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북도/정읍시

정읍...보화리 석불입상

임병기(선과) 2019. 9. 3. 06:54
728x90

 

 

 

동선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지만 문화재 이정표를 따라 찾았습니다.

마지막으로 뵌지가 10년이 넘었습니다.


옛글(2018년 10월)로 대신 합니다.


 

 

광배,불신,대좌가 일석


민머리에 높은 육계

석불 입상에서 우견편단의 법의는 거의 최초 작례?


민초들에게 돌려준 눈,코,입


흔치 않은 백제 석불로 전합니다.


 

 

 

 

  

 

 

 

 

 

 

 

 

 

 

 

2019.08.16 

 

아래는

2008년 글

 

보화리 석불 입상 전각

 

백양사를 거쳐 백제 석불로 알려진 보화리로 달려왔다. 여전히 안개가 짙어 묘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나무와 불상의 어울림으로 미루어 미륵불로 당산으로 추앙받았겠다.

 

길을 계속해가면 마을이 나온다. 이마을에서 유년을 보낸 사람들은 얼마나 좋을까? 고향. 그 고향 생각하면 이불상이 떠오르지 않을지...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야산 중턱에 나란히 서 있는 2구의 석불입상. 오른쪽 불상이 약간 커서 원래는 삼존불로 조성되었으나  좌협시불이 망실되었거나, 또는 서로 떨어져 있던 불상을 한 곳으로 모셨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불입불상은 유례가 없기 때문에 여러 추측을 낳게 한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머리는 소발에 육계가 있는 오른쪽 큰 불상은 광배가 깨어지고 대좌 아랫부분을 잃어버린 외에는 완전해보이며, 두 눈을 민초들에게 바쳤지만 얼굴은 부드럽고 우아하며 넉넉하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법의는  우견편단으로 승각기도 갖추었다.  전체적으로 부드럽다는 느낌이 든다. 오른손은 아래로 내리고 있으나 파손되었고, 왼손은 여원인 수인이다.

 

신라불상에서는 우견편단이 통일신라 이후 나타나는 형식으로 알고 있는데 잘못 인지하고 있는건가?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오른쪽 불상은 오른팔이 잘려 나갔다. 전체적으로 왼쪽 불상과 비슷하지만 애기부처 처럼 앳띠 보인다.

 

단독불을 모셔온 것 보다는 삼존불의 협시불에 비중을 두고 싶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역시 부드럽지 않은가?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백제 시대에는 많은 인파가 오고가는 이동로에 위치 했겠지만 이제는 가끔씩 찾아드는 객이 반가운 모양이다.

 

떠나려는 사람에게 자꾸만 말을 걸어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더라.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듯하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탑동(후지리)비로자나불좌상

 

어제 오후에 찾았으나 헤매이다가 인연이 아닌 듯 싶어 포기했었다. 오늘 아침 해정사 탑을 만나러가다가 입간판을 만나 묘한 인연에 감사했다. 어지간한 인내심 없이는 찾기 어려운 불상이다. 물어물어 도착하여 뵙는 순간 모골이 송연해지고 전율을 느꼈다. 글을 올리는 지금도 같은 심정이다.

 

나도 몰래 삼배를 올리고도 이해할 수 없었다. 지금까지 많은 불상, 파불을 보았지만 이렇게 가슴에 와닿는 아니 가슴을 파고드는 불상은 처음이라 작은 소원을 빌고 빌었다. 분명 들어주실 비로자나불이라는 믿음이 짙게 들었기 때문이다. 무엇 때문일까? 데쟈뷰? 뷰자데?

 

"탑동부락에도 탑(塔) 상(像)의 불적(佛蹟)이 남아 있는데, 「고적자료(古蹟資料)」에 의하면 "고부면(古阜面) 용흥리탑동(龍興里塔洞) 동방 50간(東方 50間) 산록(山麓)에 탑대석(塔臺石)이 있으며, 지중(地中)에 매몰된 2.6척의 석불좌상이 있다."고 하였다. 석불은 좌상(坐像)으로서 중대간석(中臺竿石)을 결실한 좌대위에 안치되어 있다. 불상은 마모가 심하나 좌대의 조각은 선명하다. 불상은 높이 96㎝이며, 결가부좌(結跏趺坐)한 무릎너비는 70㎝, 어깨너비 47㎝인데, 법의는 통견의 (通肩衣)이나 의습(衣褶)은 마멸되어 분명하지 않다. 양손은 가슴앞에 모아 「지권인(智拳印)」을 짓고 있어 비로자나불(毘盧자那佛) 임이 분명하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대좌(臺座)는 가로 115㎝, 세로 97㎝, 높이 17㎝의 방형지대석(方形地臺石) 위에 하대석(下臺石)이 놓였고, 그 위에 상대석(上臺石)을 얹었는데, 하대석의 하반(下半)은 방형기단(方形基壇) 사측면(四側面)에 2개씩의 눈모양을 새기고, 상부는 팔엽복판의 복연(伏蓮)이 방형(方形)으로 조각되었으며, 상면에는 일변 18㎝의 팔각중대석(八角中臺石) 괴임이 2단(二段)으로 각출되어 중대석은 팔각주형(八角柱形)임을 알 수 있다.

 

하대석의 높이는 35㎝이다. 상대석 역시 방형이며, 하부에 팔엽복판(八葉複瓣)의 앙연(仰蓮)을 조각하였으나, 부피는 얕아서 높이 18㎝에 불과하다. 방형좌(方形座)는 가로 91㎝ 세로 77㎝인데, 상면 뒤쪽에 13x11㎝, 깊이 8㎝의 각진 구멍 2개가 있다. 이는 광배(光背)와 중대석만 있다면 완전한 것이다. 연화문(蓮花紋)과 안상수법(眼象手法)으로 보아 고려초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이불상은 넘어졌던 불상을 다시 모시면서 잘못 모셨다. 사진에 보이는대로 방형홈은 누가보아도 광배를 꼽았던 흔적이다. 그렇다면 두가지 추측을 낳게한다.  좌대 방향이 맞다면 불상을 돌려야하고, 불상 방향이 맞다면 좌대를 돌려야 한다.

 

현재 무너진 석탑 부재가 제위치라면(그럴 가능성은 없다. 더 떨어졌을 것이다)  좌대를 돌려야 하겠지만, 불상이 산을 바라 보게되어 확신이 없다. 불상이 산을 바라보는 예가 왕왕 있지만 개인적인 견해로는 불상을 돌려 앉혀 마을을 향하도록 하는 것이 옳다는 믿음이다.

 

비로자나불상 오른쪽 어깨가 일부 잘려 나갔다. 그래서 정면에서 보면 어깨가 처진 모습이다. 참 이상도 하다. 근래에 까지 내사진을 보면 오른쪽 어깨가 처쳐있었다. 무슨 조화인지 지금도 비로자나불이 눈에 선하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석탑 부재가 어지럽다. 배례석으로 자리한 몸돌에는 사리공도 보인다.

 

 

알 수 없다.

 

정말 알 수 없다.

 

분명 전생에 나와 인연을 맺었던 비로자나불이라 믿고 싶다.

 

작은 소원이 이뤄지는 날 가족 모두 함께 다녀가야겠다.

 

()()()

 

2008.10.04

 

* 인용 부분은 정읍시청에서 가져왔습니다.

728x90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