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평왕 태자 태실지
마천면 당흥 부락 뒤편 금대산 자락에 위치
대전에 거주하는 이영규 님으로부터 진평왕 태실 관련 암각문이 확인되었으니 당장 현장 답사를 가자는 쇼킹한 전화를 받았습니다. 이영규 님의 말씀에 의하면 1,994년 마천면 지를 주관하여 발간한 문호성 함양 서복회 회장님이 처음으로 조사하였으나 그간 대외적으로는 알려지지 않았으며, 이번에 문 회장님과 강재두 부회장님이 당흥 마을 김수태(1,929년 생) 어르신과 함께 현장 답사를 마쳤다고 합니다.
진평왕 태자 태실지로 규명되면, 이전의 충북 진천 김유신 태실을 제치고 현재까지 밝혀진 가장 오래된 태실지로 기록되며, 도선국사에 의해 중국에서 유입된 것으로 알려진 풍수지리에 앞서 우리 자생 풍수가 있었다는 설說에 무게가 실리는 일대 발견이 되는 것입니다.
당흥 마을
마을 뒤편 큰 소나무 아래에 제단이 남아 있어 직감적으로 마을 상당(上堂)이며, 마을 이름의 유래가 짐작되었습니다.
그래도 조심스러워 마천면 홈페이지 마을 유래를 확인하였더니 저의 추측이 맞았습니다.
"벌이라고 전해오던 마을 이름은 한자어로 당벌(堂伐)인데 당집이 있는 벌이라는 뜻이나 경상도 발음으로 땅뻘이라 불리고 있다. 지금도 당집이 주차장 뒤에 초라한 모습으로 위치하고 있으며, 금대암으로 가는 길을 당산 골목이라 한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시 당흥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으며 마천면의 소재지로써 큰 마을로 형성되어 있고 지금도 5일장이 열리고 있는 마천면의 중심지이다.
마을이 형성되기 전 아주 옛날 당 할머니를 섬기고 사는 몇 사람이 생활하던 것이 차차 인가가 불어나서 마을을 형성하게 되었다. 일설에는 뻘건 벌판이라는 뜻도 들어 있는데 인가가 없었던 옛날에는 전담도 없어서 황폐한 벌판이었다고 한다. 마을 앞 들을 당앞들이라고 부른다."
소나무
마을 뒤 당목(堂木)
우리 민속에서 당산은 마을 제의가 시작되는 신성 공간입니다.
진평왕릉 태실지로 추정되는 곳의 앞쪽에 당산이 자리 잡은 사실도 태실과 무관하지 않을 것으로 추정되며, 조선시대 태실과 가봉 태실의 하마비, 화소, 금표 기능을 겸했다고 말하면 억지 해석일까요?
법주사. 순조 태실 금표
법주사 순조 태실 화소
홍성. 순종 태실 화소
성주. 세종대왕 자 태실
암각
금대산에서 뻗어 내려온 맥(脈)이 끝나는 암반에 새겼습니다.
태실지는 뒤편 민묘자리로 추정합니다.
이런 자리를 혈처라고 하나요?
고언 전 진평왕 입차산시 청봉차점차이 기후 거인 계이금지운
古諺 傳 眞平王 入此山時 聽封次占此而 其后居人皆以噤地云
예로부터 민간에 전해 내려온 이야기에 전하기를 신라 진평왕이 이산에 들어왔을 때에 봉토를 허락하여 이곳을 차지하였다. 그 후 주민들이 모두 땅에 대하여 입을 다물었다고 한다.
진평왕 태실지를 조성하고 후대에 새긴 일종의 금표비로 추정됩니다.
하지만 가정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기본적인 근거가 있어야 합니다.
(아래 고문헌 기록은 동행한 이영규 님의 글에서 발췌하였으며, 원본은 글 말미에 첨부합니다)
첫째, 진평왕이 먼 경주를 벗어난 마천까지 온 근거는 있을까요?
-. 신동국여지승람(1,530년).경상도
군자사(君子寺)는 지리산에 있다. 신라 진평왕이 왕위를 피해 여기서 살다가, 태자를 낳아서 돌아가고, 집은 희사하여 절로 만들었다"
-. 천령지(정수만, 1,653년).1,888년 후손 정환주 간행
군자사는 지리산에 있다,. 이하 내용은 위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으나, '지금은 없다'라는 글로 미루어,1,888년 이전에 폐사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군자사지는 당흥 마을 지근에 위치합니다.
또한, 선인들의 지리산 유산기에도 군자사와 진평왕에 대한 기록이 보입니다.
-. 박여량. 두류산 일록(1,610년)
군자산은 옛 이름이 영정사다. 진평왕이 즉위하기 전에 어지러운 조정을 피해 이 곳에서 머물렀다.
그때 아들을 낳아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한다.
-. 유몽인. 유두류산록(1,611년)
군자사로 들어가 잤다. 절 앞에 영정(靈井)이 있어 영정사라 한다. 지금을 이름을 고쳐 군자사라하는데 유래를 모르겠다.
-. 이덕무. 군자사 사적(1,783년)
위 내용과 대동소이 하지만 마지막 문장이 흥미롭습니다.
"진평왕은 후사가 없는데, 이들을 낳아 군자사로 명명하였다고 하니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1,684년 승려 형곡 복환이 지은 사적기를 옮긴 내용)
즉, 당흥 마을의 구전되는 이야기와 선인들의 유산록을 살펴보면 진평왕 태자 태실과 금표(암각)가 터무니없는 내용만은 아닌 것이 분명합니다.
군자사지
군자사지 우물터와 미나리깡
1,600년대 초 함양군수 고상안의 태촌집에 미나리깡에 개구리가 없다고 기록한 곳
군자사지를 안내(2,020.12,06)한 이장님 말씀에 의하면 마을에 영정(靈井)으로 5곳으로 전하나 알고 있는 3곳을 알려주었습니다.
군자사지 대숲
외지로 반출된 부도의 지대석(1)
2020,12.06일 사지를 안내한 마을 주민이 부도 지대석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부도 지대석(2)
대숲에 있었다는 부도 2기는 찾지 못했습니다.
부도 옥개석
팔각 옥개석과 보주는 일석입니다.
낙수면 물매가 급하고 내림마루가 높으며, 연봉형 보주 아래는 굄을 두었습니다.
군자사지 부도
반출 2기(벽송사 옆 서암정사로 옮겼다는 증언이 있었으나, 서암정사에서 조선 후기 부도는 보지 못했음)
2~3년 전까지 2기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대숲의 부도 옥개석
총 5기 부도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조선 후기까지 사찰이 운영되었음을 전하는 유물입니다.
군자사지
태실 풍수
군자사와 진평왕 관련 고문헌은 확인되었지만 조선시대의 태실 조성 관련 자료를 검토해보면 풍수상으로 뛰어난 길지에 조성되며, 제가 답사한 태실지 역시 문외한의 눈에도 그런 자리에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조선 시대 태실 조성 과정은 저의 세종대왕 자태실 글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http://blog.daum.net/12977705/8723838?category=5272
우리나라의 태실.태비.태함
http://blog.daum.net/12977705/8726570
진평왕 태자 태실의 풍수형국은 어떨까요?
그 대답은 당흥마을에 거주하는 금년 92세 김수태 어르신에게 들을 수 있었습니다.
일자문성당(一字文星堂)
당흥 마을 김수태 어르신 댁
김수태 님(1,929년 출생. 92세)
와유강산(臥遊江山) 필사본
의중마을에 살았던 삼송 임응택(1,870~1,951) 선생이 젊은 시절 지리산 일대를 둘러보고 늙어서 읽어보기 위해 기록한 글,
지리산 10 승지(勝地), 9기(奇), 18경(景)이 소개되어 있다고 합니다.
원본은 망실되었으며, 김수태 옹이 17세에 필사한 필사본이 남아 있으며, 대전의 이영규 님이 완역하였습니다.
파본 된 글을 김수택 어른이 기억으로 재기록
교지
교지의 주인공은 김채규 어르신은 김수태 옹의 조부입니다.
사헌부 감찰, 광서 12년(1,886년)
김수태 어르신께서 암각문 관련 이야기를 끝낸 우리 일행을 마중하시며 당호를 설명해주셨습니다.
일자문성당(一字文星堂)
직접 들은 이야기와 이후 이영규 선생과 김옹이 나눈 대화를 종합하였습니다
김수태 어르신이 젊은 시절 집을 방문한 스님께서 절대로 집을 옮기거나 매매하지 말도록 당부하셨다고 합니다
그 까닭은 바라 보이는 지리산 능선이 일자문성(一字文星) 형국으로 양택 풍수의 길지여서 인물이 배출되는 터기 때문이라고 하셨답니다.
양택풍수 길지 여부인지는 모르지만, 김옹의 장자는 행정고시를 패스하여 건설교통부 고위직으로 퇴직하였으며, 손자도 육사를 졸업하여 현재 대령으로 복무 중이라고 합니다.
일자문성(一字文星)
진평왕 태자 태실지에서 바라본 지리산 능선
풍수에서 일자문성은 귀인이 나오는 형국이며, 나무꾼도 벼슬 자리에 오를 수 있으며, 심지어 군왕의 자리라는 풍수관련 자료가 검색됩니다.
일반적으로 풍수지리는 통일신라 후대 선종과 함께 도선국사가 중국에서 유입한 것이 정설이지만, 이 곳이 음택 풍수형국의 명당이라면 도선 유입설은 무너지게 됩니다. 제가 거의 20여 년 전 경주 감은사지 쌍탑 글을 올리면서 우리나라의 자생풍수에 관해 최창조 교수의 설을 인용한 기억이 새롭게 떠오릅니다.
"문무왕이 삼국을 통일한 국력을 가지고도 왜구를 걱정하고 사후에 용이 되어 그들을 막겠다고 이곳에 몸을 묻은 까닭도 왜구들의 침입 경로이기에 그래서 여기에 집중적으로 신라식 풍수 우리 민족 고유의 원형적 사고에 입각한 대비를 마련한 것이 바로 감은사 터로 보는 것이다.문무왕릉이 있는 대종천 하구에서 육지를 바라보면 마치 용이 바다를 향하여 입을 벌리고 있는 듯한 형상으로 보인다.
그 입을 통하여 왜구들이 들락거린다. 만약 그 용이 입을 다물어버린다면 왜구들을 씹어 버리는 결과가 된다.
이때 대종천 양안의 용당리 봉길리 일대 산들이 용의 이빨에 해당된다.
그렇다면 감은사 3층 석탑 2기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용의 이빨을 더욱 날카롭게 만들기 위한 어금니 또는 송곳니에 해당되지 않겠는가.
이것이 바로 우리식 풍수의 원형이랄 수 있는 신라인의 풍수 비보책인 것이다.
이렇게 풍수적 해석을 가해 놓고 보면 왜 문무왕이 죽어 용이 되겠다고 했는지, 왜 용자 돌림의 지명이 많은지, 감은사는 왜 바다와 통하는 특수구조를 했는지, 그리고 2기의 3층 탑은 왜 그 자리에 있어야 하는지가 확연하게 밝혀지는 것이다.
우리의 풍수란 바로 이런 것이다.“( 2003.10.18. 감은사지 답사기에서 발췌)
부연하면, 도선 이전에 자생풍수가 있었으며, 진평왕 태자 태실도 풍수지리를 고려한 길지에 조성된 태실지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생 풍수지리설이 아니더라도, 현재까지 알려진 가장 오래된 태실인 충북 진천 김유신 장군의 태실지를 답사해보면 길지라는 것을 단번에 느낄 수 있습니다.
진천.김유신 장군 태실
http://blog.daum.net/12977705/8726803
그런데, 무엇보다도 진평왕 태자 태실이라는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서는 진평왕의 태자가 있어야 하는데, 알려진 태자는 없습니다. 그러나, 현재 상황으로 판단하여 진평왕 태자 태실은 허구라고 단정하여서는 안됩니다.
신라시대 보다 의학이 더 발전된 조선시대에 들어서도 태실 조성은 되었지만 요절하여 가계도에 이름을 올리지 못한 왕자가 있기 때문입니다.
울진 삼달리(신래)태실
견석 왕자의 태실이지만, 성종의 왕자 중에 견석 왕자는 없습니다
http://blog.daum.net/12977705/8727008
태실지 금표(암각)
김수태 옹의 증언
이곳은 마을에서 태봉(胎峰)으로 구전되고 있으며, 동으로 금대암, 서쪽으로 안국사로 향하는 길목이었다고 합니다
고언 전 진평왕 입차산시 청봉차점차이 기후 거인 계이금지운
古諺 傳 眞平王 入此山時 聽封次占此而 其后居人皆以噤地云
예로부터 민간에 전해 내려온 이야기에 전하기를 신라 진평왕이 이산에 들어왔을 때에 봉토를 허락하여 이곳을 차지하였다. 그 후 주민들이 모두 땅에 대하여 입을 다물었다고 한다.
개인적으로는 진평왕 태자 태실로 구전되는 태실의 금표로 추정합니다.
김수태옹은
"풍수지리상 기가 너무 강하여 봄날 화전놀이 등의 마을 행사에 사람이 죽어나가는 일이 반복되어 마을 전체를 현재 위치로 이전하였다"는 이야기를 선대로부터 들었다고 합니다. 뿐만아니라, 암각 금표는 마을을 이전하며 동규(洞規)로 새겼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김옹이 1,929년 출생이므로 암각문 조성 시기는 그 이전이 됩니다.
또한, 김옹은 민묘자리에서 불상이 출토되었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는 조선 시대에 가봉 태실, 왕릉에 부속된 원찰(願刹)이 있었던 것처럼, 어느 시절에 진평왕 태자 태실을 수호하고 제향 하는 원찰의 단서가 될 수 있으므로, 태실지 가능성을 더 높여 줍니다.
결론적으로, 당흥 마을의 진평왕릉 태자 태실로 구전되는 태봉은 신동국여지승람 등의 고문헌, 선인들의 지리산 유산기에 등장하며, 마을에도 구전되고 있습니다. 구체적인 역사적 사료는 미비하지만 야사로 치부할 수만은 없을 것 같습니다.
또한, 암각문은 진평왕 태자 태실로 믿는 동민들이 마을에서 반복되는 동티를 방지하기 위해 동규에 의해 자발적으로 세운 태실 금표비가 확실해 보입니다.
태실 전공자도, 전문가도 아니며, 저의 일천한 안목으로 올린 글입니다.
부족하고 근거가 미약한 내용이라도 널리 이해바라며, 안목을 높여 준 이영규 님, 민병태 님, 함양 서복회 문호성 회장님, 강재두 부회장님, 조용섭 님. 정혜종 님께 감사드립니다.
마지막으로
이영규 선생의 글은 추후 링크하겠습니다.
2020.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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