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두리봉
오봉.도봉산. 인수봉
고소공포증 오늘은 전혀 느끼지 못했습니다.
1882년 박문호의 유백운동기에 "백운대 오르는 장면을 실감 있게 묘사한 글을 발췌하였습니다. 유백운대기(遊白雲臺記).박문호 임오년(1882년, 고종 19년)
"이어 민가를 빌려 자고 다음날 태고사(太古寺)를 거쳐, 용암사(龍巖寺)에 오르니, 바로 용롱봉(龍瀧峯)의 남쪽이다. 드디어 두 귀 사이로 나와서 나무꾼을 만나서, 앞에서 인도하게 하여 벼랑을 따라 동북쪽으로 가니 또 두 귀가 있는 곳을 만났다.
우림이, “여기가 백운대인가?”라고 하니, 나무꾼이, “맞습니다. 바로 용암봉과 백운대 사이입니다. 산이 도봉산 서쪽에서 오다가 한 번 솟아 용암봉이 되었으니, 이것이 남각(南角)입니다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만장(萬丈) 마을의 노래에 ‘나라를 진호(鎭護)하는 명산 만장봉〔國名山萬丈峯〕’이라 하니, 이것입니다. 삼면이 깎아 만든 듯한데, 동쪽에 흙이 꽤 얹혀 있어 초목이 자라고 있으므로 잡고 오를 수 있습니다. 서쪽은 노적봉이요, 남쪽으로 뻗은 것은 부악산과 인왕산 등 여러 산이 되었습니다. 두 번째 솟아 서북쪽으로 백운대가 되었으니, 이것이 중각(中角)입니다. 용암봉에 비해 더욱 험하니, 사면이 깎아 만든 듯한데, 위는 평평하고 흙이 얹혀 있는 곳이 거의 없습니다. 세 번째 솟아서 동북쪽으로 인수봉(仁壽峯)이 되었으니, 이것이 북각(北角)입니다. 백운대와 더불어 두 귀가 됩니다"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장차 백운대에 오르는데, 나무꾼이 앞에 서고, 우림이 그 다음에, 내가 또 그 다음에 서고, 운경이 뒤에 섰다. 백운봉 중간에 이르니, 가장 험한 곳이다. 세속에서는 ‘결단암(決斷巖)’이라고 부르니, 올라가는 자와 오르지 못하는 자가 이곳에서 결정된다고 한다. 드디어 옷과 삿갓, 신발, 버선을 벗고, 손발을 구멍 속에 넣고 기어서 나아갔다. 운경이 멈추고 오르지 못했다. 나무꾼이“원래 여기를 오르는 자들은 서넛에서 백십 명에 이르기까지 반드시 그중에 한 사람은 오르지 못하는 자가 있으니, 여기에서 옷가지를 지키는 자입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명산 정토(淨土)에서도 도둑에 대비해야 하는가라고 하였다 처음에 우림과 백운대에 오르기로 약속할 때는 호방하게 노래했는데, 이윽고 정신이 어질해져서 오래 머물 수 없었다. 낭선군(朗善君) 이우(李俁)가 통곡한 것은 다 까닭이 있었고, 무관(懋官) 이덕무(李德懋)가 백운대에 오르지 말라고 경계한 것은 그 또한 일찍이 이곳에 와본 적이 있어 징계한 것이었다.장차 내려가는데 누운 채 구멍에 수족을 넣고 조금씩 내려왔다. 이윽고 운경과 서로 붙잡고 크게 웃었다. 운경이, 금강산(金剛山)의 비로봉(毘盧峯)과 망군봉(望軍峯)도 이렇게 험하지는 않았다.”라고 하였다. 우림이,“송악산(松嶽山)과 천마산(天馬山)도 이곳에 비하면 도리어 평지이다.”라고 하였다. 내가“속리산의 문장대(文藏臺)와 관악산(冠岳山)의 연주대(戀主臺)도 이렇지 않다.”라고 하였다. 잠시 뒤에 어떤 사람이 혼자 가서 백운대를 올라가는데, 옷과 버선을 벗지 않고, 지팡이를 짚고 갔다. 그가 내려올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바라보던 자들은 발바닥이 모두 시큰하였다. “이는 필시 근심 걱정이 있어 죽고 싶어하는 자일 것이다.”라고 하였다.
우림이, “이는 반드시 용력(勇力)이 있는 자일 것이다.”라고 하였다.내가,“이는 반드시 범을 모르는 자이다. 어떤 범을 모르는 자가 산에 들어가 나무를 하다가 범을 만나서 죽였는데, 지나가던 사람이 ‘이것은 범이다.’라고 하니, 범을 죽인 자가 마침내 놀라 소리지르며 달아났다. 이는 반드시 백운대를 모르는 자일 것이다.” 라고 하였다.그가 내려오기를 기다렸다가 더불어 이야기했는데, 내가,“그대는 근심 걱정이 있는가?”라고 하니,
“처자를 막 잃고, 궁한 나머지 의지할 곳이 없어 죽고자 했으나 그러지 못했다.”라고 하였다. 운경이, “그대는 또한 용력(勇力)이 있는가?”라고 하니, 웃으며 답하지 않았다.우림이, “그대는 아까 올라간 곳이 어디인지 아는가?”라고 하니,“모른다.”라고 하였다. 세 사람이 마침내 서로 보면서 크게 웃고 구경을 마쳤다. 나무꾼이 인사하고 갔다.
백운대 최남선 문필
마모된 글씨도 있지만 원문을 다음에서 가져왔습니다. 네모서리에 경천애인敬天愛人이 새겨져 있으나 미처 사진에 담지 못했습니다.
獨立宣言記事(독립선언기사) 己未年 二月十日 朝鮮獨立宣言書 作成(기미년 2월10일 조선독립선언서 작성) 京城府 淸進町 六堂 崔南善 也(경성부 청진정 육당 최남선 야) 庚寅生 (경인생)
己未年 三月一日 塔洞公園 獨立宣言 萬歲導唱(기미년 3월1일 탑동공원 독립선언 만세도창) 海州 首陽山人 鄭在鎔 也(해주 수양산인 정재용 야) 丙戌生(무술생)
1919년 2월 20일 경성 청진정(지금의 청진동)의 최남선이 독립선언서를 작성하고, 1919년 3월 1일 해주 수양산 출신의 정재용이 탑동(지금의 탑골) 공원에서 독립만세를 선창하며 운동을 이끌었다는 내용입니다. 독립운동가인 정재용 선생이 3.1 운동의 역사적 사실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 1920년대 중후반에 직접 새긴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육당 최남선崔南善(1890.4.26 ~ 1957.10.10) "본관 동주(東州:鐵原), 호 육당(六堂), 자 공륙(公六), 아명 창흥(昌興), 세례명 베드로이다. 자습으로 한글을 깨쳐 1901년(광무 5)부터 《황성신문》에 투고했고 이듬해 경성학당에 입학하여 일본어를 배웠다. 1904년 황실유학생으로 소년반장(少年班長)이 되어, 도쿄[東京]부립중학에 입학했으나 3개월 만에 귀국했다. 1906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早稻田]대학 지리역사학과에 들어가 유학생회보 《대한흥학회보(大韓興學會報)》를 편집하면서 새로운 형식의 시와 시조를 발표했다.
1919년 3·1운동 때는 독립선언문을 기초하고 민족대표 48인 중의 한 사람으로 체포되어 2년 6개월형을 선고받았으나 다음해 가출옥했다. 1922년 동명사(東明社)를 설립, 주간지 《동명(東明)》을 발행하면서 국사연구에 전념했다. 1924년 《시대일보(時代日報)》를 창간, 사장에 취임했으나 곧 사임, 이듬해 《동아일보(東亞日報)》의 객원이 되어 사설을 썼다.
정재용鄭在鎔(1886.11.6 ~ 1976.12.31) " 1886년 11월 6일 황해도 해주(海州)에서 태어났으며, 경신중학교(儆新中學校)를 졸업하였다. 1910년 일제에게 국권을 빼앗긴 뒤, 1919년 3월 1일 파고다공원(지금의 탑골공원)에서 손병희(孫秉熙) 등의 민족대표와 박희도(朴熙道)·이갑성(李甲成) 등의 종교계 대표, 김원벽(金元璧)·강기덕(康基德) 등의 학생대표들이 모여 독립선언식을 거행할 것을 알고 약 5,000명의 학생들과 함께 참석하였다.
수많은 등산객이 배운대를 오르내리지만 암각문은 크게 관심가지지 않는 듯 합니다. 등산객의 발길을 피하기 위해 나무펜스를 들렀지만 애잔한 느낌 지울 수 없습니다. 자연 훼손도 예방할수 있는 방법을 강구 했으면 좋을 듯 합니다.
2019.10.18 |
'서울특별시 > 서울특별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서울...고려대박물관 옥상정원 (0) | 2019.11.11 |
---|---|
서울...신촌 부도 (0) | 2019.11.11 |
서울...북한산 인수봉 선각마애미륵 (0) | 2019.11.03 |
서울...도봉산 원통사. 마애부도 (0) | 2019.11.02 |
서울...도봉산 식당바위 마애부도 (0) | 2019.11.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