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남도/함양군

함양...마적사지 석불대좌

임병기(선과) 2020. 12. 11. 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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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적사지(馬跡寺址, 馬迹寺址)

휴천면 송전길 345-180 독가촌 주변에 위치

신라 무열왕(659년) 때에 마적 도사가 창건한 절로 전하지만, 사적은 알려지지 않고 있으며, 사지에는 와편, 우물터, 석축이 유존 하지만, 주민 거주, 경작 등으로 원상이 훼손된 상태입니다.

 

문화재청 발간, 한국의 사지

"新增東國 輿地勝覽을 비롯한 조선시대 문헌과 기조사 자료에 지리산에 있었다고 전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사찰 이름이 고승 馬迹이 살았던 곳이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이라 고 한다. 마적사 앞에는 瑜珈臺가 있고, 밑에는 水潛灘이 있으며, 탄 위가 곧 龍遊潭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내용은 東國輿地志와 輿地圖書, 梵宇攷, 嶺南邑誌(1871), 嶺南邑誌(1895), 慶尙南道咸陽郡邑誌(1899) 등에도 언 급되었다. 그러나 18세기 중반에 발간된 여지도서와 그 이후 문헌에는 모두 “今無”라고 기록되었다"

 

마적 도사와 관련된 설화도 구전되고 있습니다.

"옛날 마적도사가 종이에 쇠도장을 찍어서 나귀에게 부쳐 보내면 그 나귀가 어디로인지 가서(엄천사로 갔으리라고 짐작이 된다) 식료품과 생활필수품을 등에 싣고 오게 된다. 그 말이 용유담 가에 와서 크게 울면 마적도사가 쇠막대기로 다리를 놓아 나귀가 용유담을 건너오곤 하였다 한다. 하루는 마적도사가 나귀를 보내 놓고 장기를 두고 있었다. 그때 마침 용유담에서 용 아홉 마리가 놀다가 싸움을 시작하였다.

 

용이 싸우는 소리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장기에만 골몰하고 있었다. 장기에 정신을 빼앗기고 폭포수 쏟아지는 소리와 자연에 도취하다보면 시간 가는 줄도 모른다. 나귀가 와서 울었는데도 마적 도사는 듣지 못하고 장기만 두고 있었다. 나귀는 강변에 짐을 싣고 서서 힘을 다해 울부짖었으나 반응이 없어 그대로 지쳐 죽었다고 한다. 나귀가 죽어서 바위가 되었는데 그 바위가 곧 나귀 바위다. 마적 도사는 나귀가 죽어서 화를 못 참고 장기판을 부수어 버렸다. 그 장기판 부서진 조각이라는 돌들이 지금도 군데군데 흩어져 있다."

 

위 자료를 살펴보면 몇 가지 의문이 듭니다.

마적사를 창건한 마적을 왜 도사로 표현했는지, 스님들과 익숙하지 않은 장기를 즐겼는지...

혹 도교와 관련은 없을까요?

 

아홉 용 설화도 양산 통도사 창건 설화에 등장하는 구룡지의 악용처럼 불교를 전파하는 과정의 일부이며, 마적사 창건 설화로 생각됩니다.

 

또한, 유가대(瑜珈臺)는 스님들의 좌선대로 생각되며, 세진대(洗塵臺) 이전의 명칭으로 보고 싶습니다.(참고로 대구 달성군 유가읍에는 비슬산 유가사가 있습니다)

 

 

마적사지에서 바라본 엄천강. 금대산

 

마적사지(馬跡寺址, 馬迹寺址)

자료마다 한문 표기를 달리하고 있어 혼용하였습니다.

 

마적도사 창건 설은 전하지만 폐사 시기는 전하지 않습니다.

다만, 마적사를 경유하여 지리산을 탐방한 선인들의 유산록에 단서가 보입니다.

 

1611년 .유몽인 유두류산록 

"드디어 언덕을 따라가다가 길을 잃어 숲 속으로 들어갔다. 젖은 풀숲이 옷을 적시고 등나무 가지가 얼굴을 질렀다. 밀고 당기며 가시덤불을 헤치고 산허리를 비스듬히 돌며 올라갔다. 허리를 구부리고 한 걸음씩 나아가는데, 죽순을 꺾고 고사리를 뜯느라 발걸음이 더뎠다.

동쪽으로 마적암(馬跡庵)을 지났다.

나뭇가지를 부여잡고 넝쿨을 잡아당기며 오르니 옛터가 아직 남아 있었다. 산비탈을 기어오르다 보니, 열 걸음에 아홉 번은 넘어졌다. 힘들게 오르내리다 보니 얼굴이 땀에 뒤범벅이 되었고 다리는 시큰거리고 발은 부르텄다. 가령 강제로 끌려가 고된 일을 한다고 가정할 때, 원망하고 성나는 마음은 아무리 꾸짖어 금하더라도 수그러들게 하기 어렵지만, 여럿이 길을 가거나 모여 앉아 쉴 때는 떠들고 웃는 소리가 길에 가득하니, 어찌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이 즐거워할 만한 일이 아니겠는가"(지리99 엉겅퀴 님)

 

즉, 1,611년 이전에 폐사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임진왜란의 전화가 폐사의 직접적인 원인이 아니었는지...

 

 

마적사지 우물 안내문

 

 

마적사지 우물지로 추정됩니다.

강지주 선생의 세진대기에 실린 우물터일까요?

 

 

장기 바위

 

 

장기 바위

 

 

 

석축

사지 뒤편

 

 

불적은 전하지 않으나

따뜻하고, 안온한 그런 느낌의 사지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다녀온 후 사진 정리 중에 세진대 안내문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세진대 소나무

 

안내문

"200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지리산 마적 천진전이 본래 사지로서.."

 

다녀온 후 꼭 한 달이 지난 12월 6일 

군자사지, 도마사지 답사길에 다시 들렸습니다.

 

 

천진전

현재는 운영되지 않고 폐사된 것 같았습니다.

전체적으로 큰 공사와 불사로 주변 정리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안온한 느낌이이 드는 절터 분위기는 아니었습니다.

물론, 폐사로 인한 선입견일 수도 있지만, 습한 기운, 마적도사와 아홉 용 설화가 서린 용유담 좌향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위에 올려 놓은 석불대좌를 바라본 순간 저의 판단은 일순간 무너지고 이곳을 마적사지로 확신했습니다

 

 

석불대좌

지대석과 하대석이 한 돌입니다

거의 대부분 석불대좌는 하대석과 지대석은 별석이며, 이런 형태는 희귀한 경우입니다.

 

아래로부터

팔각 지대석

 

팔각 하대석

낮은 저석, 중석의 안상, 갑석으로 치석 하였으며

상부에는 단판 팔엽 복련과 사이사이 간엽을 새겼습니다.

복련 위에는 팔각의 호각형 2단 중대석 굄을 조출하였습니다.

 

팔각 중대석

팔각 상대석은 망실된 상태입니다.

 

지대석과 일석으로 치석, 복련 표현 등으로 미루어 조성시기는 통일신라를 지난 고려 중기 이전 작품으로 보입니다.

팔각 원당형 부도(승탑) 부재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으나, 석불대좌로 추정합니다.

 

 

 

하대석

 

 

 

하대석

 

하대 저석

안상이 조식된 중석

하대 갑석

 

 

하대석

 

단판 팔엽 복련, 간엽

팔각 각호형 2단 괴임

 

 

이러한 석불대좌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이 남아있습니다

그러나, 지대석과 일석으로 조성된 하대석은 흔치 않으며, 나이 탓인지 선뜻 기억나지 않습니다.

 

 

산청. 내원사 석남암수 비로자나불 대좌

팔각 지대석이 별석입니다

 

 

진주박물관. 합천 죽죽리 사지 석불대좌

별석으로 조성된 지대석은 망실된 상태입니다

 

 

해남 미황사. 달마선원 석불대좌

별석으로 조성된 지대석이 망실된 대좌입니다.

 

 

석불대좌가 남아있는 천진전을 마적사지로 생각하며 내려오던 중 독가촌의 할아버지, 할머니를 만났습니다.

이런저런 절터 이야기 중에 석불대좌 사진을 보여드렸더니 쇼킹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할머니

-.본래 그 자리 아니다.

-.천진전 공사할 때 독가촌 뒤에서 포크레인으로 옮겼다.

 

독가촌 아래 임도에 떨어져 계시던 할아버지에게 다시 여쭈었더니

-.포크레인으로 옮겨가는 것을 직접 보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

그랬었구나!

 

 

독가촌

소나무 향우 측 참나무 근처에 있었다고 합니다.

 

즉, 마적사 석불이 봉안되었던 금당은 천진전 부근이 아니기 때문에,

용유담이 내려 보이는 독가촌 옆 우물터가 있는 경작지 부근이 마적사지로 추정됩니다.

 

 

 

폐사지

쓸쓸함이 아늑함을 덮을 수 없는 그런 터입니다.

적어도 나의 경우에는...

 

2020.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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