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남도/함양군

함양...지리산 군자사지

임병기(선과) 2020. 12. 28. 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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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자사지 君子寺址

마천면 군자리 467번지 

이곳이 현재까지 알려진 군자사지의 금당터입니다.

 

오늘은 마을에 당간지주, 부도와 석탑 부재가 유존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몇몇 분들과 확인 차 들렸으며, 마을 주민의 안내로 사지를 조사하였으나 알려지지 않은 부도재만 찾았습니다. 일주일 후 대전의 이영규 님을 비롯 여러 분이 다시 사지를 찾아 동민으로부터 부도 2기, 석탑 부재가 매장된 장소를 알았다고 합니다. 훗날 유물이 공개되는 시점에 다시 들려야겠습니다.

 

창건과 폐사에 대한 기록은 전하지 않습니다.

"사찰의 연혁은 이덕무(174l~1793)가 함양군 사근역 찰방 재직 중 1783년에 군자사에 머물 때 옮겨 적은 현판 사적기에는 당시 군자사에는 10여명의 승려만 있는 퇴폐(頹廢) 사찰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덕무가 옮겨 적은 사적기는 1684년에 승려 형곡 복환이 기록한 내용으로 "신라 진평왕이 578년 왕위를 피해 이곳에 있을 때 태자를 낳고. 이후 환도하면서 이곳의 집을 사찰로 창건하여 군자사로 명했다고 합니다. 이후 고려시대 불일국사가 중창에 실패하였으며, 진각국사가 중창하였고, 1,317년(고려 충숙왕4) 혜통화상에 의해 중수되고, 여말선초 왜구의 침략으로 전소되고 1,404년 행호대선사가 중창하였다고 전합니다." (한국의 사지 발췌 정리)

 

그리고 일제강점기 박한영 스님 글에는 군자사의 위상을 짐작케 하는 글이 있습니다.

1,933년 지리산 천왕봉의 위용

"또한 사대 명찰이 있으니 영원(靈源) 벽송(碧松) 금대(金臺) 안국(安國)이 벌여 있다. 지금은 모두 따로 사찰이라 칭하지만 옛날에는 같은 땅 안에 있는 군자사에 속한 암자였다. 군자사는 지금은 유허지로만 남아있다"

 

 

1,684년 이전의 조선시대 유산기에는 군자사의 사명이 영정사(靈井寺)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박여량. 두류산 일록(1,610년)

군자산은 옛 이름이 영정사다. 진평왕이 즉위하기 전에 어지러운 조정을 피해 이 곳에서 머물렀다.

그때 아들을 낳아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한다.

 

-. 유몽인. 유두류산록(1,611년)

군자사로 들어가 잤다. 절 앞에 영정(靈井)이 있어 영정사라 한다. 지금을 이름을 고쳐 군자사라하는데 유래를 모르겠다.

 

-.박장원. 유두류산기(1643년)

저녁때 군자사(君子寺, 현 함양군 마천면 군자동)에 이르렀다. 이 사찰의 본래 이름은 영정사(靈井寺)였었는데, 신라 진평왕이 이곳에서 아들을 낳았기 때문에 사찰 이름을 군자사로 고쳤다고 한다. 

 

또한, 구전되는 진평왕 창건설에 대한 사적은 조선시대 문헌에는 기록되어 있습니다.

 

-. 신동국여지승람(1,530년).경상도

군자사(君子寺)는 지리산에 있다. 신라 진평왕이 왕위를 피해 여기서 살다가, 태자를 낳아서 돌아가고, 집은 희사하여 절로 만들었다"

 

-. 천령지(정수만, 1,653년).1,888년 후손 정환주 간행

군자사는 지리산에 있다,. 이하 내용은 위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으나, '지금은 없다'라는 글로 미루어,1,888년 이전에 폐사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신라 진평왕 진평왕 태자 태실지와 금표 암각문.

http://blog.daum.net/12977705/8727021

 

 

군자사지가 우리에게 회자되는 까닭은 조선 시대 많은 선비들의 지리산 유산록에 거의 빠짐없이 등재되어 탐방단의 규모, 동행한 인물, 남려꾼, 기생, 악공 등 유람단 구성원을 살펴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유생들의 숙소의 활용된 군자사의 모습과, 승려 들의 사회적 신분을 알 수 있는 기록이 곳곳에 확인됩니다.

 

유산록에 실린 재미(?) 있는 내용 중의 압권은 1,610년 박여량의 두류산일록입니다. 

 

군자사 앞에 있는 시내는 험악하여 말을 타고 건너기에는 넘어질까 염려스러웠다. 산골 백성 중에 건장한 자들을 불러다 업고 건너게 하여, 먼저 절 앞의 남쪽 누각에 올랐다. 한참 뒤에 박여승과 정덕옹 등이 노래하는 기생과 피리 부는 악공을 앞세우고 도착하였다. 절의 승려가 산에서 나는 과일과 오미자차를 내왔다.

이윤적(李允迪)과 박대주는 저녁밥을 먹은 뒤에 술자리를 베풀었다. 악공들의 연주와 기생들의 노래가 어우러져 한창 즐거울 무렵 나는 먼저 승방(僧房)으로 갔다. 취해서 자고 있을 때 웃고 즐기며 노래하고 북 치는 소리가 들렸다. 한밤중이 되도록 아무도 자러 오지 않았다. 정덕옹 이하 여러 사람들이 모두 일어나 춤추고 놀았기 때문이다. 술자리가 파한 뒤에 박여승이 내 방으로 와서 청원향(淸遠香) 두 개를 가져갔다. 박여승의 오늘밤 계획은 끝내 이루지 못했으며 청원향 두 개도 자신이 사르지 못하고 두 기생의 소매 속으로 들어갔다고 하니, 웃을 만한 일이다.

군자사는 옛 이름이 영정사(靈淨寺)이다. 신라 진평왕이 즉위하기 전에 어지러운 조정을 피해 이 절에 와 거처하였다. 그때 아들을 낳게 되어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고 한다. 안국사(安國寺)도 이때에 그 이름을 얻은 듯하다. 전란을 겪은 뒤에 중창한 것은 법당∙선당(禪堂)∙남쪽 누각뿐이다.

 

 

영정(靈井)

1,611년 유몽인 유두류산록에 실린 샘으로 추정. 

안내한 주민의 말씀에 의하면 마을에는 샘이 5개 있었다고 합니다.

 

 

미나리깡

1,601~1,603년 함양군수를 지낸  고상안의 태촌집에 실린 미나리깡으로 현재는 밭으로 변했습니다.

고상안은 우물물의 성분 때문에 개구리가 살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우물터

담장도 우물지라고 합니다

 

 

우물지

이곳도 우물이 있었다고 합니다.

 

 

돌확, 수조

예전에는 마을 곳곳에서 군자사지 유물이 산포하고 있었으나, 외지인들의 반출, 매입 등으로 마을에는 거의 유물이 남아있지않습니다.

 

 

 

군자사지

금당터와 별개 구역으로, 내가 다녀온 후 일주일 뒤에 다시 들린 이영규 선생의 전언에 의하면 이곳은 군자사지 다비장이며 대숲에는 부도 옥개석이 있습니다.

 

 

대숲

입구에 2기의 석조 부재가 유존하며, 안내한 주민의 말씀에 의하면 서암정사로 옮겨 간 부도 지대석이라고 합니다.

저의 기억으로는 서암정사에 조선 후기 부도가 없으나, 서암정사 근처, 벽송사 아래 부도전에 경암당, 남곡당 부도가 있을 뿐입니다.

 

 

벽송사 부도전

(좌)경암당 鏡巖堂, 경암집 鏡巖集을 쓴 應允 鏡巖(1743~1803)

(우)남곡당 南谷堂

 

 

부도 지대석(1)

군자사지에 남아 있는 부도 지대석이 벽송사 경암당, 남곡당 부도 지대석이라는 근거는 없습니다.

 

 

부도 지대석(2)

 

 

대숲

2기 부도가 있다는 대숲을 뒤졌으나 부도는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부도 옥개석

부도는 찾지 못했으나 알려지지 않은 팔각원당형 부도의 옥개석을 발견했습니다.

문화재청 한국의 사지에는 "추정사역에 대해 1942년 자료에는 율봉당 승탑을 비롯 부도 3기를 별도 사지로 구분하지만 1,977년 부터는 같은 내용으로 포함하고 있다. 1.987년, 1,996년 자료에는 군자마을 대밭 숲 내에 팔각원주형 승탑과, 당간지주, 기단석 등이 있고 인근 도마 마을에 율봉당 승탑 등이 있다고 한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즉, 팔각 부도 옥개석은 한국의 사지에 언급된 팔각 원당형(한국의 사지에는 원주로 표기) 승탑 옥개석으로 추정됩니다.

 

그러나,  동행한 함양 서복회원들과 도마마을 주민들은 군자사지와 도마사지를 별도로 생각하였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도마사가 군자사의 산내 암자일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생각됩니다.

 

 

벽송사 부도전

벽송사 뒤편 삼층석탑 구역의 부도전

율봉당 승탑을 비롯 3기 부도는 군자사지 옆 도마사지에서 옮겨 간 부도이며, 20년 전 마천면지를 발간한 함양 서복연구회 문호성 회장님의 전언에 의하면 당시에는 도마 마을에 있었다고 합니다(도마 사지에서 별도 설명)

 

 

옥개석

낙수면 물매가 깊고, 내림마루를 돋을게 표현하였으며, 받침 위에 연화 보주를 일석으로 새겼습니다.

 

 

2기의 매장되었다는 부도 중의 1기가 이 부도의 팔각 원당형 부도일까요?

옥개석은 근처 영원사의 청매선사  팔각원당형 부도 옥개석과 흡사합니다.

 

 

영원사 청매선사 부도

 

 

벽송사 부도전(1)

 

 

벽송사 부도전(2)

 

현재 벽송사에는 군자사지(도마사지)에서 옮겨 간 5기(3기는 확인, 2기는 추정) 부도가 남아 있습니다.

주인공을 추적하기 위해 여러 유산록을 찾았지만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선인들의 유산록 중 불교에 조예가 깊은 정시한 선생의 산중일기(1,686년)에는 군자사의 명학과 팔우 등 여러 승려가 등장하지만 부도 당호의 스님은 찾지 못했습니다.

 

또한 선비들의 유산기에 실린 군자사 승려 중 우리에게 익숙한 분은 청허 서산대사, 사명당, 청매 스님입니다.

 

박장원, 유두류산기(1643년)

저녁때 군자사(君子寺, 현 함양군 마천면 군자동)에 이르렀다.  이 사찰의 본래 이름은 영정사(靈井寺)였었는데, 신라 진평왕이 이곳에서 아들을 낳았기 때문에 사찰 이름을 군자사로 고쳤다고 한다. 

사찰 건물들이 모두 웅장하고 화려하였다. 
서쪽에 있는 삼영당(三影堂)은 새로 지은 건물인데, 노란빛과 푸른빛을 곱게 발하고 있었다. 
그 안에는 청허·사명·청매 세 대사의 초상화가 있었다. 촛불을 들어 비추어보니 부드러운 음성이 들리는 듯하였다. 
그중 사명대사는 머리를 깎지 않았는데, 머리가 길고 아름다웠다. 정말로 잘 생긴 남자였다.

 

서산대사와 사명대사는 우리가 익히 아는 스님이지만 청매선사는 널리 알려진 스님이 아닙니다.

함양 오도재의 유래와 관련된 스님이며, 현재 영원사에 부도(첫 답사 때는 사찰 경외 능선, 두 번째는 사찰 경내, 세 번째 방문 때는 다시 원위치인 경외 산 능선)가  있습니다.

 

지리산 영원사와 청매선사 부도

http://blog.daum.net/12977705/8724007

 

 

군자사지

선인들의 지리산 유산록에 등장하는 사찰이어서 미답처에 오랜 기간 남아 있었습니다.

일찍 인연 짓지 못한 까닭은 석조 유물이 유존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으나, 함양 서복회 문호성 회장님, 강재두 부회장님을 비롯 회원들, 지리산 박사이며 산증인 민병태 선생, 지리산 유산록, 인문학과 지명 탐구에 열정을 쏟아붓고 계시는 이영규 선생 덕분에 1차 답사하였습니다. 작은 발걸음에 이어 땅에 묻혀 있는 군자사지 유물이 세상에 드러날 그날을 학수고대하며, 첫 답사의 감흥을 되새겨봅니다.

 

2020.12.06

 

(지리산 유산록의 해석문은 지리 99카페에서 발췌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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