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수원시

수원...지지대 비

임병기(선과) 2020. 7. 23. 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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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지대 고개(遲遲臺)

수원시에서 서울 방향으로 의왕시와 경계 지점에 위치한 고개이다. 예전에 사근현(沙近峴)이라고 불렀다. 『여지대전도』, 『해동지도』에서 확인할 수 있다. 『팔도군현지도』에서는 그 자리에 '사근현' 대신에 '미륵당(彌勒堂)'으로 표시되어 있다. 미륵당은 지지대 고개 정상 부근에 있었다고 한다. 『화성지』에 지지대 고개 이름의 유래가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원래는 사근현이었는데 정조가 '미륵현' 그 후에 다시 '지지현(遲遲峴)'으로 고쳤다고 기록하고 있다. '지지'라고 한 것은 사도세자 능을 참배하고 돌아갈 때 사모하는 마음이 간절하여 이곳에서 한참 지체하였던 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정조는 이곳에 장승과 표석을 세웠고, 1807년(순조 7)에 지지대 서쪽에 지지대비와 비각을 건립하였다

 

지지대(遲遲臺)

 

하마비

 

지지대(遲遲臺) 비

 

 

지지대비遲遲臺碑

홍문관제학(弘文館提學) 서영보(徐榮輔) 찬(撰)

전판돈녕부사겸판의금부사(前判敦寧府使兼判義禁府使) 윤사국(尹師國) 글씨

수원부유수겸총리사(水原府留守兼總理使) 홍명호(洪明浩) 전자(篆字)

숭정기원후일백팔십년정묘십이월일입(崇禎紀元後一百八十年丁卯十二月日立)

1807년(순조 7) 12월

 

遲遲臺碑銘
遲遲臺碑銘幷序
崇政大夫行戶曹判書兼知 經筵事弘文館提學奎章閣檢校直提學▨▨榮輔奉 敎謹▨」
崇祿大夫前判敦寧府事兼判義禁府事知春秋館事臣尹師國奉 敎謹書」
正憲大夫行水原府留守兼摠理使臣洪明浩奉 敎謹篆」
居華城廣州之界斗然而爲峴者曰遲遲峴峴之上有臺曰遲遲臺望見西南峰巒」
若隱若顯其上常有佳氣欝欝䓗蔥然者花山之諸麓也昔惟我 正廟十有三秊」
移奉 顯隆園于花山每歲孟春拜 園▨▨駕還廻瞻不忍去至于是峴輒駐蹕」
旋望延佇良久盖輦路漸遠花山漸隱至峴而華之地界亦窮矣乃因其地疊石爲」
小臺臺與峴皆遲遲名今 上踐阼華城御史申絢請立碑于此以記其實 上」
可之其文以命臣榮輔臣承命悸恐以對曰嗚呼夫不知然而然者至誠之發也臣」
獲事 先朝伏覩我 先王旣奠 園兆地協于吉禮致于隆作于新邑爲行宮曰」

是予湯沐邑也奉 御眞于齋殿曰庸替予定省之禮也猗歟聖慕盖未嘗須臾而」
離于華也故將幸之日吉朝旣差夙齋以竢皇皇焉如不及龍旂載啓行邁斯亟瞿」
瞿焉如有求籩豆旣陳衆設旣瞻愴愴於薦祼之時掩抑於周旋之際旋蹕而北愾」
然僾然依依如也戀戀如也由 園至峴數十里其行盖遲而又遲也昔夫子去魯」
曰遲遲吾行也夫子非有意於遲遲也遲遲而不自覺也我 先王所以於斯乎遲」
遲者亦慤愛之存于中而自不得不遲遲也禮稱孝子之志如將復入然其惟至誠」
可以與於斯矣今夫循華之塗亭堠郵畷陂堤之多草木植物之微孰非我 先王」
聖慮之所運乎昔之所遲徊屢顧者而遲遲之思到此而尤切至于今南北者齎咨」
彷徨不能便過者亦於此而尤深惟我 殿下祗謁 陵園歲過是臺怵惕興感如」
見羹墻庸昭睿孝丕載顯刻我 先王報本垂裕之盛我 殿下繼志述事之美於」
斯乎可考其萬一也夫臣謹拜手稽首獻銘曰」

皇矣 寧考于華爲臺於乎不忘孝思烝哉 王昔拜 園露未旣濡夙駕瞿瞿僕」
臣載驅旣禋言旋王心遂遂巍峩者山載見載秘彼羽旄斯胡不遲遲道之迤矣」
顧瞻曷其 王至于臺羽林如復雲之郁郁自我花峀誠至愛著放海而準凡厥遺」
黎疇不涕隕我 后曰咨臺惟睿孝顧名思義來許以詔有屹龜趺我 后維則詞」
臣稽首銘示無極」


崇禎紀元後一百八十年丁卯十二月 日立(출처.한국금석문종합영상정보시스템)

 

지지대비

화성과 광주의 경계에 우뚝이 솟아 산마루를 이룬 것이 지지현이다. 이 산마루 위에 누대가 있는데 그것이 지지루이다. 서남쪽을 바라보면 봉우리가 보이듯 숨듯하며 그 위에 항상 아름다운 기상이 아물거리는 것이 화산의 여러 산자락이다.


옛날 정조 13년(1789년) 현륭원을 화산에 옮기시고 해마다 정월에는 원을 배알하여 제사하고 환가하실 때에 바라보시고 차마 가시지 못하고, 이 지지현에 이르러 수레를 멈춰 바라보고 오랫동안 머뭇거리신다. 대저 연의 행차가 점점 멀어지면 화산이 점점 숨겨지면서 화산의 경계가 역시 끝난다. 이에 그 곳에 돌을 쌓아 조그만 대를 삼았으며 대와 현을 모두 지지라 명명하였다. 임금께서 즉위하시니 화성어사 신순이 여기에 비석을 세워 사실을 기록하자고 청하니 임금께서 허가하시고 신 영보에게 문을 짓도록 하셨다. 신은 명을 받잡고 두려운 마음으로 대답하다.

 

오! 되어진 줄도 모르게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것은 지성에서 돋아나는 것이다. 신이 선조에서 일을 받아 엎드려 선왕께서 이미 능원을 모시는 것을 살펴보았다. 땅은 길지로 합당하고 예를 융숭히 새로운 읍을 이루시어 행궁을 삼으시고 말씀하시기를 여기는 내가 은혜를 한껏 입은 읍이라 하시고, 재전에 임금님의 영정을 모시고는 내가 조석으로 문안드릴 수 있는 예를 할 수 있겠노라고 하셨으니, 아름답도다! 임금님의 사모하심이 잠시도 이 화성에서 떠나지 않도다.


그러므로 장차 행차하시는 날 초하루의 조회를 마치시고 일찍 재계하시고 대기하시되, 황급히 미치지 못할까 하며 행차가 출발하자 급히 가시려 하여 조심조심 무엇인가 찾는 것이 있는 듯하며, 제기가 다 갖추어졌고 모든 진설이 풍부하며 제사하는 동안에도 슬퍼하시어 진행하시는 동안 목이 메이는듯 하셨다. 마치시고 돌아가심에 있어서 슬퍼하심이 지극하여 아른아른 연연해하셨다. 그래서 능원에서 이 산마루까지 수십 리의 길이 더디고 또 더디셨다.


옛날 공자께서 노나라를 떠나시면서 말씀하시기를, “더디고 더디구나, 나의 발길이여!”라고 하셨으니, 공자가 의식적으로 더디 걸으려한 것이 아니라, 더딘 걸음을 스스로 깨닫지 못한 것이다. 우리 선왕께서 여기에서 더딘 걸음도 역시 중심에 얽힌 애정 때문에 스스로 더디고 더디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예에 말하기를, “효자의 뜻은 다시 되드는 것 같다.”고 하였으나 지성이라야 이런 경지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

 

이제 화성에 이르는 길에 정자, 역사, 매방이 많은 것이나 초목, 식물의 사소한 것 까지도 어느 것이 우리 선왕의 성려에서 운행되지 않은 것이 있겠는가? 옛날 더디 걸으시며 자주 뒤돌아 보시던 것이니 더디더디 걷는 생각이 여기에 더욱 간절히 나타나 있는 것이다. 이제 와서 남북으로 왕래하는 이들이 짐을 지고 편히 지날 수 없는 것도 여기에 더 심하다.


우리 전하께서 능원을 살피시고 해마다 이 대를 지나며 슬퍼하시고 느낌이 있어 마치 선왕을 뵙는 듯 하시어 효심을 나타내시어 여기에 새기게 하시니, 선왕께서 조상의 근본에 보답하고 너그러운 교훈을 내리시는 정성과 우리 전하께서 선대의 뜻과 일을 이어 받으시는 아름다움을 여기에 그만의 하나로 상고하겠노라.


신이 머리를 조아리어 명을 바치되,

임금이시어! 아버님을 위하여 화성에 대를 세우는도다.
오! 잊지 못하심이여, 효성의 생각 높으시도다.
왕께서 옛날 원을 참배하시매 이슬이 미쳐 마르지 않았도다.

이른 새벽 행차 조심조심 모시는 신하 말을 몰도다.
제사를 마치고 돌아가시매 왕의 마음이 허전하시다.
높은 저 산이 뵈는 듯 숨는 듯 하니 저 행차 어찌 더디지 않겠는가?
길이 멀어지니 돌아본들 어찌하나,
왕께서 이 대에 이르면 시위관이 나열하고 구름은 아득히 이 화성의 산에서 일다.
지성으로 드러난 애정, 바다인 듯 넓도다.
저 뒷날 백성들 누가 눈물 흘리지 않겠는가?
우리 임금님의 말씀, 이 대에 새겨진 효성
돌아보사 생각하시는 의리 조서로써 허락되셨다.
높이 솟은 비석 우리 임금님 뜻이니 사신은 머리 조아려 끝없는 뜻을 새기다.

숭정기원후 180년 정묘년(순조 7, 1807년) 12월 일 세우다.

 

 

 

2020.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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