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광역시/강화군

강화...홍릉

임병기(선과) 2020. 10. 2. 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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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릉(洪陵)

무신 정권 집권기에 오른 고려 고종 高宗(1,192-1,259)의 능입니다.

 

고려사(高麗史)』에는 홍릉(洪陵),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여지도서(輿地圖書) 등에서는 홍릉(弘陵)으로 표기되어 있으며, 1259년(고종 46) 6월 임인일(壬寅日)에 재상 유경(柳璥)의 집에서 승하하자, 그 해 9월 기미일(己未日)에 홍릉에 장례 지냈다고 합니다. 이후  조선 현종 때 강화유수 조복양(趙復陽)이 찾아내어 다시 봉분(封墳)하였다고 전합니다.

 

고종(1,192-1,259)

재위 1213∼1259. 이름은 왕철(王㬚), 초명은 왕진(王瞋)·왕질(王晊), 자는 대명(大命)·천우(天祐). 강종의 맏아들이며, 어머니는 원덕태후 유씨(元德太后柳氏), 비는 희종의 딸 안혜태후 유씨(安惠太后柳氏)이다.


1212년(강종 1) 태자에 책봉되어 이듬해 강종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46년의 재위 기간 동안 최씨(崔氏)의 독재정치로 실권을 잡지 못하였으며, 잦은 민란과 거란·몽고의 침입에 대한 항쟁 등으로 국가적 위기를 겪었다. 1218년, 최충헌(崔忠獻)이 70세로 치사(致仕)하려고 하자 궤장(几杖)을 주어 계속 정사를 돌보게 하였고, 이듬해 왕씨(王氏)의 성까지 주었다.

같은 해 최충헌이 죽었으나, 아들 최우(崔瑀)가 정방(政房)을 통해 백관의 인사를 전단(專斷)하였으므로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하지 못하였다. 1258년 3월 대사성 유경(柳璥)과 별장 김인준(金仁俊)이 최의(崔竩)를 죽임으로써 최씨정권이 무너지고 표면상으로는 왕권이 복구되었다.

 

그러나 실권은 여전히 김준과 임연(林衍) 부자에게 있었다. 대외적으로도 1216년부터 3년간 계속된 거란의 침입과 뒤이은 몽고의 침입으로 재위기간은 최대의 국난을 겪은 시기였다. 특히, 1231년부터 몽고의 침입에 대항해 강도(江都: 지금의 인천광역시 강화군)로 천도하며 28년간 항쟁하였으나 막대한 인명손실과 국토의 황폐, 문화재의 손실을 가져왔다.

1232년 대구 부인사(符仁寺)에 보관된 현종 때의 대장경판(大藏經板)과 1235년 경주의 황룡사 구층탑이 소실되었다.

 

그리하여 1259년 몽고와 강화를 청하기 위해 태자 왕전(王倎: 뒤의 원종)을 몽고에 보냈다. 그리고 무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몽고병으로 하여금 강화의 내성과 외성을 헐게 하였다. 이와 같은 태자의 친조(親朝)와 성곽의 철거는 몽고에 대한 굴복을 뜻하는 것으로, 그 뒤 고려는 몽고의 정치적 간섭을 받게 되었다.


한편, 1236년 불력(佛力)에 의해 몽고군을 격퇴하고자 대장도감(大藏都監)을 설치, 소실된 대장경판의 재각(再刻)에 착수하였다. 이에 앞서 1227년 감수국사 평장사(監修國史平章事) 최보순(崔甫淳), 수찬관 김양경(金良鏡)·임경숙(任景肅)·유승단(兪升旦) 등에게 『명종실록』을 편찬하게 해 사관(史館)과 해인사에 각각 보관하게 하였다. 능은 홍릉(洪陵: 인천광역시 강화군 부내면 국화리)이며, 시호는 안효(安孝)이고, 1310년(충선왕 2) 충헌(忠憲)이 증시되었다.(출처.다음)

 

 

재실

능으로 향하는 입구.

왕릉의 제향 공간으로 추정됩니다.

 

 

왕릉은 크게 3단으로 구성

축대를 쌓고 봉분 아래에 혼유석과 문석인을 배치하였습니다.

 

 

봉분

자료에는 네 모퉁이에 석수가 배치되어 있다고 했으나 현재는 없습니다.

 

 

문인석(향좌 측)

오늘 고려 왕릉을 찾은 까닭은 문인석과 혼유석 향우측의 석조 구조물이 궁금하였기 때문입니다.

 

문인석은 신라, 조선 왕릉에 비해 크기가 작았지만 무엇보다도 벅수의 전형처럼 보여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홍릉의 향좌 측 문인석에서는 느낌이 다가오지 않았지만 향우 측 문인석은 벅수 분위기 었습니다.

 

 

향좌 측(1)

크기는 개경이 아닌 강화도, 무신정권, 몽고 침입 등의 역사적 배경을 감안하면 이해가 됩니다.

왜 홀은  비스듬히 들었을까요?

 

 

향좌측(2)

홀도 분명하지 않고, 얼굴이 신체와 균형이 맞지 않습니다.

 

 

문석인(향우측)

 

 

향우 측(1)

뭉뚱한 코, 왕방울 눈

 

 

향우측(2)

벅수처럼 보이지 않나요?

 

실제

제가 벅수로 추정하는 청수암 미륵전의 미륵불과 닮은 모습입니다.

 

 

석 구조물

홍릉을 찾은 또 하나의 이유

 

홍릉에는 정자각이 있다는 자료가 있지만 제수 진설과 배례 공간이 들어서기에는 협소합니다.

왕릉 주변을 둘렀던 둘레석의 동자주?

아니면 위패를 옮겨 온 연(輦)을 올려놓았던 받침돌일까요?

 

 

 

고려왕릉

공양과 삼척에 있는 고려 마지막 왕인 공양왕릉 외에는 처음 찾았습니다.

규모는 역사적 배경에서 규명 가능하지만, 벅수와 왕릉 문석인의 친연 관계는 혼자만의 착각이며 요원하겠지요?

 

 

2020.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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