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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포충사. 충노 봉이, 귀인의 비

임병기(선과) 2021. 8. 19. 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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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충사(褒忠祠)

광주광역시 남구 포충로 767에 위치한 선조 34년(1601년) 사당을 세웠으며, 1603년 선조가 포충이란 액호를 내리고 예관을 보내 치제하게 하였으며 고경명 선생을 중앙, 동배위로 장남 고종후, 안영, 서배위로 차남 고인후, 유팽로를 배향하고, 매년 4월 15일 제향하고 있습니다

 

현재 사우는 1980년대 정화사업으로 새롭게 조성되었으며, 외삼문, 전시관, 내삼문, 포충사를 배치하였습니다.

포충사 향 좌측 언덕 위의 옛사우는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도 훼철되지 않았으며, 외삼문, 묘정비, 사당, 동,서재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충효문(忠孝門)

포충사의 외삼문입니다

 

외삼문과 내삼문 사이에는 연못, 전시관, 충노비가 자리하며, 배롱나무 등이 잘 가꾸어져 있습니다

 

성인문(成仁門)

포충사 내삼문입니다

 

포충사(褒忠祀)

 

배향 인물

고경명 선생의 진영과 다섯 분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습니다.

 

배향 인물 소개 글은 포충사 홈페이지 자료입니다.

 

고경명(高敬命) (1533 ~ 1592)

자(字)는 이순(而順), 호(號는) 제봉(霽峰) 또는 태헌(苔軒)이며, 본관은 장흥으로 부제학(富提學) 맹영(孟英)의 아들이다.

1552년(명종(明宗) 7년)에 진사시(進士試), 1558년에 문과(文科)에 장원(壯元)하여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이 된 후로 호조좌랑(戶曹佐郞), 세자시강원사서(世子侍講院司書),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 형조좌랑(刑曹佐郞)을 역임했다.

한 때 벼슬을 떠났다가 다시 영암군수(靈巖郡守), 승정원판교(承政院判校), 동래부사(東萊府使)를 역임한 후 1591년 벼슬을 떠나 고향에 쉬던 중 임란을 만나 예순의 고령(高齡)을 무릅쓰고 의병(義兵) 7천여명을 모아 선조(先祖)의 행궁(行宮)이 있던 평안도로 달려갔으나, 가는 도중에 금산(錦山)에서 마주친 왜군(倭軍)과 싸우다 전사(戰死)했다.

후에 의정부좌찬성(議政府左贊成)에 추증(追贈)되었으며 시호(諡號)는 충렬(忠烈)이다. 금산성곡서원(錦山星谷書院) 종용사(從容祠) 순창화산서원(淳昌花山書院)에도 배향(配享)되었다.
저서(著書)에「제봉집(霽峰集)」, 「유서석록(遊瑞石錄)」이 있다.

 

고종후(高從厚) (1554 ~ 1593)

자(字)는 도중(道仲), 호(號)는 준봉( 峰)이고 고경명(高敬命)의 장남(長男)으로 1570년(선조 3년) 진사(進士)가 되고, 1577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내과(內科)로 급제 임피현령(臨陂縣令), 지제교(知製敎)를 역임했다.

임란(壬亂) 때 금산전투(錦山戰鬪)에 참가했으나 아버지와 아우를 잃은 뒤 다시 의병(義兵)을 일으켜 왜적에게 대항했으며, 1593년 진주성이 위태롭게 되자, 김천일(金千鎰), 최경회(崔慶會)들과 함께 진주성 지키기에 전력을 다하였으나 성은 함락되었고, 의분을 못이긴 고종후는 김천일과 함께 남강에 투신하여 장렬한 최후를 하였다.

후에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追贈)되었고 시호(諡號)는 효열(孝烈)이다. 포충사(褒忠詞)와 진주(晋州) 장렬사에 제향(祭享)되었다.

 

고인후(高因厚) (1561 ~ 1592)

자(字)는 선건(善健), 호(號)는 학봉(鶴峰)이며 고경명(高敬命)의 둘째 아들이다.

1577년 진사(進士)가 되고 1589년 증광내과(增廣內科)에 병과(兵科)로 급제하고 성균관학유(成均館學諭)를 지냈다. 임란 때 부와 함께 금산 전투에서 순절했다.
후에 예조참의(禮曺參議)에 추증(追贈)되었고, 인조(仁祖) 때 영의정(領議政)에 가증(加贈)되었으며, 시호(諡號)는 의열(義烈)이다. 포충사와 금산(錦山) 종용사(從容祠)에 배향(配享)되었다.

 

유팽노(柳彭老) (1554 ~ 1592)

자(字)는 군수(君壽), 호(號)는 월파(月坡), 본관(本貫)은 문화(文化)이며 유경안(柳景顔)의 아들이다.

1588년(선조(先祖)21)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홍문정자(弘文正字), 성균관학유(成均館學諭)를 지내다가 고향인 곡성(谷城) 옥과(玉果)에 내려와 있던 중 임진왜란(壬辰倭亂)을 겪게 되었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양대박(梁大樸), 안영(安映) 등과 함께 의병(義兵)을 일으켜서 담양(潭陽)에서 고경명군(高敬命軍)과 합치고 종사관(從事官)이 되었다. 금산(錦山) 전투에서 전사했다.

후에 사간(司諫)에 추증되었다. 옥과(玉果)의 영귀서원(詠歸書院), 금산(錦山)의 종용사(從容祠)에도 제향(祭享)되었다.

 

안영(安映) (1564 ~ 1592)

자(字)는 원서(元瑞), 본관(本貫)은 순흥(順興)이며 교리(校理) 처순(處順)의 증손자이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서울에 있는 어머니를 모시러 상경하다가 고경명(高敬命)의 의병군(義兵軍)에 가담하여 여러 전투에서 전공을 세우고 금산(錦山) 전투에서 고경명(高敬命)을 보좌하여 싸우다 전사했다.

후에 장악원첨정(掌樂院僉正)에 추증되었다. 남원의 충민사(忠愍祠)에도 제향(祭享)되어 있다.

 

내삼문 앞 배롱나무 꽃이 절정이었습니다.

난생처음, 사진작가와 모델의 촬영 현장을 목격하고 소심한 탓에 멀리서 한 컷 잡았습니다

 

충노비

포충사 향 좌측 옛사당 입구 홍살문 옆에 위치합니다.

 

충노

봉이((鳳伊), 귀인(貴仁)之碑

단독 바위를 장방형으로 깊게 파내고 음각하였습니다.

명문이 없어 세운 시기를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포충사와 동시대에 건립된 마암비로 추정됩니다

 

봉이와 귀인은 고경명 선생의 사노로서 금산 전투에 의병으로 참가하여, 순절한 고경명 선생과, 차남 고인후의 시신을 수습하여 장시 지냈다고 합니다. 이듬해 장남 고종후 선생과 함께 진주성 전투에서 함께 순절하였습니다.

 

우리나라의 충노비

https://blog.daum.net/12977705/8727148

 

포충사

고경명 선생 3 부자와 유팽로 선생, 안영 선생을 제향 하는 사당입니다.

고경명 선생 집안은 본인뿐만 아니라 두 아들과 딸, 그리고 사노가 임진왜란 시에 목숨을 바친 유례가 없는 집안으로, 광주 답사 기회가 되면, 그들을 기리는 포충사와 함께 충노비도 함께 살펴보기를 권합니다.

 

2021.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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