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정(松亭)
길안면 구수리 174번지
숭정처사 유허비 앞쪽에 위치합니다.
표은 김시온(1598∼1669)을 추모하기 위해 적암 김태중이 숙종 5년(1679)에 건립하였습니다. 1988년 임하댐 건설로 옮겨왔다고 합니다.
송정을 중심으로 향우 측 뒤에는 와룡초당, 좌측에는 숭정처사 유허비가 배치되어 있습니다.
출입문
정면
측면
숭청처사유허비각
출입문
비각
숭정처사 유허비(崇禎處士 遺墟碑)
표은 김시온을 기리기 위헤 세운 비석입니다.
대좌 갑석에는 복련을 조식하였고, 중석은 연주문으로 구확하여 안상을 겹쳐 새겼습니다. 비신 사면에는 명문을 돌아가며 기록하였으며, 정면에 숭정처사 유허비를 새겼습니다. 비문은 비신 정면 향우 측에서 시작하여 사면을 거쳐 정면 좌측에서 맺은 것 같습니다. 이수는 상부를 둥글게 마무리하였으며, 운문으로 장식하였습니다.
김시온金是榲(1598∼1669)
"본관은 의성(義城)이며, 자는 이승(以承)이고 호는 도연(陶淵)·표은(瓢隱)·숭정처사(崇禎處士)이다. 큰아버지인 사성 극일(克一)에게 입양되었다. 어려서부터 학문만을 좋아하고 벼슬에는 뜻이 없었다. 경서(經書)의 연구에 심취하였으며, 특히 예학(禮學)에 조예가 깊었다. 경상북도 안동(安東)의 와룡산(臥龍山) 아래 와룡초당을 짓고 40여 년 동안 절의(節義)를 지키고 후진 양성에 힘썼다.
인근의 수령들이 학문과 덕행으로 여러 번 천거하였고, 나라에서도 벼슬을 내렸으나 응하지 않았다. 이홍조(李弘祚) 등의 유림(儒林)과 함께 김성일(金誠一)의 문집인 《학봉집 鶴峰集》을 완성하였다. 사후인 1734년(영조 10) 3품직인 집의(執義)에 추증되었다. 경상북도 안동의 도연서원(道淵書院)과 경절사(景節祠)에 제향되었다. 문집으로 《표은집》이 있다."
(두산백과)
비문
밀암 이재가 찬하고 증손 김성월의 글씨라고 합니다.
“숭정처사김공유허비 사람이 참으로 조용한 곳을 즐겨 숲과 연못을 찾아 부귀와 영화를 버리는 자는 비록 그의 맑은 모습과 빼어난 운치가 저 중국의 은둔자인 소부(巢父), 허유(許由)가 백중을 겨룬다 해도 군자가 그것을 볼 때는 ‘자기 몸만 깨끗이 하여무리를 어지럽힌’ 기롱을 면치 못하리니 어찌 숭상할 만하겠는가.
오직 천하의 큰 인륜을 밝히고 일세의 대의(大義)를 부지하며 높은 지위를 진흙에 던지고 자신이 드러나지 않더라도 부끄러움이 없어 그 같은 풍성과 기열이 우뚝하게 삼강오상의 중함을 더하기에 충분한 뒤라야 지극하게 되었다 할 것이다. 옛사람으로 서산(西山)에서 굶어 죽은 동국(東國)의 고사(高士)와 저 진나라 징사(徴士)와 송나라 유민과 같은 몇 분의 군자는 이로 말미암아 전성(前聖)과 후현(後賢)들이 누차 칭송하였는데, 칭송한 이들은 무엇을 취하고자 함이었던가. 그들은 대개 역시 만세의 강상(綱常)을 위한 계책이었던 것이다.
지금에 표은 김선생(김시온)과 같은 분은 숭정처사로서 와룡산(臥龍山) 아래에서 늙어 세상을 마친 분인데, 그 분이 바로 큰 인륜을 밝히고 대의를 부지하여 삼강오상의 중함을 더하여서 저 몇몇 군자들에게도 부끄러움이 없었던 이가 아닐까? 선생은 어려서부터 모습이 빼어나고, 가슴에 품은 생각이 시원하고 깨끗하여 빛남이 마치 학과 같고 맑은 얼음과 같았으며, 세상에서 얻고 잃음과 기쁘고 슬픔이 마음에 걸릴 것이 없었던 분이다. 선생은 오직 도의(道義)와 명절(名節)로 스스로를 갈고 다듬었던 것이다.
숭정(崇禎) 병자년(인조 14, 1636)에 국가의 비상한 변란이 있자 선생께서는 개연히 곧장 바다로 들어가고 싶은 분함이 있어 와룡산 밑 도연 가에 들어와 초가집을 짓고 송대(松臺)를 만들어 그 집 이름을 와룡재(臥龍齋)라 하고 대표(大瓢)라 자호하였으니 모두 지명을 딴 것이었다.
앞쪽으로는 푸른 암벽과 맑은 물이 있고 기암괴석에 폭포가 떨어지며 백사장과 깊은 소나무 숲들은 동남 지방에서 경치가 가장 빼어난 곳으로 이름났다. 선생은 날마다 그 주위를 이리저리 거닐고 선왕(先王)의 도를 노래했다. 때때로 벗을 모아 술잔을 나누는 모임을 가지면서 대화가 서울에 이르면 문득 가슴 가득한 슬픔으로 몇 줄기 눈물을 뿌렸다. 선생은 이미 세상에 알려지기를 원치 않았으나, 세상에서 선생을 끌어당기는 이가 많았다. 그러나 동강(東岡)은 은둔하려는 뜻이 확고하여 변함없었다.
일찍이 ‘내가 죽거든 나의 묘소에는 숭정처사의 묘라고 쓰면 될 것이다.’라고 말씀했다. 선생의 제자인 의조(儀曺: 예조) 원외랑 김학배(金學培) 공이 행장을, 미수(眉叟) 문정공(文正公) 허목(許穆)이 묘갈명을 지어 그 같은 사적을 모두 말했다.
아! 지금은 선생의 시대와 50년이 떨어진 때다. 선생의 높은 산악과 같이 우뚝하고 깊은 연못과 같이 침묵하던 모습을 비록 다시 볼 수 없으나, 다행히도 옛집 터가 남아 있다. 강산이 의구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상상하고 흠모하여 마지않게 하니, 참으로 높은 산과 같은 훌륭한 행실이 덕을 좋아함과 같은 것이로다.
대총재(大冢宰: 이조판서)를 지낸 오시복(吳始復) 공이 예서(禮書)를 잘 썼는데 선생의 풍을 듣고는 흠모하여 ‘숭정처사유허’라는 대자(大字) 여섯 글자를 쓰고 그것을 돌에 새겨 그 마을에 세우게 했으니 대개 어진 자를 드러내는 고사에 따른 것이다. 이에 일방의 인사들이 힘을 합해 돌을 다듬었는데, 일을 마치자 나에게 그 일을 상의했다. 나는 선생의 위대한 발자취를 졸렬한 글로 쓸 수 없다는 이유에서 여러 번 사양했어도 허락받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외람되게도 그 일의 시종에 나아가 느낀 바를 가만히 이렇게 적었다.
저 높은 지위와 많은 녹을 받고 나라의 은총을 받던 이가 하루아침에 이해관계에 따라 사변을 일으키고 인륜을 해치며 하늘의 기강을 배반하고서도 부끄러워하지 못하자, 선생은 해외의 한 조그마한 몸으로 이름이 드러나지도 않았지만 깨끗한 바탕에 몸을 맡겨 이에 홀로 숭정일월(崇禎日月)을 한 지역 임천(林泉)에서 보존하였고 자신은 우주의 동량으로 삼아 마치 무너져 오는 파도에 우뚝 선 지주와 같이 하였으니, 어찌 다른 이유에서였겠나.
다만 충의의 본성이 마음에 가득하고, 취하고 버리는 분수가 밖으로 밝게 드러났으니, 아 부귀와 빈천으로 꺾을 수 없는 것이 있었을 뿐이다. 아! 위대하시도다. 그런데 천추에 한 조각의 돌에 새긴 산문에 우뚝하게 서서 길이 후세인들로 하여금 그윽하게 느낌이 일게 하여 백세가 하루와 같으니 그것이 맑은 바람을 일으켜 완악한 지아비를 청렴하게 하여 만고의 윤리 강상에 기여케 하였다. 이는 곧바로 옛 미정(薇亭)과 취석(醉石)과 함께 아름다운 이름이 있으리니 어찌 다만 한때의 호사(好事)가 된 성도(成都)의 초당비(草堂碑)와 같은 것이겠는가.
선생의 휘는 시온이요, 자는 이승(以承)이다. 선생의 관벌(官閥)·세계(世系)·학문·행업(行業)의 상세한 사항은 이미 다른 분들이 쓴 글과 나의 선생이 태재(太宰) 때 만든 유권(遺卷) 서문에 갖추어져 있기에 나의 군더더기 말을 필요치 않는다. 이어서 시를 쓴다. 그 시는 이러하다.
오직 하늘에서 인간을 내리니 사람에게 인륜이 있는 것을
그 인륜은 무엇이던가?
부자유친 군신유의가 그것이네
저토록 많은 사람들이여! 뉘라서 이 덕을 갖지 않았으리
그러나 이익에 갇히어서 그 법칙을 어지럽게 상실하였다네
가까운 동료를 보더라도 더러는 이 마음을 바꾸기도 했었다네
아득히 머나먼 모퉁이여! 먼 물가에 터를 잡았다네
그곳에서 무엇을 하려고 하셨던가! 오직 의를 가지셨던 것을
이미 천심을 가지셨던 것을 또한 인기(人紀)로 부지했지
와룡 세상 터에 비를 세워서 숭정(崇禎) 절의를 밝게 드러냈네
산은 높고 물은 쉼 없이 흐르나니 무궁한 선생의 풍도와 명성일세라.
숭정 병자년 후 82년 정유년(숙종 43, 1717) 정월 경오에 후학 안릉(安陵) 이재 삼가 기록하다. 지금 임금(영조) 을묘년(1735)에 연신(筵臣: 김성탁)의 진달에 의해 특명으로 사헌부집의에 증직되어 병술년(영조 42, 1766) 4월일에 다시 덧붙여 새겼다. 후학 족(族) 증손 김성월(金聖鉞)이 쓰다"(디지털 안동문화대전)
탁본(출처.불교중앙박물관)
대좌 정면
대좌 측면
이수 정면
이수 측면
비신 후면
대좌 후면
비신 측면
표은 선생의 유허비는 작년 대구 팔공산 답사에서 인지하여 오늘 찾았습니다
팔공산 숭정처사 유허비
https://12977705.tistory.com/8726650
와룡초당
숭정처사
명에 대한 절의는 읽는 사람의 몫으로 두겠습니다.
2021.0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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