉한 무리가 스스로 그물에 몸을 던질 뿐 아니라 우리 평민들도 화살과 돌에 목숨을 잃었다. 그래서 부처의 힘에 의지하여 간난(艱難)한 것을 구제하려 하니, 바라건대 그대는 나의 불쌍히 여기는 뜻을 생각하여 부처께 기도하라.’ 하였다. 그리하여 주지 운미가 여러 종들과 함께 예전에 지나본 곳으로써 진(眞)을 서식(棲息)하고 법(法)을 강연(講演)하여 국가에 복리가 되게 할 만한 곳을 찾아다녔는데 그윽한 곳을 더듬고 좋은 곳을 가리어 이 절에 이르렀다.

 

측연(測然)히 흥복(興復)할 뜻이 있어 기계를 날카롭게 하고 재목과 기와를 수집하여 1178년(고려 명종 8)봄 3월에 시작하여 1179년(고려 명종 9) 11월에 준공하였으니, 모두 87일간이었다. 명종임금이 의정왕후(懿靜王后)의 명복을 비는 곳으로 만들어 밭 40경(頃)을 붙이고 또 내탕(內帑)의 재물로 벼 2천 석을 팔아 들이어 학업을 권하는 것과 기름과 향의 비용에 충당하게 하고 고승(高僧) 지영(知英)을 명하여 주지(住持)하게 하였다. 슬프다! 석씨(釋氏)의 교가 가리고 몽매하여 거꾸로 놓여 진 풍속으로 하여금 착한 데에 옮기어 죄를 멀리하고 순진한 데로 돌아가고 소박한 데로 돌아오게 하니, 실로 다스리는 도(道)에 도움이 있는 것이다.

 

저 서쪽 사람들이 성(城)을 바쳐 항복하여 피를 흘리지 않고 평정된 까닭과 그 공과 묘한 힘이 대개 여기에 힘입음인지 어찌 알랴. 이제 이 용암사의 이루어짐에 있어서 역사가 너무 번거롭지 않고 제도가 지나치게 사치하지 않아서 앞사람의 기업을 변함이 없고 뒷사람의 보는 것을 폐함이 없었으니, 다만 능히 불사(佛事)를 크게 천양(闡揚)하기를 저렇듯 탁연(卓然)하게 할 뿐만 아니라 또한 주상(主上)께서 백성을 근심하고 폐단을 구제하는 뜻에 응부(應副)하기를 이렇듯 지극하게 한 것이다.

운미(雲美)의 속성(俗姓)은 김씨(金氏)인데 명주(溟州) 사람이다. 젊었을 때에 깨끗하게 진세(塵世)에 뛰어날 뜻이 있어 치악산(雉岳山) 개선사(開善寺)의 윤공(胤公)의 강연 아래에 들어가 수업하여 넓은 학문과 높은 행실로 위로는 임금의 의지하고 공경하는 바가 되고 아래로는 배우는 자들의 쳐다보고 우러르는 바가 되었으니, 비록 도안(道安)의 예장(豫章) 기재(杞梓)와 규기(窺基)의 유단(流檀) 천혜(闡蕙)라도 어찌 여기에 더하리오.(출처.다음)

 

2021.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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