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수원시

수원...광교산 창성사지. 진각국사 대각원조탑비

임병기(선과) 2020. 4. 12. 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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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성사지.

창성사 앞 버스 종점에서 광교산 등산로를 따라가지 말고 폭포식당(산장) 옆 개울을 건너 희미하게 보이는 길로 들어서야 합니다. 천천히 걸어도 30분이면 충분합니다.

 

개울 건너 올라서면 보이는 경작지

(하산하면서 촬영)

저는 한 참 아래 백운산장에서 진입하여 길 없는 길을 따라 고생 좀 하였습니다.

 

금방 돌 무더미 나타나고, 조금 더 올라가면 돌 무더미가 또 있습니다.

 

창성사지

창성사의 정확한 창건 연대는 전하지 않지만 진각국사탑비(보물 제14호)에 고려 말 고승 진각국사 천희千熙(1307~1385)가 1382년 이곳에서 입적하였고, 1386년 승탑과 탑비를 조성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어, 창성사는 그 이전에 창건된 사찰입니다.

 

또 다른 기록

 

조선왕조실록

태종실록 14권, 태종 7년 12월 2일 신사 2번째 기사 1407년 명 영락(永樂) 5년 

여러 고을의 복을 빌던 절을 명찰을 대신 지정하다

 

"여러 고을의 복을 빌던 절을 명찰을 대신 지정하다

의정부(議政府)에서 명찰(名刹)로써 여러 고을의 자복사(資福寺)에 대신하기를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계문(啓聞)은 이러하였다. 지난해에 사사(寺社)를 혁파하여 없앨 때에 삼한(三韓) 이래의 대가람(大伽藍)이 도리어 태거(汰去)하는 예에 들고, 망하여 폐지된 사사(寺社)에 주지(住持)를 차하(差下)하는 일이 간혹 있었으니, 승도(僧徒)가 어찌 원망하는 마음이 없겠습니까? 만일 산수(山水) 좋은 곳의 대가람(大伽藍)을 택하여 망하여 폐지된 사원(寺院)에 대신한다면, 거의 승도들로 하여금 거주할 곳을 얻게 할 것입니다.

(상략)

자은종(慈恩宗)에 승령(僧嶺)관음사(觀音寺)·양주(楊州)신혈사(神穴寺)·개령(開寧)사자사(獅子寺)·양근(楊根)백암사(白巖寺)·남포(藍浦)성주사(聖住寺)·임주(林州)보광사(普光寺)·의령(宜寧)웅인사(熊仁寺)·하동(河東)양경사(陽景寺)·능성(綾城)공림사(公林寺)·봉주(鳳州)성불사(成佛寺)·여흥(驪興)신이사(神異寺)·김해(金海)감로사(甘露寺)·선주(善州)원흥사(原興寺)·함양(咸陽)엄천사(嚴川寺)·수원(水原)창성사(彰聖寺)·진주(晉州)법륜사(法輪寺)·광주(光州)진국사(鎭國寺)이고,(하략)

 

신증동국여지승람(1530)

"창성사가 광교산에 있으며, 이색이 지은 고려 승려 천희의 비명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를 통해 16세기 중엽까지는 창성사의 법등이 유지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여지도서(1765)와 범우고(1799)

창성사가 광교산에 있고 옛날에 폐사되어 중수하였다는 기록이 실려 있다고 합니다.

한남대학교에서 창성사지 발굴조사에서 ‘건륭乾隆(1735~1796)’명 기와가 출토되어 18세기 후반에 중수했다는 기록을 뒷받침합니다.

 

1900년대에 편찬된 사탑고적고(寺塔古蹟攷)

"수원군 일왕면 이광교리에 있는데 화전으로 되었다. 돌담과 석비 1기가 남아 있다."

 

여지도서와 사탑고적고 기록으로 미루어 18세기 후반 중수하여 오랫동안 운영되지 못하고 19세기 후반에 폐사된 것 같습니다.

 

진감국사비문에 의하면 국사는 화엄종 승려인데, 태종실록에는 창성사가 자은종 사찰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자은종(慈恩宗)

"인동 선봉사(僊鳳寺)의 「대각국사비(大覺國師碑)」에는 대각국사 의천(義天)이 중국에 가서 당시 송나라에서 행해지던 여러 종의 교학을 전해왔다고 하는데, 그 가운데 자은(慈恩)이 들어 있다. 즉, “중국에 있던 천태·현수·남산·자은·조계 및 서천(印度)의 범학을 한꺼번에 모두 전해 받았다(上國所有天台·賢首·南山·慈恩·曹溪·西天梵學, 一時傳了).”고 하였다. 여기에 들어 있는 자은이 자은법상교학(慈恩法相敎學)의 자은종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이 현존 문헌에서 볼 수 있는 최초의 자은종 명칭이다. 그러나 실은 당시 고려 국내의 일이 아니고 송나라에서의 일이므로 고려의 종파 이름이라고는 하기 어렵다. 단지 고려의 비문에 기록되어 있으므로 당시 고려적인 종명[慈恩宗名]으로 생각해 볼 수도 있다.

분명한 고려의 종파 이름으로 자은종이 보이는 것은 자정국존(慈淨國尊) 미수(彌授)의 법주사자정국존비(法住寺慈淨國尊碑)에서라고 할 수 있다. 이 비문에는 ‘자은국일대사(慈恩國一大師)’, ‘대자은종사(大慈恩宗師)’, ‘자은교관(慈恩敎觀)’ 등이 보인다. 이를 보면 종파 이름이 틀림없는 자은종임을 알 수 있다.

 

고려 초의 유가유식 대가인 해린(海麟)과 그 제자 소현(韶顯)이 중국 자은종(慈恩宗: 法相宗)의 개창조(開創祖)인 현장(玄奘)과 규기(窺基: 慈恩大師)를 조사로 받들고 그 교학을 따르면서도 자은종이라고 하지 않고 유가업(瑜伽業)이라고 불렀다.

 

그 뒤에도 줄곧 유가(瑜伽)의 이름만 보이며, 1294년(충렬왕 20)에 죽은 혜영(惠永)의 비문인 동화사홍진국존비(桐華寺弘眞國尊碑)에도 ‘대유가 동화사주지 오교도승통(大瑜伽 桐華寺住持 五敎都僧統)’이라 하여 자은종이 아닌 유가의 명칭 그대로를 쓰고 있다. 그런데 혜영보다 20년쯤 뒤의 인물인 미수 때 이르러 비로소 자은종이라는 종파 이름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와 같은 자은종의 이름은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보인다. 1406년(태종 6) 3월의 의정부 계청(啓請)에는 11종 중에 자은종이 들어 있고, 그 이듬해 7종으로 축소된 종파 이름 속에도 역시 자은종이 보인다. 그러나 1424년(세종 6) 모든 종파가 폐합되어 선종과 교종으로 축소되었을 때, 자은종은 교종 속에 들어가 그 이름을 잃고 말았다."(다음백과사전)

 

사역

하단 석축, 하단 평탄지, 중단 석축, 중단 평탄지, 상단 토축, 상단 평탄지

 

사역

 

창성사지 배치

진감국사 부도비터는 사지 진입 전 향우측에 위치합니다.

 

위키 백과

"수원시는 한신대박물관과 함께 2014년부터 2016년까지 창성사지 발굴조사를 했고, 2016년 12월 수원화성박물관에서 '고고학과 문헌을 통해 본 수원 창성사지의 역사적 가치'를 주제로 학술대회를 개최했다. 연구원들은 고려말 진각국사 천희의 탑비가 있었던 터를 확인했고, 중심 건물과 부속 건물터, 고급 청자와 백자 등 많은 유물을 발굴했다. 창성사지가 있는 광교산 일대에 대한 광역 지표 조사를 진행해 미학사지, 상광교동 사지 등 건물터와 유물 산포지 등 19곳의 불교 유적을 새롭게 확인하는 성과를 거뒀다."

 

하단 석축

교란이 진행되고 잇습니다.

 

하단 평탄지. 중단 석축

우물지 유존

 

중단 석축

 

중단 석축

 

중단석축

 

상단

금당지와 석탑지로 추정되며, 낮은 2단 토축 같습니다.

 

발굴 조사로 드러난 금당지

 

이대로 방치하면 오히려 발굴하지 않은 것보다 못할 텐데

 

 

 

석불 대좌 하대석?

 

탑신보다는 방형 불상 대좌 느낌입니다.

 

소맷돌?

기단?

 

주초

 

금당지 뒤편에도 석축을 쌓았습니다.

 

발굴된 치석재

 

 

우물

사역을 관통한 등산로 상단 사역 우측에 위치

 

하층기단 갑석

우물 덮개로 사용 중인 갑석 상부에는 각호각 3단 굄이 조출, 하부에 부연이 없어 하층기단 갑석으로 추정

창성사 석탑은 크지 않은 석탑으로 생각됩니다.

 

 

 

석조 부재

발굴조사에서 수습된 부재로 추정되며 우물지 뒤편에 위치

 

치석재

안상 3개가 눈에 들어옵니다.

 

석탑 중대석, 불상 대좌 지대석, 진감국사 부도 지대석

무슨 용도이었을지???

 

이 부재를 살펴본 후 오후 내내 몇 편 소설을 탈고했습니다.

 

안상

 

 

평동 부도 기단석과 석탑재

 

소설 몇 편?

오전에 답사한 수원 평동 소재 부도 기단석과 석탑 탑신석이 혼재된 석조 부재가 오버랩되었기 때문입니다.

(다음 편에 글 올릴 예정)

 

 

창성사 진각국사 대각원조탑비(彰聖寺眞覺國師大覺圓照塔碑)

창성사에 있었던 진감국사 부도비. 현재는 수원화성으로 이건 되어 있습니다.

[ 熙, 1307( 33)~1382( 8)] .() () 1386( 12) 웠습니다.

 

진감국사 부도는 어디로 사라졌을까요?

 

증시(贈諡) 진각국사(眞覺國師) 비명(碑銘) (전액(篆額))
고려국(高麗國) 국사(國師) 대화엄종사(大華嚴宗師) 선교도총섭(禪敎都摠攝) 전불심인대(傳佛心印大) (이하 결락)

추충보절(推忠保節) 동덕(同德) 화공신(化功臣) 벽상삼한삼중대(壁上三韓三重大) (이하 결락)
홍무(洪武) 15년 여름 6월 16일 화엄종(華嚴宗) 부석국사(浮石國師)께서 창성사(彰聖社)에서 입적하였다. (결락) 스님의 위업(偉業)을 영원히 썩지 않게 하기 위하여 판종(判宗) (결락) 에게 주달(奏達)하였다. 부고를 받은 우왕(禑王)께서 시호를 진각국사(眞覺國師)라 하고 탑호(塔號)를 대각원조탑(大覺圓照塔)이라 내리고는, 신(臣) 이색(李穡)에게 명(命)하여 비문을 짓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문인(門人)들이 스님의 행장(行狀)을 적어 보내 왔으나, 매우 불충분하여 감히 하필(下筆)하지 못하고 미루어 온 지가 상당히 오래되었다. 경남(敬南)이라는 스님이 있어 (결락) 산(山). 이제 와서 비로소 비문을 독촉하면서 자세히 그 행적을 말하기를 다음과 같이 하였다.


갑진년(甲辰年) 가을 우리 스님께서 배를 타고 중국 항주(杭州)에 이르렀다. 내가 스님을 모시고 다니면서 규보(跬步)도 곁을 떠나지 아니하였다.그리하여 스님께서 휴휴암(休休菴)에 이르렀다. 그 날 밤 몽산(蒙山)의 영정을 모신 진당(眞堂) 곧 영각(影閣)에 방광(放光)함이 있었다. (결락) 인(人). 의발심이지(衣鉢心異之). 스님을 모시고 방장실(方丈室) 앞에 다다르니, 문에 자물쇠가 매우 견고(堅固)하게 잠겨져 있었다. 삼전어(三轉語)가 벽에 걸려 있었는데 스님께서 그 글을 읽고 설명하니 자물쇠에서 소리가 나더니 갑자기 문이 열렸다. 이를 본 대중(大衆)은 모두 숙연(肅然)하였다. 실중(室中)에 궤(樻)가 있는데, 사(師) (결락) 그 속에 주봉(柱棒)과 불자(拂子)가 있었다. 그것을 들어 나에게 주려고 하니 이를 본 대중들은 더욱 탄복하였다. 또 칠(漆)을 한 자그마한 궤가 있었는데, 이는 잠겨져 있지 않고 다만 상면(上面)에 때가 이르지 않았는데 여는 자는 하늘이 반드시 벌을 줄 것이라고 적혀 있었다. 절성(浙省)승상(丞相) 장대위(張大尉)의 제(弟) (결락) “그 속에 무엇이 보관되어 있습니까” 하였으므로 스님이 이르기를 “문서(文書)입니다”라 하였다.

 

또 묻기를 “지금 그것을 열어 볼 수 있겠습니까” 하므로 스님이 이르기를 “열어 볼 수 있습니다” 하고, 곧 열어보니 과연 2질(秩)의 문서가 있었다. 그 중 (결락) 하나에는 군도(群盜)가 삼보(三寶)를 파괴하여 마침내 절이 멸망(滅亡)할 것이라는 사실이 적혀 있었다. 이를 본 승상(丞相)이 노(怒) (결락) “해외에서 온 사람을 죽인들 무슨 이익이 있으랴 나는 우리 불법(佛法)을 부지런히 배울 뿐이라” 하고, 받았던 몽산(蒙山)의 의물(衣物)을 그냥 두고 떠나갔다.
병오년(丙午年)만봉(萬峯)성안사(聖安寺)로 찾아 갔으나, 만봉은 3일 동안 방에서 나오지 아니하였다. 만봉(萬峯)이 이르기를 “고려노화상(高麗老和尙)이 (결락) 입시(入時)가 없거늘 어찌 출시(出時)가 있겠습니까” 하니, 만봉(萬峯)이 말하기를 “내가 병이 있으나, 누가 친절한 마음으로 나의 병을 간호(看護)해 주겠는가” 하였다. 스님께서 주먹으로 그의 등을 안마해 주었다. 그 날 밤 삼경(三更)에 만봉이 가사(袈裟)와 선봉(禪棒)을 전해주면서 이르기를 불문(不聞) (결락) 성안사(聖安寺)를 떠나 오강(吳江)에 이르니, 어떤 스님이 그곳에 머물기를 청(請)하였으나, 스님은 굳게 사양하고 떠났다.

 

만봉회상(萬峯會上)의 어느 스님이 만봉이 삼경(三更)에 스님에게 전해준 의(衣)·봉(棒)을 빼앗고자 이날 밤에 오강(吳江)까지는 따라왔으나, 승방(僧房)에는 미치지 못하고 되돌아갔으니, 그 스님의 속성(俗姓)은 마씨(馬氏)였다. 우는 소리를 듣고 (결락) 건너간 것이 분명하다. 오호라! 몽산(蒙山)이 휴휴암(休休庵)에서 방광(放光)하여 앞의 일을 현몽(現夢)으로 보여준 것이고, 만봉(萬峯)이 삼경(三更)에 전법(傳法)한 것은 후일(後日)을 경계한 것이다. 미래(未來)의 일을 훤히 내다보시고 묘(妙)하게 유촉(遺囑)하였으니, 스승과 제자간의 도(道)는 시간적인 고금(古今)과 공간적인 하이(遐邇)에 간단(間斷)함이 없는 것이다.

 

이것이 석씨지(釋氏之) (결락)  현릉(玄陵)이 스님의 입중유학(入中遊學)을 위로하는 한편 더욱 존숭(尊崇)하였고 모든 사람들도 서로 앞을 다투어 먼저 친견하려 하였다. 스님은 치악산(雉岳山)에 잠시 은거(隱居)하다가 동해(東海)를 순방하고, 양양 낙산사(洛山寺)에서 관세음보살님이 방광(放光)하는 상서(祥瑞)를 감득하였다. 정미년(丁未年) 1월에 다시 치악산으로 돌아왔다. 공민왕이 세 번이나 사신(使臣)을 보내어 스님을 맞이하고자 하였으나 스님은 비로소 5월에야 이르렀으므로 국사(國師)로 추대하고, 대화엄종사(大華嚴宗師) 선교도총섭(禪敎都摠攝) 전불심인(傳佛心印) 대지무애(大智無碍) 성상원통(性相圓通) 복▨▨▨▨▨▨▨▨▨▨(福▨▨▨▨▨▨▨▨▨▨) 원응존자(圓應尊者)라는 존호를 올렸다. 그리고 국사부(國師府)를 설치하고 요속(寮屬) 관원(官員)을 두어 인장(印章)과 법복(法服)을 헌납하였다.


경술년(庚戌年) 9월 현릉(玄陵)이 왕사(王師) 나옹(懶翁)을 청하여 개성 광명사(廣明寺)에 선교(禪敎) 양종(兩宗)의 제산납자(諸山衲子)를 모아 공부선절목(功夫選節目)을 고시할 때 스님을 증명법사(證明法師)로 모셨다. 이 선과법회(選科法會)가 끝난 후 경천사(敬天寺) 에 주석하였다. 다음해인 신해년(辛亥年)에 금강산을 순례하는 중, 5월에 공민왕이 사신을 보내어 개성으로 돌아오도록 청하였으며, 그 해 가을 스님은 치악산(雉岳山)으로 돌아가려고 간청하였다. 임자년(壬子年)부터 영주 부석사(浮石寺)에 주석(住錫)하면서 전당(殿堂)을 일신 중수하여 완전히 복구하였으니, 대개 이는 스님이 입적(入寂)하기 전에 화엄종(華嚴宗) 총본산인 부석사를 완전히 복구하겠다는 계획에서 비롯된 것이라 하겠다.

 

스님의 휘는 천희(千熙)요 호는 설산(雪山)이며 흥해(興海) 출신이다. (결락) 구(具) 전리판서(典理判書) 에 추증되었다. 어머니는 최씨(崔氏)이니, 최씨가 꿈에 큰 배를 보았는데 많은 스님들이 범패(梵唄)를 하고 있었고, 그 물이 대문(大門) 앞에까지 이르러 오는 태몽(胎夢)을 꾸고 임신하였다. 만삭이 됨에 또 백학(白鶴)이 그의 복부를 쪼아 청첩가사(靑帖袈裟)를 입은 한 스님이 뛰어나오는 꿈을 꾸기도 하였다. 그 후 대덕(大德) 정미년(丁未年) 5월 21일 탄생하였다. 스님의 나이 13살 때 화엄종(華嚴宗) 반룡사(盤龍社) 주지인 일비대사(一非大師)를 은사로 하여 머리를 깎고 사미(沙彌)스님이 되었다. 19세에 상품선(上品選)에 합격하였으며, 그로부터 금생사(金生寺)·덕천사(德泉寺)·부인사(符仁寺)·개태사(開泰寺) 등 10여 개 사찰을 두루 역주(歷住)하였다. 스님의 의복(衣服)과 음식(飮食)은 행자시절(行者時節) (결락) 과 조금도 다름없이 검소하였으며, 지조(志操) 또한 매우 고상(高尙)하였다. 선지(禪旨)를 참구하면서 소백산(小伯山)에 있을 때, 또한 꿈에 몽산(蒙山)이 그에게 의법(衣法)을 전해주는 것을 보았다. 금강산과 오대산(五臺山)에서도 같은 꿈을 꾸었으니, 이것이 바로 남유(南遊)를 결심한 동기가 되었다.

 

저서로는 『삼보일경관』(『三寶一鏡觀』) 몇 권이 세상에 유행(流行)하고 있다. 스님의 세수는 76세요 법랍은 63하였다. 신(臣)이 들으니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은 육조대감선사(六祖大鑑禪師)를 스승으로 하고, 대혜보각선사(大慧普覺禪師)를 도우(道友)로 삼았다고 한다. 스님이 입적한 후 시자(侍者)가 매일 몽중(夢中)에서 친견한다는 사실은 지금도 제방(諸方) 림(林)의 미담(美談)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제 원응존자(圓應尊者)천희(千熙)는 꿈에 몽산(蒙山)으로부터 의법(衣法)을 전해받았으니, 석씨(釋氏)의 교(敎)는 그 진리가 심오하여 가히 심구로서 사의(思議)할 수 없는 절대무상(絶對無上)의 교리(敎理)라는 것을 참으로 믿을 만하도다! 신(臣) 색이(穡) 감히 비명(碑銘)을 지을 수 없지만 명(銘)하여 이른다.


무상대도(無上大道) 본래부터 바깥이 없어
고금(古今)에의 시간인들 어찌 있으랴!
회광반조(廻光返照) 그 근본(根本)을 살펴보건대
화엄법계(華嚴法界) 그 자체(自體)는 일심(一心)뿐일세

 


육도윤회(六途輪廻) 반복하나 마음은 부실(不失)
자고 깨는 동정(動靜)에도 일여(一如)하도다.
십방삼세(十方三世) 주류(周流)하여 천류(川流)와 같고
대천세계(大千世界) 편조(遍照)함이 태양과 같네!  


정법안장(正法眼藏) 열반묘심(涅槃妙心) 등불과 같아
묘(妙)한 광명(光明) 인천중(人天衆)에 비추어 주다.
몽중(夢中)에서 전해받은 몽산(蒙山)의 법등(法燈)
육진경계(六塵境界) 두루하여 없는 곳 없네.  


옛날에는 보조국사(普照國師) 원사(遠嗣)하였고
오늘에는 원융존자(圓融尊者) 몽중(夢中)서 받다.
귀국 후엔 공민왕이 더욱 존숭(尊崇)해
온 국민과 일심(一心)으로 국사(國師)로 추대  


칠십육년 사시다가 입적(入寂)하시어
무상(無常)함을 알리고자 사(死)를 보이다.
이 비석(碑石)은 천년만년(千年萬年) 우뚝 서있어
변함 없고 결락(缺落)없이 영원하소서.  


홍무(洪武) 19년병인(丙寅) 1월 일
문인(門人) 개태사(開泰寺) 주지(住持) 묘지무애(妙智無碍) 통조대사(通照大師) 충술(冲述)은 비석을
세우고   비구(比丘) 혜잠(惠岑)은 비문을 새기다.

<이하(以下)는 음기(陰記)이니 음기는 직함(職啣)과 인명(人名)뿐이므로 번역은 생략하고 원문 그대로
붙여둔다.>

 

(음기 생략)

 

비문 출처/한국금석문종합영상정보시스템

 

 

 

 

간살을 낮추면 좋을 텐데.

 

 

폐사지

어쩔 수 없이 벌거 벗겨 속살과 옛 자취를 더듬어야 하겠지만

안온함은 사라지고 접동새 울음마저 끊긴 듯합니다.

 

2020.0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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