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칠곡군

칠곡...팔공산 송림사

임병기(선과) 2020. 8. 21. 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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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림사

첫 인연이 1,977년 5월 대학교 동아리 첫 야외법회로 기억됩니다.

이후 수없이 다녔지만 답사기 한 편 없는 까닭은...

 

그렇게 흘러  2,011년 당간지주 답사가 마지막이었습니다.

 

송림사

"대한불교조계종 제9교구 본사인 동화사의 말사이다. 신라 진흥왕 때 진나라 사신이 명관대사와 함께 불서 2,700권과 불사리를 가지고 왔는데, 이것을 봉안하기 위해 세운 절이다. 이때 호국안민을 위한 기원보탑을 세웠다고 한다. 1092년(선종 9) 대각국사 의천이 중수하고, 1235년 몽골의 3차 침입 때 전탑만 남고 폐허화되었다. 그뒤 중창했으나 1597년(선조 30)에 왜병들의 방화로 다시 소실된 것을 1858년(철종 9) 영추가 다시 중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 당우로는 대웅전·명부전·요사채 등이 있다. 대웅전 앞의 칠곡 송림사 5층전탑은 보물 제189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1959년 탑을 해체·수리할 때 많은 유물이 발견되었다."(다음백과사전)

 

당간지주

http://cafe.daum.net/moonhawje/DjZP/1679?q=%EC%86%A1%EB%A6%BC%EC%82%AC%20%EB%8B%B9%EA%B0%84%EC%A7%80%EC%A3%BC

 

극락전 뒤편 돌담장 너머 경외에 위치합니다.

 

일주문

 

무설전

 

 

오층 전탑

화강암과 토축으로 이루어진 단층기단 위에 탑신을 세웠다. 한 변이 27㎝, 높이 6.2㎝ 되는 방형의 벽돌과 이것을 반으로 나눈 크기의 장방형 벽돌을 사용하여 쌓아올린 탑신은, 두드러지게 육중하고 높은 1층 탑신에서 갑자기 낮고 작아진 2층 탑신으로 올라가면서 급격한 체감을 보인 뒤 그 이상은 체감률이 비슷하다. 1959년 탑을 해체·수리할 때 밝혀진 바에 따르면 1층 탑신에는 원래 감실이 있었다고 하나 과거 어느 땐가 막아버려 지금과 같은 모습이 되었다고 한다. 벽돌을 한 장씩 나란히 놓아 처마를 삼은 옥개는 1층부터 차례로 처마 아래의 받침은 9·7·7·6·4단으로, 낙수면의 층단은 11·9·8·7·5단으로 줄어들고 있다.

 

탑신 위에는 상륜부가 거의 온전한 모습으로 솟아 있다. 그 구성을 보면 벽돌로 네모지게 쌓아올라가다가 네 귀에 풍령(풍경)이 달린 동판을 얹어 노반으로 삼은 위에, 금동으로 만든 복발, 앙화, 세 개의 보륜, 용차, 보주가 찰주에 차례로 꽂혀 있다. 찰주는 특이하게 나무를 다듬어서 겉에 동판을 씌웠다. 높이가 4.5m에 이르는 상륜부는 전탑에 남아 있는 유일한 신라시대 작품이었는데, 지금 것은 1959년 보수하면서 원형대로 모조한 것이다.

송림사 오층전탑은 몇 번인가의 보수가 있었지만 통일신라시대의 형태를 간직한 탑으로 추정된다. 전체 높이가 16.13m이고, 보물 제189호이다. 1959년 탑을 해체·수리할 때 세 군데서 많은 유물이 발견되었다. 상륜부의 복발에서는 12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되는 청자상감원형합(, 높이 7.8㎝, 입지름 18㎝)이, 2층 탑신에서는 사리장치와 그밖의 유물들이, 그리고 1층 탑신에서는 목불상 2구가 수습되었다. 청자상감원형합은 분묘가 아닌 곳에서 출토된 청자의 예로서도 의미 있고, 또 탑이 고려시대에 보수된 적이 있음을 알려주는 유물이다.(네이버)

 

송림사 오층전탑 사리갖춤(하늘사랑님 글)

http://cafe.daum.net/moonhawje/DjXU/10227?q=%EC%86%A1%EB%A6%BC%EC%82%AC%20%EC%98%A4%EC%B8%B5%EC%A0%84%ED%83%91%EC%9D%98%20%EC%82%AC%EB%A6%AC%EA%B0%96%EC%B6%A4

 

석함

사리장치가 들어있었던 석함

뚜껑은 후보물입니다.

 

 

송림사의 옛 향기를 품은 석조물

 

배례석

 

팔각 원당형 석등, 석등 하대석

 

대웅전

초창 시기는 정확히 전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1657년(효종 8)에 대웅전에 목조삼존불좌상을 봉안하면서 기록한 「팔공산 송림사 대웅전 불상조성 이필봉안기(殿)」가 있어 1657년(효종 8)에 중창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 1775년(영조 51)에 작성된 「대웅전 중수기(殿)」와 1850년(철종 1)에 작성된「칠곡송림사 대웅전 중수상량문(殿)」이 있어 해당 시기에 중수되었음이 확인되었다.(네이버)

 

정면 5칸 측면 3칸, 다포계, 겹처마 맞배지붕 전각입니다.

어칸은 넓고 좌우 협간은 어칸보다 좁고, 양쪽 툇칸은 아주 좁으며, 문도 어칸에 넷, 협칸에 셋,  툇칸에 하나입니다. 어칸 문도 중앙 두 작만 출입가능하며, 두 짝은 채광 용도의 붙박이입니다. 협간과 퇴칸도 채광용도이며 고정문입니다.

 

현판

조선 숙종의 글씨로 전합니다.

 

어칸

중앙은 빗살문, 양 옆은 솟을꽃살문

 

협칸

중앙 솟을빗살문, 좌우 빗살문

 

퇴칸

정자살 창호

 

불단 후벽

뒷공간이 넓은 것은 고주가 중앙으로 나왔기 때문이며 그래서 정면의 참배 공간이 좁습니다.

 

공포

 

측면

맞배지붕이어서 공포가 생략되었습니다.

 

후면

 

신방목

 

신방목

 

송림사 목조여래삼존불

보물 제1605호.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석가불을 협시하고 있는 석가삼존불

불상조성기에 의하면 “ 殿(순치십사년세재정유계추팔월일 경상도칠곡부남령팔공산송림사대웅전불상조성기필봉안기)”라 하여, 1657년(효종 8) 8월에 경상도 칠곡부 남령 팔공산 송림사 대웅전에 불상을 조성하고 봉안했으며 도우(), 쌍조(), 학매(), 경신() 등 불상을 조성한 화원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석가불의 오른손은 항마촉지인을, 왼손은 엄지와 중지를 맞댄 선정인을 취하였다. 머리에는 나발이 뚜렷하고, 중앙계주와 정상계주가 있다. 얼굴을 보면, 살이 오른 턱은 사각형의 얼굴 윤곽선을 만들고 상호가 큼직하고 뚜렷하다. 착의법은 오른쪽 어깨의 대의자락이 오른쪽 팔꿈치를 감고 돌아 왼쪽 어깨로 이어지고 있다. 양어깨를 덮은 통견 형식이지만 오른팔이 드러나 있어서 법주사 대웅보전 삼불좌상(1626년) 등과 함께 17세기 불상의 한 형식으로 볼 수 있다.

 

양 협시보살상들은 좌우 손의 위치만 다를 뿐 상의 크기, 얼굴, 착의법, 의습선 등 모든 표현에서 동일하다. 보관과 지물은 근래에 조성된 것으로 원래의 것은 알 수 없다.(네이버)

 

석가여래

 

보현보살

향나무로 제작한 불상은 드물다고 합니다.

 

 

문수보살

 

 

 

응진전

 

제화갈라보살. 석가여래.미륵보살. 16나한 봉안

 

 

명부전

 

목조 지장보살.천장보살.지지보살

 

"지장보살의 좌협시상인 도명존자상과 지지보살의 협시상에서 나온 복장유물에서 시왕상들과 여러 존상에 대한 조성기가 발견되었다. 이 「시왕상조성시목록기(十王像造成時目錄記)」를 통해 1665년(현종 6)에 명부전 내 22구의 제상(삼장보살상, 천장보살 협시보살상 제외)을 조성했다는 사실과 조성화원까지 알 수 있게 되었다. 이 불상들을 만든 화원인 승일(勝一)은 영광 불갑사 대웅전 삼세불의 조성화원 중 한 명이다."(네이버)

 

지지보살과 시왕

 

지장보살과 시왕

 

극락전 석조아미타 삼존

"보물 제1606호. 석조아미타불좌상 및 양 협시인 관세음보살상과 지장보살상 등 3구의 불상으로, 아미타불좌상에서 불상조성기가 발견되어 조성연대와 시주자, 화원 등을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이에 의하면, “順治十二年乙未八月日 八公山松林寺佛像造成于…佛像供養布施兼大施主 金應瑞 兩主 明玉…化主 信文比丘…畵員 道祐比丘 勝浩比丘(순치십이년을미팔월일 팔공산송림사불상조성우…불상공양포시겸대시주 김응서 양주 명옥…화주 신문비구…화원 도우비구 승호비구)”라 하여, 1655년(효종 6) 8월에 화원 도우비구 등 7명의 화승들에 의하여 조성되었으며 불상의 공양 겸 대시주는 김응서와 명옥을 중심으로 한 11명의 신도들이고 화주는 신문비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본존불의 좌대 상부에서 대좌 조성기(造成記) 묵서가 발견되었는데, 이 좌대가 불상이 조성된 때로부터 37년 이후인 1692년(숙종 18)에 조성되었으며 극락전 불상의 좌대라고 밝히고 있다. 불상과 좌대의 조성 시기가 차이는 나지만 좌대의 주인공이 현재의 불상으로 보인다.

 

경주 불석제로 만들어졌으며, 표면에 도금이 되어 있다. 아미타불좌상은 구부정한 자세로 양 손을 바로 펴서 무릎 위에 내려 놓았다. 나발 표현이 뚜렷하며 정상계주와 중앙계주로 육계를 표현하였다. 방형의 얼굴은 살이 통통하게 올랐으며, 뚜렷하고 단정한 이목구비를 볼 수 있다. 착의법은 대의가 양 어깨를 덮은 통견이며, 오른쪽 어깨에 보이는 또 하나의 대의자락으로 보아 이중착의법으로 추정된다. 양 협시인 관음보살과 지장보살은 불상과 얼굴표현, 착의법, 의습선 등에서 흡사하다. 관음보살의 보관은 근래에 조성된 것이다."(다음)

 

삼천불전아니었던가요?

 

범종루

 

산신각

 

산신도

 

삼성각

산신도.칠성도.독성도

 

경내 부도전

 

 

기성대사부도(?)

계미(癸未)년 겨울 검마(劒磨)에서 돌아와 팔공산에 머문 지 겨우 1년 만에 선본사(禪本寺) 위에서 목암(牧菴) 장로의 병문안을 하였다. 이곳은 이전에 기거하였던 곳으로 대중들도 모두 문하(門下)에서 배출된 곳이다. 열반경(涅槃經) 강의을 태연히 하고는 다음날 옆에 지켜보는 무리들 없이 조용히 입적(入寂)하였다. 세수(世壽) 72요 승랍(僧臘) 59였으며 대중에게 유명(遺命)을 남겼다. 동쪽 봉우리 아래에서 화장을 거행하니 정수리 뼈가 수백 개였는데, 마치 암석 위에 층층이 쌓은 백옥(白玉)같아서 바람이 조용히 잠자는 들판에서 환하게 빛났다. 드디어 동화사의 상봉(霜峰)에 탑을 세우고 대사의 부도(浮屠)는 뚜껑을 씌우지 않았다(.(桐華寺之霜峯 大師浮屠不盖).기성대사비문에서 발췌)

 

기성대사 비.경외 부도전

조선후기의 종형 부도로 당호를 확인할 수 없습니다

 

 

 

 

 

 

기성대사비(箕城大師碑).

찬.이미(李瀰), 서 윤동섬(尹東暹)

1,772년

유명(有明) 조선국(朝鮮國) 부종수돈(扶宗樹敦) 임제하삼십일세(臨濟下三十一世) 세기대사(世箕大師)행적비명(行蹟碑銘) 서문을 아울러 쓰다. 통정대부(通政大夫) 홍문관 부제학 지제교(弘文館 副提學 知製敎) 겸(兼) 경연 참찬관(經筵 參贊官) 춘추관 수찬관(春秋館 修撰官) 이미(李瀰)가 찬술하였고, 가의대부(嘉靖大夫) 이조참판(吏曹參判) 겸(兼) 동지 경연 (同知 經筵) 의금부(義禁府) 춘추관사(春秋館事)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윤동섬(尹東暹)이 글씨를 썼으며, 통훈대부(通訓大夫) 행 홍문관 응교(行 弘文館 應敎) 겸(兼) 경연 시강관(經筵 侍講官) 춘추관 편수관(春秋館 編修官) 시강원 보덕 중학교수 한학교수(侍講院 輔德 中學敎授 漢學敎授) 조종현(趙宗鉉)이 전액을 쓰다.

부처님은 공적(空寂)과 무위(無爲)로써 종(宗)을 삼고 자비(慈悲)와 보시(普施)로써 교(敎)를 삼는다. 공적(空寂)의 입장에서 보면 온갖 것은 모두 근진(根塵)에 속하지만, 자비(慈悲)를 기본으로 하여 중생을 제도하는 까닭에 세상을 구제하는 도(道)에는 원래 유위(有爲)와 무위(無爲)가 있을 수 있다. 경전(經典)은 문자(文字)를 세워 중생을 건네주는 나루터와 뗏목과 같다. 따라서 그것을 문서나 서적으로 구별하여 강론하여 팔만대장(八萬大藏)이라 칭하며, 또 그것이 번거롭고 많지만 싫증내지 않는다. 결국 글을 통해 중생을 제도하는 것은 그것이 공적(空寂)의 종(宗) 보다는 오래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해동(海東)의 산찰(山刹)에서 소장하고 있는 것은 거의 서역(西域)에서 전해져온 옛날 경전이다. 비록 고승(高僧)과 이름난 승려의 책이라 할 지라도 잘못된 것이 있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부처님을 수호하고 중생을 제도하는 책이 많지 않은 것이 내가 괴이하게 생각하는 점이다.


기성대사비(箕城大師)는 내가 그 분을 직접 접하지는 못했지만, 그 문제(門弟)인 혜징(慧澄)이 대사의 염불환향서(念佛還鄕西)와 제불보은문(諸佛報恩文) 2편을 가지고 나에게 보여주면서 공적비(功績碑)의 명문(銘文)을 써주기를 요청해왔다. 나는 사양치 아니하고 그것을 적어주었는데, 대개 그의 자비를 바탕으로 한 학문에 대하여 중점을 두었다.

 

대사의 법호(法號)는 쾌선(快善)이고 속성(俗姓) 류(柳)씨요 아버지는 이름은 시흥(時興)이다. 어머니 황(黃)씨가 칠곡부(漆谷府) 내에서 대사를 낳았는데, 때는 숙종(肅宗) 계유(癸酉)년이었다. 정수리가 넓었으며 성격은 곧았고 얼굴은 검고 몸은 빛났다.


13살에 팔공산(八空山) 송림(松林)으로 들어가 14세에 민식(敏湜)대사의 문하에 머리를 깍았으며 16살에 서귀(西歸)대사에게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덕도산(德道山) 태조(太照)대사에게서 수련했으며 낙빈당(落賓堂) 홍제(弘濟)대사가 강원(講院)을 마련하자 치문(緇門)을 비롯한 여러 경전을 공부하였는데 이 두 가지의 뜻이 모두 사무치게 들어온 이후에야 그만두었다. 또 귀기울이거나 눈을 크게 떠 경계하여 탐욕을 만나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게 힘썼기 때문에, 여러 절에서 대사의 심화(心畵)를 표식으로 많이 내 걸 정도였다.


25세에 고율엄(高律嚴) 낙빈(落賓)대사에게서 수학하여 드디어 인가(印可)를 받고 주변에 이름이 알려져 배움을 청하는 자들이 날로 늘어났다. 언변이 좋아 구애됨이 없고 음성도 크고 밝았으며, 입을 귀에다 가져다 알려줄 정도로 친절히 깨우쳐주었으며, 방만함을 갈무리하여 마음을 바로잡아 주었으니 믿음을 가지고 달려오려는 자는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었다. 그때 혹 부처님의 유적에 관계되지 않더라도 두루 사방의 명산대찰(名山大刹)을 두루 유람하면서 물장군과 발우[缾鉢]를 몇 개씩이나 갈아치울 정도였다. 어느날 동화사(桐華寺)에 머물면서 대중에게 고하기를 “모든 갖가지 인연(因緣)은 공적(空寂)으로 돌아가 도다. 이것이 바로 상승(上乘)의 근기(根機)에 해당되는 것이니 어찌 최후에 두 가지로 변별하고 구분하여 말할 수 있겠는가. 그대 무리를 위해 설하는 것은 모두 희론(戱論)이니 나는 다시는 강론하지 않겠노라”라고 하였다.


이윽고 초막(草幕)을 얽어 80권 화엄경(華嚴經) 전체를 지니고 끝내면 다시 시작하기를 반복하였으며, 밤에는 홀로 가부좌하고 앉아 좌선하며 묵묵히 선종(禪宗)과 만나 앉아서 밤을 지세다 유시(酉時)가 되어서야 겨우 팔을 고이고 선잠에 들었다. 입은 납의(衲衣)가 비록 치마와 버선이지만 모두 검은 색이어서, ▨돼지가 세상이야기를 하는 격이 되기 때문에, 비와 바람 수해와 가뭄 등의 세속 일에는 또한 관여치 아니하였다. 성격이 담백하고 간소하며 정직하였고 대사의 법성(法性)이 걸림 없이 원만하여 사람들이 팔공산(八空山) 정기를 밝게 한다고 하였다.
경신(庚申)년에 뜻을 같이하는 주(州)의 사람들이 각자 돈과 곡식을 가져와 은해사(銀海寺)의 위쪽 계곡에 절을 짓고자하였다. 이에 대사가 말하기를 “사람의 심성은 서로 다르지 않다. 만약 각자 자기의 마음처럼 다른 이의 마음을 생각하고 또 각자 자기의 재물을 다른 사람의 재물로 생각한다면 재물과 노동력과 흙과 나무 따위가 무슨 이로움이겠는가. 또 영원히 우리는 빈손이고 계곡 또한 빈손일 터이니 재물이 반드시 많아야 하겠는가”라 하였다. 이에 모두 말하기를 ‘아! 드디어 방장(方丈)의 관용과 어울어져 그와 함께 기거하면서 마음과 재물이 하나가 되니, 이 모두는 바로 대사의 융화(融化)에 대한 가르침에서 비롯한 것이다’라 하였다.


계미(癸未)년 겨울 검마(劒磨)에서 돌아와 팔공산에 머문 지 겨우 1년 만에 선본사(禪本寺) 위에서 목암(牧菴) 장로의 병문안을 하였다. 이곳은 이전에 기거하였던 곳으로 대중들도 모두 문하(門下)에서 배출된 곳이다. 열반경(涅槃經) 강의을 태연히 하고는 다음날 옆에 지켜보는 무리들 없이 조용히 입적(入寂)하였다. 세수(世壽) 72요 승랍(僧臘) 59였으며 대중에게 유명(遺命)을 남겼다. 동쪽 봉우리 아래에서 화장을 거행하니 정수리 뼈가 수백 개였는데, 마치 암석 위에 층층이 쌓은 백옥(白玉)같아서 바람이 조용히 잠자는 들판에서 환하게 빛났다. 드디어 동화사의 상봉(霜峰)에 탑을 세우고 대사의 부도(浮屠)는 뚜껑을 씌우지 않았다.


대사는 낙빈(落賓)대사에게서 수학하였으며 낙빈은 상봉(霜峰)대사에게서 배워 법통(法統)을 이었다. 옛날 갑자(甲子)년 봄에 혜징(慧澄)이 나를 도봉산(道峰山) 산장으로 찾아와 능엄경(楞嚴經) 여러 장을 강의하였는데, 그 도(道)가 무르익어 있었고, 그것은 바로 스승인 기성대사에게서 율(律)을 배워 기량이 높고 뛰어났다. 나는 항상 그를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 후 26년만에 나는 다시 본래 나의 울타리로 돌아왔다. 혜징은 항상 거짓이 없고 그 용모는 맑고도 맑았으며 그 마음은 원만하고 고요했으며 그가 스승의 제자였다는 것을 물어 알 수 있었다. 내가 오니 치가(緇家)의 문자에 대하여 전에 서로 교감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기뻐하였으며 또한 가혜(嘉慧)와 징능(澄能)이 그 스승의 가르침을 여기서 펼치고 있었다. 후에 대사의 법력을 알고자하는 사람은 환향(還鄕)과 보은(報恩)의 두편을 보아야한다.

명문(銘文)은 다음과 같다.

부처님이 기성대사(箕城大師)를 품에 안아 서쪽에서 전해져온 발우(鉢盂)를 대사에게 전해 주었도다.
경(經)을 꿰뚫어 보고 율(律)에 서성거리니 그 품은 뜻이 눈에 사무치도다.
산봉우리 구름 위 기상이 납의(衲衣)에 가득하니 성품은 오직 하나이니 공적(空寂) 뿐이로다.
응하는 속에 어떠한 사물(事物)도 없으니 오직 아미타불(阿彌陀佛) 뿐이로다.
향(還鄕)과 보은(報恩)의 두 편을 모아 하나의 유(酉)로 하도다.
팔만의 부처님 뜻이 함께 갈무리되어있으니 자비로 시골마을이 이롭게 되었도다.
좌해(左海)의 대중들이여 모두 한 곳으로 돌아오도다.
진리를 보호하고 번뇌를 건져주기를 59년간 하시도다.
뛰어난 파도가 팔공산에 휘도니 길이 부처님이 진호(鎭護)하는 곳이로다.

신령스런 유골을 세상에 뿌리니 한스러움의 회(悔)라는 글자가 선명한 빛깔의 실처럼 빛나도다.
서술을 맡아보는 것은 비록 공(空)한 일이지만 공경(恭敬)을 바쳐 말을 늘어 놓도다.
욕심이 있는 자, 이 한 조각 돌을 방편 삼아 보기를 바라노라.

기원후(紀元後) 3번째 임진(壬辰)년 3월 일에 세움.
대시주(大施主
정헌대부(正憲大夫) 행동 지중추부사(行同 知中樞府事) 김상구(金尙九)
증 가의대부(贈 嘉義大夫) 한성부 좌윤(漢城府 左尹) 겸(兼) 오위도총부 부총관(五衛都摠府 副摠管)
증 통정대부(贈 通政大夫) 장예원 판결사(掌隸院 判決事) 김언석(金彦碩)

 

기성대사비명(箕城大師碑銘)

 

비좌

 

 

 

오랫동안 밀린 숙제를 마친 기분입니다.

아직 밀린 숙제도 여럿 남아 있지만...

 

2020.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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