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경주시

경주...흥덕왕릉

임병기(선과) 2020. 1. 25. 0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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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덕왕릉

흥덕왕(42대왕,재위 826~836)와 장화왕비의 합장릉 입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권10에 의하면 “조정이 왕의 유언에 의하여 장화왕비의 능에 합장하였다( )”라고 했으며, 『삼국유사()』 왕력편에는 “능은 안강 북쪽 비화양에 있는데 왕비 창화부인과 합장했다()”라고 해서 왕릉의 현재 위치가 일치하고 있다"(네이브 지식백과)

 

안강읍 북쪽에 있는 어래산의 남동쪽으로 뻗어내린 구릉의 말단 완만한 경사면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신라 왕릉의 대부분은 경주분지, 남쪽의 산간에 위치하는데 그 연유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흥덕왕릉은 북쪽에 위치합니다.

 

왕릉은

입구의 화표석 2주, 전면에는 문무인석 각  2분이 시립하였으며, 능 전후에 4마리 석사자가 호위하고 있습니다.

왕릉 전면에는 후보한 향로석, 큰 안상이 새겨진 상석이 놓여 있으며, 난간석이 둘러져 있습니다.

원형봉토분으로 석실분이며 둘레석에는 12지를 새겼습니다.

주지하듯이 12지상은 방위개념 뿐만아니라 무덤을 지키는 수호신입니다.

그리고 무덤의 주인공을 알려주는 비석의 귀부가 유존 합니다.

 

 

흥덕돵(?~836, 재위 826~836)

"성은 김(), 이름은 수종()으로 수승()이라고도 하는데, 뒤에 경휘()로 바꾸었다. 시호는 흥덕()이다.

신라의 제38대 원성왕(, 재위 785∼798)의 손자로, 아버지는 원성왕의 맏아들인 혜충태자() 김인겸()이며, 모친은 성목태후() 김씨이다. 제39대 소성왕(, 재위 799∼800)과 제41대헌덕왕(, 재위 809∼826)의 동복아우이며, 이 밖에 김충공(, 제44대 민애왕의 아버지), 김제옹() 등의 형제가 있었다.

왕비는 소성왕의 딸인 장화부인() 김씨()인데, 장화부인은 826년 흥덕왕이 왕위에 오르자마자 죽고 정목왕후()로 추봉되었다. 《삼국사기》에는 장화부인이 죽어 왕이 슬픔에 빠지자 신하들이 새로 왕비를 맞아들이라고 요청했으나 흥덕왕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시녀들조차 곁에 들이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822년(헌덕왕 14) 왕위 계승자인 부군()이 되어 월지궁()으로 들어간 뒤에 김충공()의 딸 정교()를 태자비로 삼았다는 기록도 전해지며, 827년(흥덕왕 2)에는 당나라 문종(, 재위 827〜840)이 사신을 보내 흥덕왕의 어머니 박씨를 대비()로, 아내 박씨를 왕비로 봉했다는 기록도 전해진다. 그러나 이것이 당나라에서 흥덕왕의 어머니와 왕비의 성을 잘못 알고 적은 것인지, 흥덕왕이 새로 왕비를 맞이한 것인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자녀에 대해서도 확인되지 않는다.

《삼국사기》에는 831년(흥덕왕 6) 왕자 김능유()가 승려 9인과 함께 진봉사(使)로 당나라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바다에 빠져 죽었으며, 836년(흥덕왕 11)에는 왕자 김의종()을 당나라에 숙위(宿)로 보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하지만 신라에서는 당나라로 숙위나 사신으로 보내진 왕족들에 대해서도 왕자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김능유와 김의종이 흥덕왕의 왕자인지는 알 수 없다. 《삼국유사》 ‘왕력’ 편에는 왕비의 이름이 창화부인()으로 기록되어 있다.

흥덕왕은 헌덕왕 때인 819년(헌덕왕 11) 김숭빈()이 죽자 그의 뒤를 이어 상대등()으로 임명되었다. 822년(헌덕왕 14)에는 부군()으로 봉해져 월지궁()으로 들어갔으며, 826년(헌덕왕 18) 음력 10월에 헌덕왕이 죽자 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삼국사기》 ‘열전()’의 녹진(祿)에 관한 기록에는 헌덕왕이 대를 이을 아들이 없어서 동생인 김수종을 저이(, 왕위를 이을 태자)로 삼아 월지궁으로 들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왕위에 오른 흥덕왕은 828년(흥덕왕 3) 자리에서 물러난 영공()을 대신해 대아찬() 김우징(, 재45대 신무왕)을 시중()으로 삼았다. 그리고 당나라로 건너가 서주()의 무령군() 소장()을 지내고 돌아온 장보고()의 건의를 받아들여 병사 1만 명을 거느리고 청해진(, 지금의 완도)을 지키게 했다.

그 해 음력 12월에는 김대렴을 사신으로 당나라에 보냈는데, 그는 귀국할 때 차의 종자를 가지고 돌아왔다. 흥덕왕은 이를 지리산()에 심게 했고, 이때부터 차가 널리 퍼지게 되었다고 한다.

829년(흥덕왕 4)에는 과거 당항성()이 있던 당은군()을 당성진(, 지금의 경기도 화성)으로 바꾸고 사찬() 극정()을 보내 이를 지키게 했다. 그리고 집사부()의 명칭을 집사성()으로 바꾸었으며, 원곡양전()을 설치해 대사() 1인과 간옹() 1인을 두었다.

831년(흥덕왕 6)에는 김우징이 자리에서 물러나자 이찬 윤분()을 시중으로 임명했다. 하지만 834년(흥덕왕 9) 윤분이 자리에서 물러나자 김우징을 다시 시중으로 임명했다. 835년(흥덕왕 10)에는 아찬() 김균정()을 상대등으로 임명했고, 아버지가 상대등으로 임명되어 김우징이 자리에서 물러날 것을 청하자 이를 받아들여 대아찬 김명(, 제44대 민애왕)을 시중으로 삼았다.

흥덕왕의 재위기간에 신라에는 자연재해와 기근이 잇달아 나타나면서 백성들의 삶이 매우 어려워졌다. 827년(흥덕왕 2)에는 여름인 음력 5월에 서리가 내렸고, 금성에는 큰 가뭄이 들었다. 828년(흥덕왕 3)에는 음력 3월에 눈이 석 자나 내렸고, 832년(흥덕왕 7)에는 봄과 여름 내내 땅이 검붉게 될 정도로 극심한 가뭄이 닥쳤다. 흥덕왕은 정전(殿)에 나가지 않고 음식을 줄였으며, 죄수들을 사면했다. 하지만 지독한 흉년이 닥치자 곳곳에서 민란이 일어났고, 왕은 각지로 사신을 보내 백성들을 위무했다.

833년(흥덕왕 8) 봄에는 나라에 극심한 기근이 닥쳤으며, 겨울에는 전염병으로 많은 사람이 죽었다. 이렇듯 잇따른 흉년과 기근으로 사회적 불안정이 확산되자 흥덕왕은 834년(흥덕왕 9) 서형산(西)에서 군대를 사열했으며, 직접 남쪽의 주와 군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진골()과 6두품, 5두품, 4두품, 평민을 남녀로 구분해 의복과 장신구 등의 복식()을 법령으로 정해서 사치를 금하게 했다.

한편, 흥덕왕은 김유신을 흥무대왕()으로 봉했으며, 불교를 신봉해 이를 진흥했다. 827년(흥덕왕 2) 고구려의 승려인 구덕()이 당나라에서 불경을 가지고 오자 여러 절의 승려들을 모아서 그를 맞이하게 했다. 830년(흥덕왕 5)에는 왕의 건강이 좋지 않게 되자 기도를 하고 150명에게 승려의 도첩을 주었다.

흥덕왕은 836년(흥덕왕 11) 음력 12월에 죽었으며, 유언에 따라 왕비인 장화부인의 능에 합장되었다. 오늘날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육통리에 있는흥덕왕릉은 사적 제30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왕릉 주변에서 흥덕이라는 명문이 새겨진 비석 조각이 발견되어 신라의 왕릉으로서는 드물게 피장자의 신원이 확인된다. 《삼국유사》에는 흥덕왕의 무덤이 안강() 북쪽의 비화양()에 있으며, 왕비 창화()와 합장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흥덕왕이 왕위를 이을 적장자가 없는 상태에서 죽자 그의 사촌인 상대등 김균정()과 또 다른 사촌인 김헌정()의 아들 김제륭()이 왕위를 놓고 다투었다. 시중 김명과 아찬 이홍(), 배훤백() 등은 김제륭을 지지했고, 김우징·김예징()·김양() 등은 김균정을 지지했다. 두 세력은 궁궐을 장악하려고 서로 싸웠고, 김제륭이 김균정을 죽이고 승리하면서 제43대 희강왕(, 재위 836~838)으로 왕위에 올랐다.

한편, 《삼국유사》에는 흥덕왕 때에 당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온 사람이 앵무새 한 쌍을 가지고 왔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얼마 되지 않아 앵무새 암컷이 죽자 수컷은 슬퍼서 울음을 그치지 않았고, 흥덕왕은 앵무새 앞에 거울을 걸어 놓게 했다. 수컷은 거울을 보고는 짝을 얻은 줄 알고 쪼다가 이내 자기 모습이 비친 것임을 알고는 슬피 울다가 죽었고, 흥덕왕은 이를 노래로 지었으나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두산 백과사전)

 

 

정감이 가는 등 굽은 소나무.

사시사철 시간에 관계없이 방문객에게 즐거움을 주는 풍경입니다. 

 

 

귀부

이곳에서 발견된 비편(경주박물관 소장)의 글로 인해 흥덕왕릉으로 밝혀졌습니다.

실제로 무열왕릉과 더불어 정확하게 무덤 주인공을 알 수 있는 왕릉 입니다.

 

 

훼손, 마모도가심하여 안타깝습니다.

 

 

귀갑분 등

 

 

 

 

 

꼬리

거의 묘사되지 않았습니다

 

 

 

화표석華表石(2)

정확한 명칭이 맞나요?

왕릉 입구를 표시하는 표시석으로 추정됩니다.

 

 

무인석(1)

괘릉의 문석인을 닮았습니다.

우리민족과는 다른 외모이며, 9세기 중엽의 패션이스트의 작품 입니다.

서역과 활발한 교류의 상징으로 알려져 있지만, 최근에는 불교의 인왕상으로 추정하는 주장도 있다고 합니다.

 

 

동행한 분이

옆의 주머니는 여권 보관용이라고 재미난 표현을 합니다.

 

 

 

 

 

무인석(2)

무기를 잡은 두 손이 바뀌었을 뿐 거의 흡사합니다.

 

 

 

 

 

 

문인석(1)

무인석과 마찬가지로 콧수연, 긴 구렛나루와 턱수염이 우리 얼굴과는 다릅니다.

꽃무늬 관모를 쓰고, 꽃신이 압권 입니다.

김천 광덕동 석조보살 입상의 꽃신을 연상케 합니다.

 

 

 

 

 

 

무인석(2)

 

 

 

 

 

 

 

 

 

상석床石. 향로석香爐石

 

 

향로석 안상

석탑 안상과 무관하지는 않을 것 입니다.

 

 

석사자(1)

전방 좌측

 

 

유일하게 왕(王)字가 새겨진 목걸이를 걸고 있습니다.

 

 

 

 

석자자(2)

후방 좌측

 

 

석사자(3)

후방 우측

 

 

석사자(4)

전방 우측

 

 

난간석

 

 

 

 

 

 

호랑이

 

 

토끼

 

 

 

 

 

 

 

 

 

 

원숭이

 

 

 

 

 

어?

돼지 사진을 찍지 않았군요.

 

 

삼국유사 Ⅸ-흥덕왕릉에서...이 령

 

1

짚대를 타고 내리는 빗물은 서두르지 않는다

또로록 또로록  내리는 낙수

나직이 흐느끼는 속울음처럼

면역 없는 그리움, 사랑이 천년의 봉분을 타고

저리 오래도록 깊고 서럽게 흐른다.

  

2

합장된 것은 몸 아닌, 마음이었다.

 

아라비아 푸른 눈을 베껴

한 발 아래 뛰어내리지 못해 한 발 뒤에서 우는 여인아

비가悲歌에 젖은 처용무처럼 자못 흔들리는

귀부의 몸돌 난간에 핀 저 제비꽃

 

덕이 흥하면 천국이요, 사랑이 멸하면 지옥이라지.

사랑이 움트는 일은 꽃이 피는 일.

철지난 말의 개화, 왕릉이 일어선다.

산 그림자 눕는 숲, 솔잎 침낭 들추며 나온 저 제비꽃

 

합장된 것은 금관이 아닌 한 사내의 순정이었다.

  

3

적막이 하도 좋아 나 그 적막에 들었네.

 

비雨, 땅에 떨어지기까지 꿈이었네.

사랑은 꿈꾸는 자들의 눈물.

비悲, 터진 비명은 더 이상 꿈이 아니네.

사랑은 살아있는 자들의 비상.

비飛, 한잔 술에 취해 슬픔을 말리며 하늘을 나네.

사랑은 꿈에서 깬 신들의 눈물.

 

적막이 좋아 적막에 드니 나를 취하게 한 그 적막, 사랑이었네.

  

4

비 그치자 달이 머리 위로 솟는다. 가래톳 돋는 밤꽃 향 분분하다. 천년 면벽에 든 돌부처도 벌떡 일어나

걸어 나올 것만 같은 밤. 무덤이 열리고 엎드려있던 자라가 기지개를 켜는 금오산, 신검의 부활인가? 산이

품은 그리움, 휙휙 휘리릭 귀신 새 소리마저 구슬프다.

  

5

세상 꼴딱 모르고 지나치고 말 발걸음을

귀신 소리가 불러 세워 밤이 하얗다

밤물 같은 어둠을 밝혀주는 목청

처음에는 낮은 속울음이었을 산이 품은 그리움

무덤을 싸안은 적막의 세월들이 소리를 높이게 했던가 보다

그리움에는 면역이 없어

발자국들이 점이 될 때까지

새는 부리에 허공을 달았을까

바람의 입을 빌린 나뭇잎, 밤마다 곡성에 쫓겨 사그락거리고

나는 산중을 헤매는 꿈을 꾼다

내 닿는 길마다 달빛 들어 마음의 그물을 깁고

비명의 시간들 차분히 목청 내려놓으면

귀신 새가 무덤가에서만 우는 이유를

그제서야 알 것만 같다.


*삼국유사 제9장 배경설명

 

흥덕왕릉 – 통일신라의 능원 양식이 가장 잘 보존된 피장자가 정확히 밝혀진 왕릉이다.

정목왕후와 합장할 것을 유언한 흥덕왕에 의해 합장릉이라 봉분의 크기도 동시대의 왕릉보다 크다.

사랑의 크기가 왕릉의 크기로 내려앉은 곳, 서역인상의 무인석상과 빼곡한 소나무 숲이 무덤을 지키고 서 있다.

 

 

합장된 것은 금관이 아닌 한 사내의 순정이었다.

 

2020.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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