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보성군

보성...진주 영장 최득수 철비

임병기(선과) 2020. 3. 31. 18:08
728x90
728x90

칠동 마을

벌교읍 칠동리 421-1번지 도로변 비각

 

보성문화원 홈페이지에 실린 마을 유래

마을의 이름은 존제산(尊帝山) 줄기가 동쪽으로 뻗어내려가다 300m 가량의 영봉이 솟아있는데 이곳에 올라가면 멀리 여자만을 관찰할 수 있어 고려 공민왕때부터 조선초기까지 군인이 주둔 하였다 한다. 지금도 산명을 성터로 부르고 있고, 주위에는 성을 쌓았던 많은 돌이 있으며 여기서 서쪽으로 조금 내려오면 당시 군량과 마초를 저장한 창고가 일곱동(七棟)이 있었다하여 칠동(七棟)이라 했다 한다.

 

 

행 진주영장 최 공 득수 휼민영세불망비 行 晉州營將 崔 公 得秀 恤民永世不忘碑

1877

 

영장 營將

 

지방내륙군의 중추 역할을 했던 속오군 등의 훈련과 지휘를 전담(專擔)하기 위해 두었다. 임진왜란중인 1594년(선조 27) 속오군이 창설되면서 처음 설치되었으며, 별도의 영장이 임명된 곳과 수령이 겸임한 2가지 형태가 있었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에는 신구군제(新舊軍制)의 중첩에 따른 군사지휘체계 등을 이유로 수령이 영장을 겸임했다. 그러나 정묘호란에서 문관·음관(蔭官) 수령이 병법을 몰라 적과 싸우지 못함에 따라 갑자기 장수를 선발해야 하는 폐단이 발생했다. 이에 정부는 청과의 전쟁에 대비하기 위해 당상무관(當上武官)을 영장으로 차출하여 군사가 적은 강원도와 함경도에는 3~4명을, 나머지 도에는 5명씩 파견했다. 그리하여 파견된 영장들은 기예를 가르치고 연말에는 오영(五營)이 함께 1차례 합동훈련을 실시하여 지방군사력을 강화하고자 했다.

 

그렇지만 병자호란이 끝난 후 재정상의 이유 등으로 다시 수령이 영장을 겸했다가, 북벌을 내세우면서 군사력을 강화하던 1654년(효종 5)에 왜적의 방비를 명분으로 삼남에만 별도로 영장을 파견했다. 특히 이때는 군무와 관련하여 수령과 좌수(座首) 등에 대한 처벌권이 영장에 주어졌다. 이러한 정책에 대하여 토호들은 좌수의 직을 기피하거나, 그들과 경제적 이해를 같이하는 권문세가와 함께 영장순력(營將巡歷)의 폐단 등을 들어 영장에 대한 반대여론을 조성하거나, 영장에 대하여 집단적으로 저항했다. 그러나 효종은 토호들의 요구를 묵살하고 강력하게 영장제를 실시했으며 이후 영장은 대체로 삼남에만 파견되고 그외의 지역은 수령이 겸임하게 되었다.

 

청과의 전쟁위협이 사라진 현종대 이후부터 영장은 속오군 등의 훈련보다는 향촌에서의 국가지배력을 강화시키는 데에 크게 활용되었다. 아울러 정치변란의 진압, 관명(官命)을 거역한 승려들의 작변(作變) 진압, 토호의 감시, 천주교도의 체포 등을 통해 조선의 향촌통제에 크게 기여했다. 따라서 영장은 체제유지의 기능을 수행하면서 조선 후기 지방내륙군의 중추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출처.다음백과)

 

 

 

병정지세  丙丁之歲  병자, 정축(1876~1,877)년에

경계위병  庚癸爲病 백성들이 기근으로 아사 지경에 이르자

시의만금  施以萬金 재물을 풀어

활아백성  活我百姓 백성을 구휼하였다.

 

삼읍균몽  三邑均蒙  세 고을에 골고루 나누어 주어

사린계영   四鄰階詠 사방에 칭송이 자자하였으니

충의고가  忠毅古家  명문 가문에 걸맞게

적선여경  積善餘慶  선을 행하였으니 자자손손 번영할 것이다.

 

한문 음역과 의역은 개인적인 해석입니다.

 

1877년 비를 세웠음을 알 수 있습니다.

 

광서 삼년 정축 구월 일 光緖 三年 丁丑 九月 日

1877년 9월

 

 

우리나라의 철비(목록,사진)

http://cafe.daum.net/moonhawje/MebK/321?q=%EC%9A%B0%EB%A6%AC%EB%82%98%EB%9D%BC%EC%9D%98%20%EC%B2%A0%EB%B9%84(%EB%AA%A9%EB%A1%9D%EA%B3%BC%20%EC%82%AC%EC%A7%84)

 

2020.03.13

728x90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