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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효자 정엄 정려비. 충견상

임병기(선과) 2021. 9. 30. 0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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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자 정엄 비

양림동 157-1

 

정엄鄭淹의 정려비

1611년 세웠으나 마모가 심하여 1705년 1차 중수, 1975년 새로 세웠다고 합니다

 

효자광주정공엄지려(孝子 光州 鄭公 淹 之閭)

 

정엄鄭掩

"조선중기의 문신이다자는 문중文中호는 양촌楊村으로 본관은 광주다남구 양림동 출신으로 어려서 아버지의 친분으로 보우 스님에게 수학하였고 1552(명종 7)에 생원시에 합격한 200인 중 장원으로 합격하였다또 진사시에는 3등으로 합격하여 양림동에서 젊은 시절을 보냈다. 1558(명종 13)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로 임명되어호당에 들어가 선비들과 학문을 닦았다그 후 여러 관직을 거쳤다.


1562(명종 17)에는 사간원 정언, 1563(명종 18)에 예조정랑병조좌랑 사간원 정언을 거쳐 1564(명종 19)에 사헌부 지평에 임명되었고, 1566(명종 21) 병조 정랑으로 임명되었다그는 타고난 기질이 온화하고 일을 정확하게 처리하였으며 일상생활에서 지켜야 할 법도를 충실히 지켜 칭송이 자자했다. 1569(선조 2)에 사헌부 장령홍문관 수찬을 거쳐 외직으로 여산군수에 임명되었다전라감사는 전라도에 강직하고 명백하게 사건을 심리하여 송사를 판결할 수 있는 목민관으로는 정엄이라고 추천한 바 있다. 1571(선조 4)에 명종실록』 편수관으로 참여하였다.

 

같은 해 사헌부 장령으로 다시 내직으로 들어와 뒤에 교리를 거쳐 남원부사가 되어 목민관으로서 따뜻하게 민중들을 돌보고 자상하게 행정을 하되 문서를 처리하는 경우에 있어서는 모두를 친히 살펴 집행하고 민원을 막는 폐단이 없었다백성들이 매우 좋게 여겼다는 전라감사의 보고가 있었다.
전라순무어사 신응시의 보고서에 "남원은 사람이 많고 땅이 넓어서 예전부터 다스리기 어렵다고 하는데 부사 정엄은 목소리와 낯빛을 사납게 하지 않아도 아전이 두려워하고 백성이 따라서 부임한 지 오래지 않아 온 관내가 편안합니다몇 해 동안 유임시키고 경관으로 차출하지 말기를 바라니 어리석고 천한 백성이 사리를 모르는 것이기는 하나 그 성심으로 사랑하고 기뻐하는 것을 이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하였다.
1574(선조 7)에 전라감사 박민헌이 관내 포상 인물을 보고하는 서장에 "본도의 수령 중에 행정의 공로가 월등하게 나타난 사람들 중에 남원부사 정엄은 따뜻하게 민중들을 돌보고 자상하게 행정을 하되 문서를 처리하는 경우에 있어서는 모두를 친히 살펴 집행하고 민원을 막는 폐단이 없으므로 백성들이 매우 좋게 여겼습니다."하고 아뢰었다이 일이 있은 뒤에 바로 내직으로 발탁되어 승정원 동부승지에 임명되었다.

 

1574(선조 7)에 모친 봉양을 위하여 나주목사를 자청하여 선정을 베풀면서 어머니의 병을 간호하며 밤낮으로 옷을 벗지 않았다몸소 약을 달이고 변을 맛보며 정성껏 간병하면서 어머니를 대신할 것을 하늘에 빌었다 한다.
1579년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그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장사를 치른 뒤 아침저녁으로 곡을 하며 묘 곁에서 시묘살이를 하던 중 이듬해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났다이 갸륵한 효성을 모두의 귀감으로 삼고자 1611(광해 3)에 당시 예조판서 이정구의 상소로 생가 터 입구에 효자 정려를 내리면서 사헌부 대사헌에 증직하고 정려각이 세워졌다."(광주 역사문화 이야기)

 

1611(광해 3)에 당시 예조판서 이정구의 상소로 생가 터 입구에 효자 정려를 내리면서 사헌부 대사헌에 증직하고 정려각이 세워졌습니다.

 

비수

연잎이 바람에 들려 있고, 연맥을 표현하였습니다,

상부에 굄을 두고 일석으로 보주를 올렸습니다

 

증가선대부사헌부대사헌겸 홍문관제학예문관제학동지 경연춘투관의금부사오위도총관

세자좌부변행통정대부승정원동부승지겸 경연춘추관의춘추소선관지제

고양촌정선생 정려비

贈嘉善大夫司憲府大司憲兼弘文館提學藝文官提學同知經筵春秋館義禁府事五衛都摠管

世子左副賓行通政大夫承政院同副承旨兼經筵參贊官春秋館修撰官知製敎

楊村鄭先生 旌閭碑

 

후면

 

충견비

정엄이 길렀던 개의 석상으로 정려비와 함께 조성되었습니다.

 

광주 역사문화이야기 100선에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효자정려비 앞에 돌로 만든 동물 모양의 상이 있는데이것은 개의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지금은 한국콘텐츠진흥원이 주관하는 '2014 지역 전통 소재 캐릭터 개발 지원 사업'에 선정돼 마을의 마스코트로서 자리 잡아가는 중이다.
이 개는 어찌나 영민했던지 주인 수호는 물론 모든 심부름을 도맡았다고 한다덕분에 개를 통해 간단한 서신 심부름을 시킬 수 있었다개는 정엄이 써주는 서신을 목에 걸고 한양과 평양 등 각 감영에 문서수발을 하였다당시 말이나 사람새를 통해 전하는 것보다 빨랐다고 하니주인을 위해 봉사하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전해지기로는 개의 목에는 편지를 담은 지대와 함께 목에 엽전을 넣은 전대를 달아주었다고 한다이 전대로 개는 가다가 배가 고플 때 주막에 들러 밥을 얻어먹고 주막 주인이 전대에서 돈을 꺼내 가도록 했다만일 주막집 아낙이 돈을 너무 많이 가져가면 떠나지 않고 으르렁거려 모든 주막 주인들이 이 개에게만은 사람대우를 했다는 일화가 전해오고 있다.
한양과 평양을 오가며 양촌의 손발이 되었던 이 개는 한양에 심부름을 갔다가 임무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전주의 강가 다리 밑에서 새끼 9마리를 낳고 한 마리씩 입에 물고 집으로 옮겼다고 한다그러던 중 마지막 한 마리를 물고 돌아오다 집 앞 길가에서 지쳐 숨을 거두었다.
정엄은 애견이 새끼를 낳을 달을 모르고 심부름을 보낸 죄책감으로 "내 개를 내가 죽였다."고 통탄하며 석공을 시켜 충견상을 조각해 집 뜰에 두고 그 개를 추모했다고 전해진다이 충견상은 정엄이 타계한 뒤에 1611년 나라에서 정려가 내려져 그의 후손들은 양촌공 정려각을 지은 뒤 그 충견상을 정려각 옆에 세워 양촌공과 그 개를 함께 기렸다고 전한다."

 

우리나라의 동물 무덤

https://blog.daum.net/12977705/8726933

 

2021.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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