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통을 방불케는 요란스러움, 사찰순례단 관광버스를 피해 뛰어 올라가며 목장승의 검문을 통과했다. 사찰순례를 입으로 하는지 원!! 일요일 답사를 가능한 피하는 이유중의 하나가 호젓함을 앗아가는 분위기와 탑을 비롯 문화재를 상세히 보는 우리를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싫어서이다. 벽송사의 실질적 창건은 조선시대 중기인 1520년(중종 15) 벽송 지엄(碧松智嚴, 1464∼1534) 스님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1950년 6.25전쟁 때 인민군의 야전병원으로 사용되었고, 그 뒤 전쟁 중에 모든 건물이 불에 타 없어졌다. 1961년 원응(元應) 스님이 6.25 때 이곳에서 희생된 수많은 원혼들을 천도하고 민족통일을 위하여 벽송사를 중창하며 지금까지 40여 년 동안 주석하고 있다. 원응 스님은 10년 동안 『화엄경』 80권을 금니로 사경하여 2004년 6월 화엄경 금니 사경 전시회를 갖기도 했다고 한다. 벽송사 장승각에는 조선시대에 밤나무로 만든 한 쌍의 목장승이 있다. 여러번 답사기에서 언급했듯이 사찰 장승은 사악한 잡귀 출입 통제와 불법을 수호하는 신장상, 사찰경계 기능을 목적으로 조성한다. 벽송사 장승 2기는 2기는 금호장군과 호법대신으로, 금호장군은 1969년에 일어난 산불로 윗부분이 불에 타서 애처롭다. 오른편 호법대신은 대머리에 큰 눈이 돌출되었고 코는 뭉툭하며,입을 꽉 다물ㄱ었다. 턱에는 수염이 보인다.금호장군 파손이 심하지만 호법대신과 흡사한 모습이었을 것이다. 함양군 마천면이 변강쇠와 옹녀의 이야기를 담은 '가루지기 타령'의 안태고향이라 벽송사 장승은 오늘날 많은이에게 회자되고 있다. 가루지기 타령을 백과사전에서 옮겨온다. <변강쇠가〉·〈변강쇠타령〉·〈횡부가 橫負歌〉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현재 창으로 전승되지는 않지만, 송만재(宋晩載)가 1843년에 쓴 〈관우희 觀優戱〉와 이유원(李裕元)의 〈관극팔령 觀劇八令〉 가운데 칠언시로 기록되어 있어 그 내용을 짐작할 수 있다. 특히 이 작품은 실전(失傳) 판소리 일곱 마당 가운데 유일하게 신재효에 의해 판소리 사설로 정착된 작품이기 때문에 실전 판소리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이용되고 있다. 신재효가 사설로 정착시킨 시기는 작품 중의 '신사년괴역'(辛巳年怪疫)이란 구절을 통해 신사년(1881) 이후로 추정되고, 또한 조선 말기의 명창 송흥록·장자백 등이 잘 불렀다는 기록이 있어 적어도 19세기말까지 연행되다가 20세기 이후 판소리의 전승과정에서 소리의 맥이 끊겼음을 확인할 수 있다. 최근 박동진(朴東鎭)이 신재효 사설을 바탕으로 소리를 재현하여 가끔 부르고 있다. 그 내용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전반부는 평안도의 음녀(淫女) 옹녀와 삼남(三南)의 잡놈 변강쇠가 청석골에서 서로 만나 함께 사는 내용이다. 옹녀는 여러 도회지를 전전하며 들병장사, 막장사 등으로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노력하는데, 강쇠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온갖 못된 짓을 저지른다. 이에 옹녀는 강쇠를 달래 지리산으로 옮겨 살게 되었는데, 어느날 강쇠가 땔감으로 장승을 베어다 때어 장승 동티로 죽게 된다.
후반부는 이렇게 죽은 강쇠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 시신을 치우는 과정이 복잡하게 전개된다. 결국 뎁득이가 강쇠의 상을 치르는 것으로 끝맺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등장하는 많은 인물, 특히 사당패·풍각쟁이패·초라니 등 유랑연예인의 등장과 그들의 놀이 모습은 조선 후기 하층민간생활의 일면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이 작품은 단순히 음란한 성에 대한 경계에 그치는 것이라기보다, 하층유랑민의 비극적 생활상이 광대들의 자술적 전기와 결부되어 있다는 점에서 문학사적 의의가 있다. 19세기 농촌공동체의 경제적 분화과정에서 발생한 유민층이 농촌공동체를 지키고자 했던 집단에 의해 패배해간 사회적 현실이 잘 반영되어 있다.
불사중인 벽송사. 전각은 물론 부처님도 뵙지 못했다. 요즈음 지자체의 전시행정이 난무하고, 돈으로 떡칠하는 소모성 축제와 일과성 감각적인 오락위주 놀이문화가 만연하는 트렌드에서 지리산 자락 소읍 함양군이 변강쇠와 옹녀 부부가 살던 곳이 함양이라고 주장하며 가루지기타령의 안태고향을 입증하려는 노력을 다른 지자체는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한다. 관련기사를 옮겨온다.
신재효의 여섯 마당 판소리 중 가루지기타령(일명 변강쇠가)은 사설에는 들어있으나 실제 창으로는 전수되지 못하고 구비문학의 하나로 전해지고 있다. 이 가루지기타령의 주인공 변강쇠와 옹녀 부부가 살던 곳이 함양이라는 증거를 잡았다는 것이다.
함양군 기획감사실(박영일 실장)은 성두본 변강쇠가를 분석, 지정학적인 위치가 함양군 휴천면과 마천면의 경계인 오도재 일대라는 결론을 내렸다. 변강쇠와 옹녀는 개성 청석관에서 만나 도방살이(도회지 삶)를 하게 되며, 옹녀는 소박한 가정을 꾸미기 위해 들기름장사 등 행상을 하나, 천하잡놈 변강쇠가 살림을 돌보는 것이 아니라 늘 술타령을 하고 싸움질 하고 강간을 일삼아 정상적인 가정생활이 어렵다.
이에 땅이 순후하고 생리가 좋다는 지리산을 찾아오게 된다. '지리산중을 찾아가니 첩첩한 깊은 골에 빈집 한 채 서 있으되, 임진왜란 8년 동안 어떤 부자가 피난하여 이집을 지었는지 오간팔작 기와집이 다시 사람 살 일 없고 흉가로 비어있어서 누백년 도깨비 동청이요, 묏귀신의 사랑(舍廊)이라'.
변강쇠 부부가 산속의 빈 기와집에 들어가 살게 될 집에 대한 표현이다. 군은 '누백년 도깨비 동청'과 '묏귀신의 사랑'은 다름 아닌 오도재의 산신각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 산신각은 천수백년 전부터 오도재 정상에 있었던 것으로, 70여 년 전에 허물어져 터만 남아있던 것을 지난해 복원했다.
또 군은 이외에도 변강쇠전의 배경이 함양군이라는 근거로 변강쇠가 나무하러 가면서 '등구 마천 백모촌'의 초군들을 만나게 된다는 내용을 들고 있다. 이들 지역은 1914년 행정구역이 통폐합되기 전 오늘날 함양군 마천면을 지칭한 것으로 '등구'는 오늘날 함양군 마천면 등구마을 일대를 지칭하고, '마천'은 오늘날 함양군 마천면 덕전리 가흥리 군자리 일대를 말하며, '백모촌'은 마천면 백무동의 옛 명칭이라는 것이다.
또 변강쇠가 나무는 하지 않고 나무 대용으로 장승을 뽑게 되는데, 그 장승이 서있던 곳이 '등구마천 가는 길'에 서있던 장승이며 그 장승은 변강쇠에게 불 태워지게 되자 억울한 귀신이 돼 대방전 장승(인간세계의 임금에 해당됨)에 변강쇠의 악행을 고하면서 자신의 신분을 밝히게 되는데, 성두본 원문에 '소장(小將)은 경상도 함양군에 산로(山路) 지킨 장승'이라고 구체적으로 제시돼 있다.
변강쇠가 불로 땐 그 장승의 신분은 함양군의 산로를 지키는 장승, 즉 함양군의 지리산 가는 길을 지키는 장승임을 밝히고 있다. 이 밖에도 변강쇠전에 등장하는 초군들이 부르는 노래 속에 '저 건너 행화촌'이 나오는데, 오늘날 살구징이라고도 불리는 행화동을 일컫는 것으로 오도재 정상으로부터 600여 m 아래에 실존하는 마을이다.
박 실장은 "변강쇠전은 인문학적으로 소중한 함양군의 지적 재산"이라면서 "앞으로 변강쇠를 모티브로 한 다양한 문화관광, 식료품 관련 사업들을 펼칠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가운데 함양군은 지리산조망공원내 성문화공원을 만들어 변강쇠를 테마로 한 장승을 비롯한 성문화 시설물을 선보였다. 조선시대 석종형 부도. 옛부터 최근의 민족 상잔의 6.25까지 슬픈 역사를 품고 서 있다. 더이상 동족간에 피를 흘리는 아픔은 사라지기를 간절히 기원하면서... 벽송사 삼층석탑. 신라석탑을 계승한 조선초의 탑으로 알려져 있지만 아직도 의견이 분분한 석탑이라고 한다. 2기단이며, 하기단에는 우주,탱주가 얕게 새겨져 있다. 지대석과 하기단 가운데에 별석이 끼워져 있고, 몸돌에도 우주를 새겼다. 추녀는 얇고 반듯하며 반전은 희미하지만 지붕돌은 경사가 급하며 모서리는 완만하게 반전 되었다. 지붕돌 받침은 1·2층이 2단, 3층이 3단이다. 상륜에는 노반, 복발만 남아 있다. 석탑 앞 곧게 자란 소나무가 미인송이다.미인송에 기원하면 미인이 된다는 말이 전해 내려오고 있으며, 굽은 소나무는 도인송으로 불리워지며 도인송에 기원하여 기운을 받으면 건강을 이룬다고 한다. 미인송과 도인송은 우리에게 말없이 가르침을 나누어 주신듯 하다. 아름다워야지 아무렴 아름다워야 하고말고 하지만 곡즉전(曲則全) 곡즉전(曲則全) 곡즉전(曲則全)...... 2008.04.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