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칠곡군

칠곡...가산산성 비석군

임병기(선과) 2020. 1. 30. 14:56
728x90
728x90

 

 

 

해원정사 석탑을 둘러본 후

경내 뒤편에 위치한 비석군에 들렸습니다.


가산산성 안에는 13기 비석이 남아 있으며, 이곳에는 6기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장명등

묘소 앞에 있어야 할 석등이 비석군 앞에 위치.

허투루게 세운 석등이 아나라 공력이 깃든 작품 입니다.


 

지대석위에 상,중하대석과 화사석은 일석이며, 옥개석 위에 별석의 보주를 올렸습니다.


 

상.중.하대석


 

옥개석과 보주


 

화사석과 화창


 

 

관찰사 이상국세재풍공지엄영세불망비(觀察使李相國世載豊功至儼永世不忘碑)

유일하게 비각 속에 있습니다.


1708년(숙종 34)년 가산산성 외성을 축조한 관찰사 이세재의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세웠습니다.

재미 있는 것은

주민들이 정월 보름 새벽 비각 앞에서 제를 올린다고 합니다.

비석이 민간신앙의 대상이 되는 사례는 흔치 않은 일입니다.


이세재李世載(1648~1706)

"본관은 용인(龍仁). 자는 지숙(持叔). 이사경(李士慶)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후지(李後地)이다. 아버지는 나주목사 이하악(李河岳)이며, 어머니는 이중로(李重老)의 딸이다.


1669년(현종 10) 사마시에 합격하고, 1694년(숙종 20) 알성문과(謁聖文科)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전설사별검(典設司別檢)으로 등용되고, 의금부도사·장원서별제(掌苑署別提)·장흥고주부(長興庫主簿)·감찰·공조좌랑·황주판관·남원현감·성균관직강·병조좌랑·병조정랑·시강원사서·문학·지평·정언·경기도도사·동래부사, 병조·예조·호조·형조의 참의, 경상도관찰사·평안도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1703년에 한성우윤이 되고, 이어 대사간·도승지·경기도관찰사 등을 역임하였고 형조참판으로 재직 중 죽었다. 특히 동래부사로 있을 때에는 간사한 왜인들의 버릇을 고쳐, 왜인들이 100년 이래의 두려운 부사라고 찬탄을 하였다. 지방관으로 나갔을 적에 많은 치적을 올려 임금이 중용하려 하였는데 갑자기 죽어 모두 애석해하였다 한다."(다음백과)


  


관찰사이상국세재풍공지엄영세불망비(觀察使李相國世載豊功至儼永世不忘碑)


"觀察使李相國世載豊功至嚴永世不忘碑
國家柱□ 功高保障 □外干城 澤冾殘氓 卒伍隊整 於□不忘 軍需庫盈 勒石留名

甲戌五月 日 南北倉 天住寺 立”


디지털 칠곡문화대전에 실린 비문 입니다.

하지만, 세운 시기는 오기 입니다.

 

 

무자십월 일립 戊子十月 日立

1708년

비석 측면에 뚜렷하게 새겨져 있습니다.

 

 

비각 옆에 5기 비석이 위치

 


관찰사김상국노응영세불망대(觀察使金相國魯應永世不忘臺)

1814년


觀察使金相國魯應永世不忘碑
□波棠蔭 益受字恤 一路之石 井隊關□ 民阮飽惠 石而臺焉 緇□涵德 永世無泐

甲戌五月 日 南北倉 天柱寺 立


칠곡 디지털 문화대전에는 불망비(不忘碑)로 등재되어 있습니다.

역시 오기 입니다.


김노응金魯應(1757~1824)

"1786년(정조 10) 진사시에 합격하여 1796년 별시 문과에 응시하였으나 글자 한 자가 빠졌다고 하여 낙방되고 말았다. 그 뒤 헌릉참봉을 제수받았다가, 곧 전생서직장·활인서별제·사헌부감찰 등을 역임하였다.


장악원주부로 있으면서 1805년 정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 병조좌랑·정언·지평 등을 거쳐 1807년 사복시정·응교를 지내고, 동지사서장관(冬至使書狀官)으로 연경에 다녀왔다. 1808년 황해도암행어사로 지방관의 탐학을 제거하고자 노력하였고, 1811년 대사성이 되었다가 곧 경주부윤이 되었다.


그해 평안도에서 홍경래(洪景來)의 난이 일어나자 병사를 징발하여 대비시켰다. 동래부사·경상도관찰사·지중추부사·형조판서 등을 거쳐서, 1812년 한성부판윤에 이어 병조판서 겸 동지성균관사에 이르러 병으로 은퇴하였다.

평소 효행과 우애가 돈독하고 검소하였으며, 경사(經史)를 널리 섭렵하였다. 『중용(中庸)』을 좋아하였고, 역대의 사실이나 조선의 전고(典故)에도 밝았다. 시호는 정헌(正獻)이다."(다음 백과)

 


甲戌五月 日 南北倉 天住寺 立

남북 창에 있었던 천주사에 세웠던 비석.

칠곡디지털문화대전에 실린 이세재 비문 조성시기는 김노응 불망대의 조성년대임을 보여 줍니다.

 


관찰사남상국유혜비(觀察使南相國遺惠碑)

비석 주인공의 이름을 새기지 않아, 조선 후기 경상도 관찰사를 검색하여 2명을 찾았습니다.

남공철(1760~1840.백수百壽?)

남태량(1695~1752)


디지털칠곡문화대전에는  같은 페이지 아래 위에 서로 다르게 조성년대를 표기하여 주인공 추적이 불가했습니다.


-6.관찰사남상국유혜비(觀察使南相國遺惠碑): 무술년 5월

-6.관찰사남상국유혜비(觀察使南相國遺惠碑): 비좌와 비신을 갖추고 있다. 비신은 높이 140㎝, 너비 47㎝, 두께 17㎝이며, 비좌는 높이 11㎝, 너비 85㎝, 두께 50㎝이다. 비신의 앞면 가운데에 세로로 ‘관찰사남상국유혜비(觀察使南相國遺惠碑)’를 새기고 ‘병술육월 일(丙戌六月 日)’의 건립 연대가 있다.


수없이 언급했지만

디지털문화대전의 자료 오류는 심각한 상황 입니다.



겸순찰사김상공연후세난망비(兼巡察使金相公演後世難忘碑)

천주사 승려들이 세웠습니다.

1706년


그런데 디지털칠곡문화대전에는 김상공명후세난망비兼巡察使金相公溟後世難忘碑)로 등재되어 있습니다.


"兼巡察使金相公溟後世難忘碑
廣德施惠 千秋永傳

丙戌五月 日 南北倉民 天柱寺僧等立"


조선 후기 경상도 순찰사 명부에 김명(金溟)은 없으며, 숙종조에 김연(金演)이 재직하였습니다.

검색하면 김연의 단서(출처...다음 카페 / 상산김씨낙성군파 종중회)를 찾을 수 있습니다.

참고로, 김연의 비석은 문경 새재, 경기도 양평에도 남아 있습니다.



성옹선생유고발(醒翁先生遺稿跋) 

김연(金演)

 

아, 우리 증조부이신 충정공(忠貞公)이시어, 인륜을 지키는 큰 절개와 세상에 모범이 되는 청렴한 지조는 진실로 이미 문헌 가운데 분명히 들어나 있고, 사람들의 눈과 귀에 남아 있으니, 불초한 내가 1)감히 군더더기 말로 덧붙일 바가 아니다. 공께서 남기신 저술과 같은 경우는 또한 수십 권 이상이었지만, 불행하게도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유실되었다. 남아있는 이것은 곤산(崑山)의 한조각 옥돌2)에 불과하고, 단혈(丹穴)3)의 한 터럭정도일 뿐이니, 이와 같이 조금밖에 남아 있지 않은 것이 후세에 전해지지 않을까 항상 염려하였다.

於戱。惟我曾王考忠貞公。扶倫之大節。範世之淸操。固已輝映簡冊。照人耳目。非不肖所敢贅論者。若其所嘗著述。亦不下累十編。而不幸見失於丙子兵燹。邇崑山之片玉。丹穴之一毛耳。恒恐竝與是而無傳

 

근년에 불초한 내가 안릉(安陵)4)에 수령으로 가게 되었는데, 이곳은 바로 선조께서 다스리시던 동향(桐鄕)5)이니, 매번 보이는 듯한6) 그리움을 어찌 잊을 수 있었겠는가. 마침내 녹봉을 떼어 장인을 청하여 문집을 간행하기에 이르렀다. 이후에 계속해서 전석(前席)7)에서 임금께 아뢰던 말과 장차(章箚)8)에서 유실되었던 글을 얻게 되었고, 또한 연보(年譜)를 차례로 편찬하고서, 행장과 부록을 첨가하였고, 이를 나누어 네 편으로 만들었다. 영남을 맡게 되었을 적에 다시 이를 판각하여서 오래도록 후세에 전하게 하였다.

頃年不肖出守安陵。此乃先祖所莅之桐鄕。羹墻之慕。爲如何哉。遂捐俸倩工。得以刊印。伊後續得前席奏對之語。章箚遺逸之文。且撰次年譜。添入狀錄。分爲四編。及按嶺藩。更爲鋟梓。以壽其傳。

 

아, 선조(先祖)께서 평생 지키신 충절과 조정에서의 언행은, 후생 말학(末學)들이 그 또한 이 문집에서 징험할 수 있을 것이며, 더구나 여러 대 동안 미쳐 겨를이 없어 이루지 못한 소원을 이제야 이루게 되었으니, 이 어찌 성은(聖恩)에 힘입은 것이 아니며, 후손의 지극한 다행이 아니겠는가. 이에 감응하여 기록으로 남기니, 때는 병술(丙戌, 1706)년 늦봄 하순[下澣]에 증손 가선대부(嘉善大夫) 경상도관찰사 겸 병마수군절도사 순찰사 대구도호부사(慶尙道觀察使兼兵馬水軍節度使巡察使大丘都護府使) 연(演)이 삼가 발문을 쓰다.

噫。先祖平生忠節。立朝言行。後生末學。其亦有徵於斯集。況累世未遑之願。始乃得償。斯豈非聖恩之攸及而後孫之至幸也耶。玆用感而識之。歲在丙戌暮春下澣。曾孫嘉善大夫慶尙道觀察使。兼兵馬水軍節度使,巡察使。大丘都護府使演。謹跋。

 


영기관김공성림영세불망비(營紀官金公聖林永世不忘碑)

건립년대 명문 없음

 


별장 서공휘O도유혜불망비

기묘년.

別將徐公諱□道遺惠不忘碑
蒞玆一□ 捐金誌□ □□逢□ □□□仁 賑施荒□ 如山其德 安隼流□ 鐫彼貞玟
城內居民 己卯四月 日立"

 


별장서신갑진심국사비(別將徐信甲盡心國事碑)

무자년십월 일(戊子年十月 日).1708년


비각속에 있는

관찰사이상국세재풍공지엄영세불망비(觀察使李相國世載豊功至儼永世不忘碑)와 동일년월에 세운 것으로 추정 됩니다.

 


임경업.단종.최영 장군등이 성황당에 모셔진 경우는 여러 사례가 있으나.비석을 민간신앙의 대상으로 모셔진 사례는 처음 접한 듯 합니다.

그 유래를 알 수 있으면 좋겠는데.

 

2020.01.29

 

728x90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