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남도/함양군

함양...남계서원

임병기(선과) 2019. 10. 8. 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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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함양.거창 답사는 사진 한 장 없는 남계서원, 최근에 인지한 거창의 돌다리 답사가 주목적이었습니다.

유네스코 등재 후 많은 사람이 찾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 이전과 별차이가 없었으나 사당까지 개방되어 즐거움이 배가되었습니다.

9개서원 외에도 상시 개방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져 봅니다.


남계서원藍溪書院

"1552년(명종 7)에 창건되었으며, 정여창의 위패를 모셨다. 1566년(명종 21)에 사액을 받았으며,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으로 소실되었다. 1603년 나촌(羅村)으로 옮겨 복원했다가, 1612년 옛터인 현재의 자리에 복원했다. 숙종 때 강익(姜翼)·정온을 추가 배향했으며, 별사에는 유호인·정홍서(鄭弘緖)를 배향했다가 1868년(고종 5)에 별사를 없앴다. 소수서원에 이어 2번째로 창건된 서원으로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 때에도 남아 있었다.


 2019년 7월 6일, 제43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서 16~17세기에 건립된 다른 8개 서원과 함께 오늘날까지 한국에서 교육과 사회적 관습 형태로 지속되어온 성리학과 관련된 문화적 전통의 증거이며 성리학 개념이 여건에 맞게 바뀌는 역사적 과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인정받아 '한국의 서원(Seowon, Korean Neo-Confucian Academies)'이라는 이름으로 한국의 14번째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다음 백과 사전



배치

하마비.홍살문을 들어서면 외삼문인 풍영루 입니다.

전형적인 서원 배치인 전당후묘이나 명륜당 앞 동서재 측면을 2층 처럼 계자 난간을 걸고 돌출시켰습니다.

또한 좁은 명륜당 공간에 묘정비각이 있으며, 한 칸 높은 위치에 내삼문, 사당. 전사청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정여창鄭汝昌(1450~1504)

조선 전기 사림파의 대표적인 학자로서 훈구파가 일으킨 사화(士禍)로 죽었다. 본관은 하동(河東). 자는 백욱(伯勗), 호는 일두(一蠹). 아버지는 함길도병마우후 육을(六乙)이다. 김굉필(金宏弼)·김일손(金馹孫) 등과 함께 김종직(金宗直)에게서 배웠다.


일찍이 지리산에 들어가 5경(五經)과 성리학을 연구했다. 1490년(성종 21) 효행과 학식으로 천거되어 소격서참봉에 임명되었으나 거절하고 나가지 않았다. 같은 해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간 후 예문관검열·세자시강원설서·안음현감 등을 역임했다. 1498년(연산군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경성으로 유배되어 죽었다. 1504년 죽은 뒤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부관참시되었다.


그는 유학적인 이상사회, 즉 인정(仁政)이 보편화된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먼저 치자(治者)의 도덕적 의지가 확립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주자학적 세계관을 우주론적으로 해명하는 이기론과 함께 개인의 도덕성 확립을 위한 심성론(心性論)을 본격적으로 탐구했다. 이기론의 경우 이(理)와 기(氣)는 현상적으로 구별되지 않지만, 궁극적으로 이는 지선(至善)하며 영위(營爲)하는 바가 없는 반면에 기는 유위(有爲)하며 청탁(淸濁)이 있으므로 구별된다고 보았다.


이와 함께 학문의 목적은 성인이 되는 데 있으며, 이를 위해서는 물욕(物欲)과 공리를 배제할 수 있는 입지가 가장 중요하다고 인식했다. 이러한 그의 성리학은 정몽주(鄭夢周)·김숙자(金叔滋)·김종직으로 이어지는 조선 전기 사림파의 주자학적 학문을 계승한 것이었다. 사림파는 인(仁)을 보편적 가치의 정점으로 삼아 이를 구체적으로 실현할 것을 요구했고, 이를 바탕으로 당시의 집권세력이었던 훈구파를 공격했다. 정여창 역시 스스로 성인을 공언하여 이러한 사명의 담지자로 자처했고 결국은 사화에 연루되어 죽었다.


저서는 무오사화 때 소각되어 대부분이 없어지고 정구(鄭逑)가 엮은 〈문헌공실기 文獻公實記〉에 일부가 전하며, 1920년 후손이 유문을 엮어 만든 〈일두유집〉이 있다. 중종대에 우의정에 추증되었으며, 1610년(광해군 10) 조광조(趙光祖)·이언적(李彦迪)·이황(李滉) 등과 함께 5현(五賢)의 한 사람으로 문묘에 배향되었다. 나주 경현서원(景賢書院), 함양 남계서원(藍溪書院), 상주 도남서원, 합천 이연서원(伊淵書院), 거창 도산서원, 종성 종산서원(鍾山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헌이다.


정온鄭蘊(1569~1641)

본관은 초계(草溪). 자는 휘원(輝遠), 호는 동계(桐溪)·고고자(鼓鼓子). 별제 정옥견(鄭玉堅)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증좌승지 정숙(鄭淑)이고, 아버지는 진사 정유명(鄭惟明)이다. 어머니는 장사랑 강근우(姜謹友)의 딸이다


1601년(선조 39)에 진사가 되고, 1610년(광해군 2)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시강원겸설서·사간원정언을 역임하였다. 임해군옥사에 대해 전은설(全恩說)을 주장했고, 영창대군이 강화부사 정항(鄭沆)에 의해서 피살되자 격렬한 상소를 올려 정항의 처벌과 당시 일어나고 있던 폐모론의 부당함을 주장하였다.


이에 광해군은 격분하여 이원익(李元翼)과 심희수(沈喜壽) 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국문할 것을 명하고 이어서 제주도에 위리안치하도록 하였다. 그 뒤 인조반정 때까지 10년 동안 유배지에 있으면서 학문을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중국 옛 성현들의 명언을 모은 『덕변록(德辨錄)』을 지어 이것으로 자신을 반성하였다.


인조반정 후 광해군 때 절의를 지킨 인물로 지목되어 사간·이조참의·대사간·대제학·이조참판 등 청요직(淸要職)을 역임하였다. 특히, 언관에 있으면서 반정공신들의 비리와 병권장악을 공격하였다. 또 폐세자(廢世子: 광해군의 아들 祬)와 선조의 서자 인성군 공(仁城君珙)의 옥사에 대해 전은설을 주장, 공신들을 견제하였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행재소(行在所)로 왕을 호종하였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에는 이조참판으로서 명나라와 조선과의 의리를 내세워 최명길(崔鳴吉) 등의 화의주장을 적극 반대하였다. 강화도가 함락되고 항복이 결정되자 오랑캐에게 항복하는 수치를 참을 수 없다고 하며 칼로 자결했으나 목숨은 끊어지지 않았다.


그 뒤 관직을 단념하고 덕유산에 들어가 조[粟]를 심어 생계를 자급하다가 죽었다. 숙종 때 절의를 높이 평가하여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어려서부터 당시 경상우도에서 명성이 자자하던 정인홍(鄭仁弘)에게 사사하여 그의 강개한 기질과 학통을 전수받았다.


1607년(선조 40) 정인홍이 왕위계승을 둘러싸고 의혹을 일으키는 유영경(柳永慶) 등 소북파를 탄핵하다가 처벌을 받자 정인홍을 위해 변호 상소를 올렸다. 광해군 때는 임해군과 영창대군의 옥사를 두고 비록 의견이 달랐지만 정인홍에 대한 의리는 변하지 않아 인조반정 후 정인홍의 처벌을 반대하였다.


그러나 이후 격화된 당쟁 속에서 그와 그의 후손들은 남인으로 처신했고, 정인홍이 역적으로 심하게 몰리면서 정구(鄭逑)를 사사한 것으로 인식되었다. 그의 현실대응 자세는 조식(曺植)에서 정인홍으로 이어지는 강개한 기질을 이어받아 매사에 과격한 자세를 견지하였다. 그것은 영창대군 옥사 때의 상소나 대청관계에서의 척화론에서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조선 후기 숭명배청사상이 고조되는 분위기 속에서 김상헌(金尙憲)보다 크게 추앙받지 못한 것은 색목(色目)이 노론이 아니었는데 연유한다. 허목(許穆)·조경(趙絅) 등 기호남인(畿湖南人)과도 깊은 관계를 가져 이황(李滉)-정구-허목으로 이어지는 기호남인학통 수립에도 큰 구실을 하였다.


광주(廣州)의 현절사(顯節祠) 제주의 귤림서원(橘林書院), 함양의 남계서원(藍溪書院)에 제향되었다. 그의 생가는 중요민속자료 제205호로 지정, 보존되고 있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강익姜翼(1523~1567)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중보(仲輔), 호는 개암(介庵) 또는 송암(松庵). 함양효우촌(孝友村)에서 출생했다. 아버지는 승사랑(承仕郎) 강근우(姜謹友)이며, 어머니는 남원양씨(南原梁氏)로 승사랑 양응기(梁應麒)의 딸이다.


조식(曺植)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549년(명종 4) 진사가 된 뒤, 벼슬에 뜻을 두지 아니하고 오직 학문에만 열중하였다. 1566년 영남유생 33인의 소두(疏頭)가 되어 정여창(鄭汝昌)의 신원을 청하였다,


1552년에 남계서원(藍溪書院)을 건립하여 정여창을 제향하였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소수서원 다음으로 세워진 것이다. 학행으로 추천되어 소격서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부임하지 못하고 사망하였다.


후학을 지도함에 있어 극기와 신독(愼獨)을 권장하여 말보다는 실천 위주의 학문을 하도록 하였다. 뒤에 남계서원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개암집(介庵集)』 2권이 있다.


출저/다음 백과사전


 

풍영루風咏樓

누의 이름은 논어 내용 중 '기수에서 목욕하고 무우에서 바람風을 쐬고 노래咏하며 돌아오겠다' 증점曾點의 뜻을 느낄 수 있다하여 이름지었다고 합니다.


  

 

풍영루. 연지

서원 내부에 연지가 있는 사례는 처음 접합니다.


정환필의 풍영루기에 의하면 동서재 앞에 연못을 파고 연못가에 언덕을 쌓아 연꽃을 감상하고 매화를 감상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동서재의 별칭인 애련헌愛蓮軒과 영매헌咏梅軒 이름도 거기에서 유래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준도문遵道門

최초에 서원 외삼문의 이름으로 '도가 여기에 있다'라는 의미라고 합니다.


풍영루기에 의하면

창건시에는 사당에 배향되어있는 개암介庵  강익姜翼 이름짓고 매암梅菴 조식曺湜이 글을 썼다고 합니다


 

2층 화반


 

 

풍영루 2층 우물마루

 


묘정비각廟庭碑閣

 


묘정비

비갓의 채색이 이채롭습니다.



묘정비 상부

연등천장에는 용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비좌

 

 


숭정일백오십이년 崇禎一百五十二年

기해 십일월일 건 己亥 十一月 日 建

1779년


후학後學 청풍 김종후 찬 淸風 金鍾厚

행 홍릉 참봉行弘陵參奉 황운조黃運祚 서書

병조판서 겸 예문관제학 兵曹判書兼藝文館提學 홍낙명洪樂命 전액篆額

 

 

명성당明誠堂

중앙 2칸 마루, 양협실에는 쪽마루를 걸친 중당협실 구조 입니다.


정면에는 사액받은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현판을 남계.서원을 각각 새겼습니다.



남계藍溪

남계는 서원옆의 시내의 이름이었다고 합니다.

 



서원書院

가정사십오년 병인 칠월일 嘉靖四十五年 丙寅 七月 日.1566년

선사宣賜

 


명성당明誠堂

중용에서 유래하였으며 '참된 것을 밝히는 것을 가르침이라 하니,참되면 밝아지고 밝아지면 참된다는 의미라고 합니다.

 

 

거경재居敬齋

중당 협실의 우측방

경敬에 거居해서 이 理를 깊이 연구한다라는 의미 라고 합니다.



집의재集義齋

중당 협실의 좌측방

호연지기는 도道와 짝이 되는 의義를 축적集해야 생긴다라는 의미입니다.

 


명성당 후면

 


서재 西齋

방은 보인재輔仁齋. 누마루는 영매헌咏梅軒

평면 일자형의 다른 서원에서 볼 수 없는 동재 구조입니다.

 


누마루 


보인재

 

 

영매헌

 


동재 東齋

공사중이었습니다.

서재처럼 방에는 양정재 養正齋. 누마루에는 애련헌愛蓮軒 현판이 있다고 합니다.

 

 

희생단犧牲壇



경판고經板庫

 


내삼문

 


사당祠堂

일두 정여창. 동계 정온. 개암 강익 선생을 배향 합니다.

 


전사청典祀廳

 


관세위盥洗位?

노주석庭燎臺? 

 


망료위望燎位]

 


내삼문(안쪽)

 

 


관리사

 

 

풍영루 누마루에 앉아 풍경 조망도 좋겠지만 늘어지게 한숨 자고 왔어야했는데

늘 시간에 구속되어 주마간산식 답사가 되었습니다.

다시 다녀와야 겠습니다.


2019.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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