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남도/창녕군

창녕...옥천사지 석탑부재

임병기(선과) 2019. 9. 24. 0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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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사지 석축

 

옥천사

창건과 폐사에 관한 기록은 전하지 않지만, 사지에 남아 있는 석탑 부재로 미루어 고려초기 이전에 세워진 사찰로 생각됩니다.

이후 고려 후기 공민왕대의 승려인 신돈따(?~l37l) 어머니가  옥천사의 종이 었고 신돈은 옥천사에서 출가 하였다고 합니다. 따라서 고려후기에도 향화를 피웠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신동국여지승람에는 신돈의 죽음과 함께  사찰이 폐사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고 합니다.

 

옥천사가 신라말 화엄십찰華嚴十刹은 아니었을까요?

 

화엄십찰華嚴十刹

의상(義湘)의 화엄전교와 관련이 있기 때문에 의상화엄전교십찰(義湘華嚴傳敎十刹)이라고도 한다. 의상이 화엄교학을 전파한 사찰이 열 곳이라 하는데, 그 이름은 기록에 따라 차이가 있다.

 

『삼국유사』 의상전교조(義湘傳敎條)에는 6개 사찰이 기록되어 있으며, 최치원(崔致遠)이 찬술한 「법장화상전 法藏和尙傳」의 주(註)에는 10찰의 명칭이 기록되어 있으나 서로 일치되지 않는 것이 있다.

 

『삼국유사』에 수록된 6개 사찰은 ① 태백산의 부석사(浮石寺), ② 원주의 비마라사(毘摩羅寺), ③ 가야산의 해인사(海印寺), ④ 비슬산의 옥천사(玉泉寺), ⑤ 금정산의 범어사(梵魚寺), ⑥남악南岳의 화엄사(華嚴寺) 등이다.

 

「법장화상전」에 실린 10개 사찰은 ① 중악공산(中岳公山)의 미리사(美理寺), ② 남악 지리산의 화엄사, ③ 북악 부석사, ④ 강주(康州) 가야산 해인사 및 보광사(普光寺), ⑤ 웅주(熊州) 가야협(迦耶峽) 보원사(普願寺), ⑥ 계룡산 갑사(岬寺), ⑦ 낭주(良州) 금정산 범어사, ⑧ 비슬산 옥천사, ⑨ 전주 무산[母山] 국신사(國神寺), ⑩ 한주(漢州)빈아산(貧兒山)청담사(淸潭寺) 등이다.

 

신돈(?~1371)

"본관은 영산(). 승명()은 편조(), 자는 요공(耀). 공민왕이 내린 법호()로 청한거사()가 있다. ‘신돈()’은 집권 후에 정한 속명이다. 아버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알려진 것이 없고 영산에 무덤이 있었다는 것만이 확인될 뿐이며, 어머니는 계성현()옥천사()의 비()였다.

 

어려서 승려가 되었지만 모계의 천한 신분 때문에 주위의 용납을 받지 못하고 늘 산방()에 거처하였다. 1358년(공민왕 7) 공민왕의 측근인 김원명()의 소개로 공민왕을 처음 만나게 되어 궁중에 드나들기 시작하였다. 공민왕 자신이 독실하게 불교를 받들었고, 신돈 또한 총명하여 왕에게 두터운 신망을 얻었다고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나라를 어지럽힐 자는 반드시 이 중놈일 것이다.”라는 비난도 있었고, 심지어 정세운()은 신돈을 요승()이라 하여 죽이려고까지 했으므로 왕이 피신시키기도 하였다.

 

따라서 신돈을 배척하던 인물들이 사라진 뒤에야 정치 표면에 나설 수 있게 되었다. 1364년(공민왕 13) 두타승()이 되어 공민왕을 찾아뵙고 비로소 궁 안에 들어와 권세를 부리게 되었다. 이 때 왕으로부터 청한거사라는 호를 받고 사부()가 되어 국정을 자문했는데, 왕이 따르지 않는 일이 없었으며 그로 인해 많은 추종자가 생기게 되었다.

 

마침내 1365년(공민왕 14) 5월 최영()을 비롯해 이인복()·이구수() 등을 제거하면서 세력을 쌓았으며, 같은 해 7월에는 진평후()에 봉해진 뒤 수정이순논도섭리보세공신 벽상삼한삼중대광 영도첨의사사사 판중방감찰사사 취산부원군 제조승록사사 겸판서운관사(使調錄)에 이르렀다.

 

신돈이 이렇게 등용된 배경은, 벌족(: 나라에 공이 많고 벼슬 경력이 많은 집안) 세신()은 친당()의 뿌리가 서로 얽혀 있었고, 신진()은 이름을 낚으며, 유생은 여리고 나약해 굳세고 용맹스러운 기질이 적은 데 비해, 신돈은 도()를 얻고 욕심이 적으며 미천해 친당이 없으므로 큰일을 맡겨도 소신껏 국정을 살필 수 있을 것이라는 개혁 지향적인 공민왕의 판단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러므로 신돈의 등용을 공민왕이 노국대장공주()의 죽음으로 실의에 빠져 저지른 실정으로 보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고 볼 수 있다.

 

신돈이 영도첨의사사(使)가 된 뒤 강력한 권력을 장악하게 되자, 중국에서는 권왕()으로 알려졌고 백관들에게는 영공()으로 불려졌다. 인사권을 포함한 광범위한 내외의 권력을 총관했을 뿐만 아니라 왕을 대신해 백관들의 조하(: 조정에 나아가 임금에게 하례하는 것)를 받고, 출입할 때는 의위()가 왕의 승여(輿)와 비슷할 정도의 권위를 가졌다. 그러나 이러한 권력과 지위는 왕권의 의탁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을 뿐 신돈이 독자적인 세력 기반을 구축했던 것 같지는 않다. 또한 신분적 제약과 불확실한 수도 과정에 비추어 볼 때 불교계에도 지지 기반을 가질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영향력이 컸던 고승 보우()로부터는 사승()으로 지목받기도 했다.

 

신돈의 집권 기간 동안 이루어진 시책으로는 전민변정도감()의 설치와 각종 활동을 통한 개혁적인 정책을 들 수 있다. 1366년(공민왕 15) 5월에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하게 하고 스스로 판사()가 되어, 부당하게 빼앗긴 토지와 강압에 의해 노비가 된 백성들을 원래의 상태로 되돌려 놓는 과감한 개혁을 단행하였다. 그 결과 권문세가()들이 탈점했던 토지를 원래의 주인에게 돌려준 경우가 많아 “성인()이 나타났다”라는 찬양을 받기까지 하였다.

 

1367년(공민왕 16) 숭문관() 옛 터에 성균관()을 지을 때, 직접 그 터를 살피고 “문선왕(: )은 천하 만세의 스승이다”라고 하면서 문신들이 품질()에 따라 포()를 내 추진하는 이 사업에 적극성을 보여 마침내 성균관이 완성됨으로써 유술()을 중흥시키려는 공민왕의 의욕에 부응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에 『도선비기()』를 근거로 왕에게 천도()할 것을 건의하고 스스로 평양에 가서 상지(: 땅의 생김새를 살펴보고 길흉을 판단하는 일)까지 했지만 실현되지는 않았다.

 

이 밖에도 신돈이 추진했던 것이 내재추()의 신설, 관리의 근무일수에 따른 순자격제()의 실시, 과거() 운용에서의 친시()와 관련된 것과 국방()에 관련된 것 등이 있었다. 예컨대, 내재추는 선발된 일부 재신()과 추밀()이 궁중에서 나라의 중대한 일을 처리하도록 한 변칙적인 제도였는데, 권문세족이 중심이 된 도평의사사(使)의 확대에 따른 왕권의 약화를 만회할 수 있는 기구라는 데 의의가 있었다. 순자격제는 품계 및 연한과 경력에 따라 관직을 승진시키는 인사 법규였다. 홍건적의 침입과 흥왕사()의 난 이후 무장세력들이 군공()으로 급속히 성장하게 됨에 따라 관료체계 상의 불균형을 초래하고 정상적인 국왕 중심의 권력질서 확립을 저해하였다. 따라서 순자격제는 개인의 능력차를 인정하지 않고 단지 근무 일수를 진급 기준으로 삼는 군공 중심의 평가를 지양하면서 무장세력들을 견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신돈의 등용은 처음부터 많은 물의가 있었다. 일찍이 이제현()이 신돈의 골상()은 옛날 흉인()의 것과 같아 후환을 끼칠 것이라 해 왕에게 가까이 하지 말 것을 요청한 적이 있었으며, 1366년(공민왕 15)에 간관 정추()와 이존오() 등이 탄핵을 하다가 도리어 폄축()을 당하기도 하였다. 또 1367년 10월에는 오인택()·경천흥()·김원명 등이 그를 제거하려고 몰래 의논하다가 발각되어 장류()를 당했으며, 1368년 10월에도 김정()·김흥조()·김제안() 등이 신돈을 죽일 것을 모의하다가 계획이 누설되어 장류되던 도중에 살해당하였다. 이 시기 공민왕을 대신하여 정국을 주도하던 신돈에게 1369년(공민왕 18)경부터 전개된 국내외 정세의 변화는 정치적으로 불리한 상황에 놓이게 하였다. 국내적으로는 노국대장공주의 영전(殿) 사업 강행으로 국가재정의 궁핍과 이때 발생한 기근은 일반 민의 곤궁화를 초래하고 있었다.

 

한편, 거주하던 기현()의 집에서 독립한 1367년부터는 처첩을 거느리며 아이를 낳고 주색에 빠져 비난이 높아졌다. 이러한 가운데 1369년 스스로 5도의 도사심관()이 되려고 사심관을 부활시키려다가 좌절되었다. 이는 그가 자신의 세력 기반을 확립시키려고 시도했던 일로 보인다. 1370년 10월에는 그 동안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 있던 공민왕이 친정()할 뜻을 밝히고, 1371년 7월 마침내 역모를 꾀한다는 혐의로 붙잡혀 수원에 유배되었다가 일당 기현·이춘부()·이운목() 등과 함께 죽임을 당했다."

(네이브 지식백과에서 발췌)

 

 

관룡사로 향하는 도로변에 위치한 사지는 대부분 훼손되었으나, 대형 석축과 폐사 후 사지 건물 부재, 민묘 축대로 활용된 석재가 널리 산포하며, 많은 수의 석탑, 석등, 고맥이 등이 널부르져 있습니다.

 

 

상층기단면석 4매

축대로 사용된 듯 합니다.

 

 

 

 

 

석탑 하층기단

문화재청 한국의 사지에는 대좌 부재로 기록

 

 

용도가 불분명한 석재

 

 

민묘

사지 맨 위에 위치

 

 

민묘 석축

 

 

하층기단

저석과 중석이 일석 입니다.

 

 

 

석등 옥개석

사역 중심(?)을 면석 4매가 있는 곳으로 기준삼으면

 

중심 아래 축대에 끼여 있습니다.

 

 

석불대좌

하대석과 중대석 받침이 일석인 부재로 보았는데

문화재청 한국의 사지에는 석등 기단부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옥개석

4개 옥개석 층급받침

절수구를 표현했습니다.

 

 

 

 

낙수면 물매가 급하고

2단 각형 탑신굄을 조출하였습니다.

 

 

기단갑석

각호각 3단 굄이 있습니다.

 

 

 

상층기단 갑석

부연이 보입니다.

 

 

 

 

석축

중심석축 향 우측 계곡부에 위치

 

 

옥개석

 

 

 

치석재

 

 

기단갑석

 

 

옥개석

뒤집힌 상부에 찰주공이 잇는 3층 옥개석입니다.

 

 

찰주공(1)

 

 

 

옥개석

상부에 찰주공(2)이 남아 있습니다.

 

 

옥천사지

산포한 석탑부재는 최소 2기 이상의 석탑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쌍탑 도는 각기 다른 전각 앞에 세워진 석탑이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옥개석 층급 받침, 탑신괴임,기단부재 등으로 미루어 고려전기 이전의 석탑으로 추정 됩니다.

 

따라서 옥천사지는 고려전기 이전에 창건되어 최소한 고려말까지 운영되었던 사찰로 추정되며, 의상의 화엄십찰의 하나인 비슬산 옥천사이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물론 근거 없는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천년학소.오종식님 사진)

 

그나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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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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