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경주시

경주...귀래정歸來亭

임병기(선과) 2020. 1. 22.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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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래정歸來亭

경주시 강동면 다산 2리

천서가숙상량문(川西家塾上樑文, 1755년)에 의하면 지헌공파에서 공부를 하기 위한 공간이 없자 이를 의논한 결과 가숙을 지을 터를 정리하고 그 자리에 숭정기원후삼 을해(崇禎紀元後三乙亥)인 조선후기 1755년(영조 31)에 천서가숙을 건립하였다고 전합니다.처음에는 육화정이라 하였으나, 1930년 경 예조정랑을 지낸 지헌(止軒) 이철명(李哲明)을 모시면서, 선생이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왔다는 뜻을 기려 당호(堂號)를 귀래정으로 바꾸었습니다.즉 귀래정은 사랑채의 당호(堂號)로, 사랑채로서는 이례적으로 정육각형의 정자와 같은 형태를 취하고 있으며, 2019년 12월 30일 보물제 2052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지헌 이철명 止軒 李哲明(1477~1523)

"1477년(성종 8)∼1523년(중종 18). 조선 전기 문신‧유학자. 자는 지지(知之)이고, 호는 지헌(止軒)이다. 본관은 여주(驪州)이고, 거주지는 경상북도 경주(慶州)이다.  부친은 이계손(李係孫)이다.1495년(연산군 1) 증광시 진사 2등 3위로 합격하였고, 1504년(연산군 10) 별시 삼등 3위로 문과 급제하였다.

관직은 연산군 대에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교서관저작(校書館著作)‧홍문관박사(弘文館博士)를 지냈고, 중종 대에 병조좌랑(兵曹佐郞)‧예조정랑(禮曹正郞)‧홍문관검교(弘文館檢校) 등을 역임하였다. 1515년(중종 10) 관직에 성실히 복무한 은전으로 휴가를 받아 고향으로 내려갔다.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가 일어나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와 충암(沖菴) 김정(金净) 등 여러 현인들에 대하여 여러 차례 무고를 상소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귀향부(歸鄕賦)」를 짓고 1520년(중종 15)에 낙향하였다. 이후 모친을 봉양하며 옛 선현들의 서적을 탐독하면서 성리학에 힘써 스스로 「수분명(守分銘)」을 지어 자신의 경계로 삼았다. 1522년(중종 17) 모친상을 당하여 3년상을 지내던 중 지나친 슬픔이 건강을 해쳐 이듬해 생을 마감하였다.

묘는 경상북도 포항군(浦項郡) 흥해읍(興海邑)에 있다. 문집으로 후손 이화영(李和榮)‧이계원(李啓源)‧이장원(李長源)이 편집 간행한 『지헌일고(止軒逸稿)』가 있다."(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모정 건물이면서도 절병통으로 마감하지 않고 육각 평면위에 팔작지붕을 꾸미는 독특한 결구방식 입니다.

 

 

(동호회/남산아지매 사진)

 

정문, 연지


 

연지蓮池

정문으로 들어서면 다리 아래로 연지가 있습니다.

사대부 집안의 연지는 천원지방 天圓地方을 따르는데, 이 곳은 ㄱ字 형으로 전례가 없는 유일무이한 사례 입니다.

일부자료에는 연지는 북두칠성, 다리는 오작교, 괴석 2개는 계수나무를 상징하며 귀래정은 달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다리

연지위에 걸려 있으며, 근자에 후보하였습니다.

최초에는 홍예교가 아니었을가요?


 

귀래정歸來亭 현판

 


귀래歸來는 우리들이 익히 알고 있는 중국 진(晉)나라의 도연명(陶淵明) 귀거래사(歸去來辭)에서 유래되었으며,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자연과 더불어 사는 전원생활의 즐거움을 노래한 싯구 입니다.


귀래정기(歸來亭記)...이병관.1937년

귀래정의 원래 이름은 '육화정(六花亭)'  또는 '육각정(六角亭)'이다. 정자는 규모가 크지 않으면서 앞이 트였고, 야단스럽지 않으면서 그윽하다. 여섯 모서리가 되도록 집을 짓게 된 것은  마주 보고 있는 산세가 설화(雪花), 즉 모양이 육각인 눈꽃을 연상시켜서이며, 그래서 '육화정'이라는 편액을 붙이게 되었다.


경주 북쪽 오십 리 川西村에 지세가 평탄한 곳이 있다. 거기에는 숲이 울창한 가운데 네모난 둑 위에 날아갈 듯한 집이 있으며, 그 안에 구부러진 난간이 서있는데 그것을 이름하여 歸來亭이라 하니 止軒 선생 이공(李哲明)께서 거처했던 곳이다. 선생은 아주 화려한 솜씨로 서당을 지었으며 높은 인격을 갖춘 사람으로 뽑혔다. 또한 그는 承文館에 천거되어 兵禮博士와 檢校知製를 지냈으며 홍문관에 천거되어 前途가 밝았다. 그러나 서울거리를 활보하다가 차문의 화를 당하여 일시에 현인이 제거되는 위태로움을 당했다. 공이 이때에 사건의 큼을 알고 드디어 고향에 돌아가서 ‘賦’를 지어 그 뜻을 대략 드러내어 말하기를 ‘세상길의 험난함을 근심하니, 장차 어디로 가서 멀리 바다 구름을 보며 살 것인가? 장차 어느 동구 밖에서 의지할 것인가? 오직 성현이 서로 만나 국가의 다스림을 당함에 있어 대저 어찌 작은 무리들의 아름다움과 임금의 은총에 혹함이 있겠느냐? 하물며 지금 세상에 있어서랴. 아 哲人이 사라짐을 어찌 기다릴 것인가? 구름 아스라이 있는 곳에서 날마다 부르짖으며 젊음을 무릅쓰고 기뻐하고, 또한 부와 귀는 편안함을 구하는데 족하지 못하다.


형세가 좋지 않음을 슬퍼하며 종을 불러 앞길을 인도하게 하고 杜牧(晩唐 시인)의 松菊을 찾고 들과 밭을 간다. 오직 나의 진실된 업은 先代 哲人의 교훈집을 읽는 것이고 性命의 근본을 미루어 가는 것인 즉 卽日로 南下하여 다시는 黨勢의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것이 공히 급히 물러날 수 있는 용퇴의 뜻인 것이다. 공의 후손이 되어 현명한 조상의 뜻을 미루어 기술한 즉 당일에 이 정자를 지었고 이곳에서 휴식하며 산 것이다. 머리를 돌려 천리를 내려오니 나에게 기록하기를 물었다. 잊지 않고 가만히 생각하기를 우리의 己卯士禍의 잔혹함이 東漢의 당과의 변과 흡사하니 초연히 홀로 죽임과 형벌의 화를 면하였다.


오직 신도반과 곽임종 등 數人을 후세인이 항상 논하건대 신과 곽이 李杜(이백과 두보)보다 현명하고 겸손하지 않다 하는 것은 그 기미의 밝음을 본 것이다. 공이 조용한 가운데 선생에게 청하여 함께 제휴하며 같이 돌아가자는 뜻이 없었던 것이 아니다. 단지 만난 바의 지역의 다름이 있었던 것이다.또한 집에는 노모가 계셔서 자신이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함이 있은 즉 조용히 기러기가 멀리 날아가는 것과 같은 부를 쓴 것이다주살이 그 행장에 미치지 못하고 돌아가 쉬는 것이 그 옳음을 얻은 것은 역시 東漢의 신과 곽 때문인 것이다. 삼가 이런 말로 돌이켜보건대 정자에 기록한 제일의 뜻은 이 亭子에 오르는 자만이 공의 마음 자취를 알 수 있을 것인저(출처/다음)

 

 

귀래정에는 온돌방이 2개 있습니다.

각각 여사재, 영귀당 현판을 걸었습니다.

 

여사재如斯齋

논어 자한편에서 유래하였으며,세월의 덧없음을 말합니다.

서자여사부 불사주야 逝者如斯夫 不舍晝夜

흐르는 시간이 물과 같구나. 밤낮을 쉬지 않네.

 

 

영귀정詠歸亭

논어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공자가 어느 날 제자들에게 "각자 너희들의 뜻을 말해보라"고 하자 모두가 세상에 나가서 벼슬할 뜻을 밝혔다. 그러나 증점(曾點)은 "늦은 봄 날씨 따뜻한 때 봄옷이 다 마련되면 대 여섯 명의 어른과 예닐곱 명의 아이들을 데리고 기수(沂水)에 나가 목욕하고 무우(舞雩)의 제단 터에서 바람 쏘인 다음, 시를 읊조리다 돌아오겠습니다(莫春者, 春服旣成, 冠者五六人, 童子六七人, 浴乎沂, 風乎舞雩, 詠而歸)"라고 대답했다. 공자는 이에 "나는 증점의 뜻에 동의한다"면서 증점의 활연한 마음을 찬동하였다."

즉, 영귀정(詠歸亭)은 증점의 답변 마지막 구절인 영이귀(詠而歸)에서 유래되었으며 안빈낙도의 삶을 의미합니다.

 

참고로, 제가 소장하고 있는 민가 고택, 정자 현판, 명승지 암각문 등의 이름의 유래를 쉽게 설명한 책을 소개 합니다.

한국의 정원.

선비가 거닐던 세계.허균,이갑철.다른세상.2002년

 

 

흔치 않은 육각 건물

평면을 둘로 나누어, 앞쪽에 마루를 깔고 뒤편에는 방을 들였으며, 끝에는 난간을 둘렀습니다.

육각형 평면 형태의 누정은 경복궁 향원정, 창덕궁 존덕정, 낙산사 의상대에 있습니다.
 

 

누하주

덤벙 주초위에 기둥을 올리고 까치발로 지지하였습니다.

마루 누하주에 까지발을 지지한 사례는 처음 접한 것 같습니다.

 

 

난간

툇마룰 바깥에 설치된 계자난간으로 하부에도 장식을 하였습니다.

 

 

계자난간.궁판,궁창

 

 

우물마루, 툇마루

특하게도 퇴주를 두리기둥, 방형기둥으로 교차하여 세웠습니다.

미감 뿐만 아니라 음양(하늘과 땅) 등의 의미가 있을텐데...

 

 

귀마루

육각평면 중앙에 방을 배치하고 여분의 자투리에는 마루를 깔았습니다.

방, 좌우에 위치하며, 정면 마루 보다 낮아 딛고 마루에 올라 갈 수있는 기능적인 구조 입니다.

 

 

정면 마루로 오르내리는 귀마루 측면에 설치되어 있으며, 기능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측면 쪽마루

 

 

후면,툇마루

 

 

기둥위의 6개 추녀 결구

건축에 문외한이어서 답사 후 건축사인 대가야님에게 설명을 들었지만 지금은 머리가 하얀 상태입니다.

 

 

(동호회/남산아지매 사진)

 

 이 사진을 봐도 알듯 모를듯

 

주심도리에서 들보 위 중도리까지는 흙을 발라 마감한 연등 천정이며, 중도리 안쪽에는  빗반자, 그 안쪽에 우물반자를 하였습니다.

중도리,반자틀, 대공, 추녀, 고주의 결구 방식이 궁금합니다.

 

 

익공

익공이 내부에 위치한 결구도 처음 접한 듯 합니다.

 

 

온돌방 창살

띠살문 창살의 외여닫이문, 육각 빗살문 창살의 들어열개문

좌우가 비대칭인 분합문도 흔치 않은 것 같습니다

 

 

온돌방

천장 우물반자

 

 

귀래정

하루 종일 머물며 건축 전문가의 이야기를 들어도 지루하지 않을 것 같은 분위기의 건물이며, 지헌선생의 문집 지헌일고止軒逸稿를 설명해주실 인문학자와 함께라면 금상첨화 이겠지요.

 


중문

사랑채인 귀래정과 안채를 연결하는 출입문.

맞배지붕이 아닌데도 귀래정 후면에 걸린 방풍널이 이채롭습니다.

 

(동호회/남산아지매 사진)

 

안채

 

(동호회/남산아지매 사진)

 

행랑채
 

 

귀래정歸來亭의 유래가 된 도연명의 귀거래사의 싯구에는 귀래歸來 외에도 우리에게 익숙한 문장이 많이 있습니다.

향후 답사 길에 도움되길 바라면서 전문을 가져 옵니다

 

귀거래사(歸去來辭)...도연명(陶淵明)

 

歸去來兮 (귀거래혜) 돌아가리라

田園將蕪胡不歸 (전원장무호불귀) 전원이 장차 황폐해지거늘 어찌 돌아가지 않으리.

既自以心為形役 (기자이심위형역) 지금까지 마음 때문에 육신이 힘들었으니

奚惆悵而獨悲(해추창이독비) 어찌 근심하여 홀로 슬퍼하리오

悟已往之不諫(오이왕지불간) 지난 일은 돌이킬수 없으니

知來者之可追(지래자지가추) 다가올 일들을 생각하리라.

實迷途其未遠(실미도기미원) 길을 잃었으나 멀리 벗어나지는 않아서

覺今是而昨非(각금시이작비) 지금이 옳고 지난 일이 틀렸음을 깨달았네

舟搖搖以輕颺(주요요이경양) 배는 흔들흔들 가벼이 나아가고

風飄飄而吹衣(풍표표이취의) 바람은 살랑살랑 옷자락에 나부끼네

問征夫以前路(문정부이전로) 나그네에게 앞길을 물어보니

恨晨光之熹微(한신광지희미) 새벽 빛이 희미해서 알 수가 없다네.


乃瞻衡宇(내첨형우) 마침내 집이 보이자

栽欣載奔(재흔재분) 기뻐하며 달려가니

童僕歡迎(동복환영) 종아이는 반갑게 맞이하고

稚子候門(치자후문) 어린 자식은 문에서 기다리네

三徑就荒(삼경취황) 세 오솔길이 황폐해졌어도

松菊猶存(송국유존) 소나무와 국화는 여전하구나

攜幼入室(휴유입실) 아이 손을 잡고 방에 들어가니

有酒盈樽(유주영준) 술이 동이에 가득하네

引壺觴以自酌(인호상이자작) 동이를 당겨 술을 잔에 따라마시며

眄庭柯以怡顏(면정가이이안) 뜰의 나뭇가지를 보며 흐뭇이 웃음짓네

倚南窗以寄傲(의남창이기오) 남쪽 창가에 기대어 의기양양하니

審容膝之易安(심용슬지이안) 비좁은 집이지만 오히려 편안하네.

園日涉以成趣(원일섭이성취) 매일 뜰을 거닐으니 뜻을 이루었고

門雖設而常關(문수설이상관) 문을 항상 닫아놓고

策扶老以流憩(책부로이류게) 지팡이 짚어 돌아다니다 쉴 때

時翹首而遐觀(시교수이하관) 가끔 머리들어 멀리 바라보니

雲無心以出岫(운무심이출수) 구름은 무심히 산골짜기를 돌아나오고

鳥倦飛而知還(조권비이지환) 새는 날다가 지쳐 돌아올 줄을 아는구나

影翳翳以將入(영예예이장입) 저녁빛이 어두워지며 지려하는데

撫孤松而盤桓(무고송이반환) 외로운 소나무를 어루만지며 서성거리네.

歸去來兮(귀거래혜) 돌아가자!

請息交以絕遊(청식교이절유) 사람을 사귀지 않고 벗들도 멀리 하리라

世與我而相違(세여아이상위) 세상과 나는 서로 어긋나기만 했으니

復駕言兮焉求(복가언혜언구) 다시 벼슬에 올라 무엇을 구하겠는가

悅親戚之情話(열친척지정화) 친척들과 정다운 대화를 기뻐하고

樂琴書以消憂(락금서이소우) 거문고와 책을 벗하며 시름을 잊으리라

農人告餘以春兮(농인고여이춘혜) 농부가 봄이 왔다고 알려주면

將有事乎西疇(장유사호서주) 서쪽 밭으로 나가 일을 하거나

或命巾車(혹명건거) 혹 수레를 부르거나

或棹孤舟(혹도고주) 혹 외로운 배를 저어

既窈窕以尋壑(기요조이심학) 깊은 골짜기 시냇물을 찾아가기도 하고

亦崎嶇而經丘(역기구이경구) 험한 산넘어 언덕도 지나리라

木欣欣以向榮(목흔흔이향영) 나무들은 생기있게 무성히 자라고

泉涓涓而始流(천연연이시류) 샘은 졸졸 솟아 흐르니

羨萬物之得時(선만물지득시) 만물이 제때를 얻고 있음을 부러워하며

感吾生之行休(감오생지행휴) 인생이 멀지 않았음을 느끼네.


已矣乎(이의호) 끝이구나

寓形宇內復幾時(우형우내복기시) 이 몸이 세상에 남아있을 날이 그 얼마라고

何不委心任去留(하불위심임거류) 어찌 마음을 자연의 섭리에 맡기지 않으리

胡為惶惶欲何之(호위황황욕하지) 이제와 황망스럽게 무엇을 더 바라리오

富貴非吾願(부귀비오원) 부귀를 원치 않으며

帝鄉不可期(제향불가기) 신선세계도 기대하지 않네.

懷良辰以孤往(회량진이고왕) 좋은 때라 여겨지면 홀로 머물거나

或植杖而耘耔(혹식장이운자) 혹은 지팡이 세워놓고 김을 매고

登東皐以舒嘯(등동고이서소) 동쪽 언덕에 올라 휘바람 불고

臨清流而賦詩(임청류이부시) 맑은 개울가에 이르러 시를 짓네

聊乘化以歸盡(료승화이귀진) 그저 자연의 조화에 따라 돌아가고 마는 것인데

樂夫天命復奚疑(락부천명복해의) 주어진 천명을 즐길 뿐 무엇을 더 의심하리요.

 

2020.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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