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북도/부안군

부안...실상사지. 부도암지 부도

임병기(선과) 2020. 3. 19. 1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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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상사지.

직소폭포 주차장에서 10여분.

내소사.선계사.청림사와 더불어 부안의 4대 사찰로 전하지만 사지에는 불교석조유물이 잔존하지 않아 미답리스트에도 제외하였습니다.

다만, 실상사지 부속암자로 추정되는 부도암의 부도 2기만 인지 하고 있었습니다.

 

얼마전

우리카페 오분향님이 포스팅한 실상사 부도 2기는 지금까지 부도암에 유존한 것으로 인지하였던 부도였습니다.

부도 답사를 겸해 답사꾼들에게도 잘 알려지지 않은 실상사지를 다녀왔습니다.

 

문화재청 발간 한국의 사지(2016년)에 실상사지 글을 발췌하였습니다.

"실상사지는 부안 4대 거찰 중 하나로 손꼽히던 곳이 다. 그러나 실상사의 연혁에 대해서는 한국전쟁으로 모 든 기록이 전소되어 자세히 알 수 없다고만 전해질 뿐이 다. 창건에 대해서는 진덕여왕(혹은 선덕여왕)대에 草衣 禪師가 창건하였다는 등의 기록이 전해지나 근거를 확 인할 수 없으며, 고려시대의 기록도 전무하다. 다만 『新增東國輿地勝覽』에 실상사가 변산에 존재함이 기록 되어 있어, 조선전기에는 사찰이 운영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실상사의 연혁은 이 기록을 필두로 조선 전 시기의 문헌에서 간략히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孝寧大君이 관여한 실상사의 불상 조성, 중창 관련 권선문이다.

 먼저 「楞迦山 實相寺 堂主 毗盧遮那佛 藥 師如來 無量壽佛 丈六像萬人同願敬成祝 上作法諸緣普勸詞」는 실상사 당주 삼존불상 조성 권선문으로서, 1462 년 불사에 대한 권선과 함께 불상 내 복장의 품목, 보시자까지 명기하고 있다. 

다음으로 「楞迦山 實相寺 重創 千人同發願冊」은 1466년에 기록된 중창불사 발원문이 다. 특히 현재 보물 제398호로 지정되어 있는 『月印千 江之曲 卷上』은 그 입수 경위를 추적한 결과 원래 실상사 불상의 복장물이었던 것으로 추정되었다. 즉 이 책은 불상이 조성된 1462년 혹은 사찰이 중창된 1466년에 불 상 내 복장물로 봉안되었던 것 중 하나라는 것이다. 이 와 같이 효령대군이 불사에 깊이 관여하였다는 사실은, 당시 실상사가 왕실의 원당으로서 매우 높은 사격을 지 니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후 ‘실상사의 田結이 매우 많았다.’고 전한 1502년의 실록 기사를 통해, 16세 기 전반 실상사가 매우 부유한 사찰이었음을 알 수 있 다.

 

실상사는 조선전기에는 매우 높은 사격과 사세를 유지하였고, 또한 변산을 유람하는 많은 문인들이 반드 시 거쳐가는 명소이기도 하였다. 문인들은 유람 중 실상 사에서 숙박을 하거나 머물며 詩文을 작성하기도 하였 다. 또한 普應堂 暎虛스님은 19세가 되는 1540년 이곳 실상사에서 출가하였고, 16세기 후반에 다시 돌아와 地 藏經을 읽으면서 수행정진 하였다고 한다. 이와 같이 다양한 관련 기록 중 특히 沈光世가 1607년에 지은 「遊 邊山錄」를 살펴보면, ‘실상사는 세조의 원당으로서, 절 의 규모가 크고 높았으며 불상이 매우 성대하게 조성되 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로 미루어 실상사는 임진왜란 때에도 전화의 피해를 입지 않고 사세를 유지 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承政院日記』의 1719년 기사에서는 실상사의 많은 승도들이 떠나갔음을 언급하고 있어, 18세기에는 사세가 많이 축소되었으리 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한편,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姜世晃의 《禹金巖圖》에는 우금 암과 관련된 시문과 함께 실상사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이 그림은 강세황이 우금암을 비롯한 변산 일원을 유람 하며 지은 「遊禹金巖記」를 근거로 그려진 것이다. 이 기록에 실상사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없지만, 그림에는 실상사의 寺宇가 비교적 소상히 그려져 있어 조선후기 실상사의 가람 배치와 규모를 엿보는 데 참고가 될 만하 다. 이후 작성된 조선후기의 지리지, 지도에서는 모두 실상사가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특히 조 선후기에 작성된 대부분의 지도에 실상사가 來蘇寺, 月明庵 등과 함께 표기되어 있다. 이로 보아 조선후기 실 상사는 조선전기만큼의 사세를 유지하지는 못하였으나, 邊山의 중요 사찰로서 꾸준히 법등을 이어오고 있었다 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1894년 동학농민운동 때 불상의 복장이 개방 되어 반출되었고, 일제강점기에는 토지조사사업으로 인 하여 사찰의 전답 대부분을 빼앗기게 된다. 그럼에도 불 구하고, 실상사에는 한국전쟁으로 소실되기 이전까지 많은 전적과 경판류 등이 소장되어 있었다.

 

최남선이 쓴 『尋春巡禮』 중 「邊山의 四大寺」에 의하면, 수십년 전에 는 당우가 여러 채 있었고 불상도 오래된 것이 많았으나 그가 방문할 당시 당우는 소실되고 대적광전만 남아 있 었다고 하며, 불상은 많이 파손되었다고 한다. 특히 최 남선은 불복장 중에서 효령대군의 願文과 古寫經, 古印 經이 수백권 나왔다는 것을 언급하였고, 사중에 희귀본 을 포함한 많은 경전과 법화경 판목이 한켠에 쌓여 있었 다고 하였다. 또한 앞서 언급한 김영두의 논고에도 일 제강점기 당시 실상사에서 기거하였던 인물의 전언을 통해 많은 경판과 전적이 있었던 것을 확인하였다고 한 다. 이와 같이 일제강점기 실상사는 사세가 많이 기울 기는 하였으나 그간의 역사를 증명할 수 있는 많은 자료 들과 귀중한 유물을 간직하고 있던 사찰이었다. 그러나 한국전쟁 시 빨치산 소탕 작전으로 인해 사찰이 전소되 면서 사중의 모든 유물도 함께 소실되고 터만 남게 되었 다. 최근에는 발굴조사 이후 2동의 당우를 신축하였다"

 

월인천강지곡의 반출과 보관 과정, 강세황의 실상사전도(출처.불교인터넷 방송)

http://ibtn.net/v2_board/bbs/board.php?bo_table=news&wr_id=1018

 

천왕봉 아래

산속에 위치한 평지 가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미륵전

실상사지에는 실상사가 복원되었으며 천왕봉을 배경으로 미륵전과 삼성각, 요사 등의 전각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봉래정사(蓬來精舍)

원불교 성지 입니다.

 

원불교신문 기사

http://www.won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17665

 

원불교 제법성지 표지석

"일제강점기 때는 원불교(圓佛敎) 교조인 박중빈(朴重彬)이 절의 옆에 조그만 초당을 짓고 3년간 수도하였기 때문에, 이곳은 원불교의 4대 성지 가운데 하나인 변산성지(邊山聖地)로 일컬어진다"고 합니다.

 

인장바위.부도

문화재청 발간 한국의 사지에는 부도암의 부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현재는 부도암지에서 옮겨 실상사 경내 봉래정사 앞쪽에 위치하며, 한국의 사지에 소개된 승탑 기단은 없었습니다.

간사한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 하고, 부도암지를 답사하지 않고 부도를 뵈었다고 쾌재를 불렀습니다.

신심이 부족한 탓이지요.

 

한국의 사지

"이곳은 기존 조사자료에서 실상사지 영역에 포함하여 파악되었으며, 부도전지로 언급하였던 곳이다. 그러나 『梵宇攷』의 실상사 언급 항목에 “寺北又有浮屠庵”이라는 기록이 보인다. 이를 토대로 본 조사에서는 실상사의 북쪽 위에 해당하는 위치인 이곳을 ‘부도암지’로 추정하 며, 실상사의 부속암자로 판단하였다."

 

조선후기 부도

당호를 새기지 않았으며, 기단부는 본래 부재가 아닙니다.

한국의 사지에는 부도암지에 기단부가 남아 있다고 하였는데...

 

부도(1)

당호를 새기지 않은 종형부도

상면에 복판단엽의 연판문 10엽이 새겨져 있고 별석 상륜부는 망실되었습니다.

 

 

 

부도(2)

한국의 사지에는 배수로에 매몰된 상태라고 기술하였습니다.

상부 홈이 사리공?이라면 뒤집힌 모습입니다.

 

당호를 새기지 않았으며, 특별한 문양이 없습니다.

 

 

문득

매창의 시를 읽고 싶습니다.

더불어

심광세를 비롯 하여 변산을 거쳐간 선인들의 유산록도...

 

2020.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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