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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장성군

장성...백양사 운문암 부도

by 임병기(선과) 2019. 8.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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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문암

"고불총림 백양사의 선원으로 운문선원이 있다. 백양사가 창건될 즈음에 함께 세워졌다는 이야기가 전해오나 그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다. 백암산 꼭대기인 상왕봉에 자리한 운문암은 조선시대의 벽송, 정관, 백파스님으로부터 근대의 학명, 용성, 인곡, 석전, 만암, 고암, 그리고 서옹스님에 이르기 까지 많은 큰 스님들이 머물렀던 곳으로 이 나라 선불교의 법통을 이어온 큰스님들이 주석하여 수행과 교화를 하였던 참선도량의 전통을 이어 오고 있다. 지금도 선방스님들이 여름, 겨울 안거 정진 때 최고의 선도량인 운문암을 앞 다투어 찾아들고 있다.


선객이라면 한 철 공부하고 싶어하는 참선수행 도량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운문암 앞에서 멀리 보이는 많은 능선은 200봉의 군신들이 머리를 보아리고 있는 모습이고 맑은 날에는 광주 무등산이 잘 보인다. 아침에 구름이 끼면 저 산 밑에서 구름이 머물러 운문암이라 한다.(구름이 문을 만들다)"(백양사 홈페이지)

 

 

운문암 雲門庵

산아래에 구름이 끼면 구름이 문을 만드는 암자라고 해석하지만, 우리가 모르는 더 깊은 뜻이 있겠지요?


구름같은 글씨는 서옹스님의 작품입니다.


서옹翁西스님 행장(출처:백양사 홈)


서옹대종사께서는 1912년 충남 논산시 송정리에서 속성은 전주 이씨, 속명은 상순으로 부친 이범제 거사님과 모친 김지정 보살님의 외동아들로 태어 나셨다.


품 벼슬인 중추원 의관을 지내신 성품이 청렴하고 고매한 조부 이창진옹 으로부터 한학을 배웠다. 어려서부터 스님의 영민함은 할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함은 물론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이때 받은 훈육은 훗날 대종사께서 선교를 겸수한 가운데 맑고 단아한 인품을 지니는 토대가 되었다.


연산공립보통학교 4학년 재학 중에 집안이 서울로 올라오매 영민한 스님은 5학년 때 월반 시험을 치러 양정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 17세 때 조부님과 모친께서 돌아가시자 슬픔을 다스리며 불교서적을 읽다가 무아사상에 마음이 끌렸다. 부처님의 가르침 속에 그간 고뇌하던 인생의 모든 문제에 대한 해답이 있음을 알고 불교에 깊이 빠져들었다.


불교를 알기 위해 각황사(지금의 조계사)를 찾아 중앙포교사로 계시던 대은스님을 만나 만암스님을 소개받고 만암스님께 출가할 것을 약속하고 1932년 21세의 나이로 중앙불교전문대학교에 진학했다. 그해 7월 백양사에서 만암 스님을 은사로 모시고 석호(石虎)라는 법명을 받아 계를 받고 수행과 학업을 겸비하게 되었다.


24세 되던 1935년 중앙불교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백양사 강원에서 잠시 영어강사를 하다 2년 뒤에 오대산 한암 스님 회상에서 본격적인 수선납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두 하안거를 성만하신 서옹 스님께선 선의 실수 못지않게 선 이론의 체계적 연구가 겸수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굳히고 28세 때인 1938년 일본 선학의 명문인 교토의 임제대학으로 유학을 떠나셨다.


서옹스님은 임제대학 재학 중 선 철학의 세계적 권위자인 히사마쓰 신이찌 박사(당시 경도대학 교수)를 만나 마음과 대화를 통하는 도반이 되어 깊은 학문적 교류를 나누셨다. 2년간의 대학생활을 마칠 때 ‘진실자기(眞實自己)’라는 졸업 논문으로 당시 일본 불교학계를 주름잡던 니시타 기타로, 다나베 하지메 등 교토학파를 대표하는 학자들의 학설을 비판, 일본 불교학계에 큰 화제를 몰고 왔다. 실참을 겸하여 지성을 갖춘 선지식으로 평가받은 스님의 졸업논문은 후에 일본 여러 대학에서 교재로 쓰이게 되었다.


대학을 마친 서옹 스님은 일본 임제종 총본산인 묘심사에서 선 수행을 해보고자 혹독하기로 유명한 임제종 선원 입방식에 응시하여 힘든 과정을 불과 이틀 만에 통과하고 참선수행에 있어서도 일대 조사의 풍모를 보이자 일본인들은 서옹 스님을 부처님처럼 여기며 여불(如佛)이라고 불렀다. 스님께선 묘심사 선원에서 3년 안거를 성만하신 1944년 33세에 고국으로 돌아오셨다.


귀국 후에도 더욱 정진하시며 잠시 백양사에 머무시다 전국 각처의 선원에서 수행에 전념하셨다. 1956년에는 백양사 선원에서 안거에 들어 정진하셨고 만암 스님께서 서옹 스님에게 전법게를 남기어 법을 이으신 후에도 정암사, 해인사 선원에서 수행하시니 수행납자로서 경향 각지에 그 이름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


1962년 대흥사 주지를 맡으셨고,동국대학교 대학 선원장 겸 조실을 맡아 높은 학덕으로 불법의 오의를 밝히고 후학을 양성하는데도 선구자의 역활을 다하셨다.


제방선원을 찾아 운수행각을 통해 정안(正顔)을 활개한 조사가풍을 진작시킨 서옹 스님께서는 임제의 맥을 잇는 정통 간화선 수행법을 한국불교의 보편적 수행법으로 정착시키어 수 많은 후학들의 바른 길잡이가 되셨다.


1964년 도봉산 천축사 무문관이 세워지자 초대 조실로 모셔짐으로써 후학들에게 회향하고 나누는 스승의 길로 나서시게 된다. 그 후 동화사, 백양사, 봉암사 선원조실을 역임(無門關, 桐華寺, 白羊寺, 鳳岩寺, 禪院祖室) 하셨다.


서옹 스님께서 1974년 효봉, 청담, 고암 스님에 이어 대한불교조계종 제5대 종정으로 추대되셨다. 종정으로 계시던 시절 ‘부처님 오신날’이 공휴일로 제정된 것은 불자들의 오랜 숙원이 이루어진 일이라 하겠다.


1979년에는 백양사 운문선원 조실로 추대되어 다시 수좌들의 선 수행을 지도하시는 등 수행의 본래 자리로 돌아오셨다.

스님께서는 한국이 조사선 가풍을 재정립하고 수행전통을 사회화하기 위해 1995년 “참사람 결사 운동”을 전개하셨다. 이 운동을 수행문화 운동으로 확산시키기 위해 1998년 백양사에서 한암 스님 이후 86년 만에 처음으로 무차대법회를 열어 세계적 불교 석학과 수행자들에게 현대문명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으로써 ‘참사람주의“를 제창하셨다.


스님께서 말씀 하신 참사람은 임제선사의 무위진인(無位眞人)을 창조적으로 해석하여 현대적 생명력을 불어 넣은 것으로 참사람을 “자각한 사람의 참모습”이라고 정의하고 이렇게 부연하셨다.”


‘참사람은 유물에도 유심(唯心)에도 무의식에도 하느님에도 불조(佛祖)에도 구속받지 아니하며 전연 상(相)이 없이 일체상을 현성(現成)하나니, 현성함으로써 현성한 것에나 현성하는 자체에도 걸리지 아니하여 공간적으로는 광대무변한 세계를 형성하고 시간적으로는 영원 무한한 역사를 창조하는 절대주체의 자각(自覺)이란 것이다.’


또한 스님께선 사회참여와 자비의 실천에도 앞장서셨다. 국가경제가 위기에 처한 IMF 때에는 ‘나라가 망하는데 수행자들이 가만히 있어서 되겠냐’고 꾸짖고 백양사를 개방하여 실직자들이 자기 성찰의 기회로 삼을 수 있도록 해주기 위해 “단기출가 수련회”를 만들어 주시기도 하셨다.


서옹 스님께선 고령에 이르러서도 형형한 안광과 카랑카랑 맑은 사자후로 여전히 대중에게 벽암록을 제창하시고 참사람 결사를 주도 하셨다. 또 일찍이 스승 만암 스님이 백양사에 처음 세우셨던 고불총림을 1996년 다시 복원하시고 초대 방장으로 추대되셨다.


한 생을 다하여 선풍 진작과 납자 제접, 그리고 인류 구원의 새로운 사상적 대안으로 참사람 실천운동을 제창하신 서옹 스님은 입적 3일 전부터 문도와 후학들에게 “이제 가야겠다”며 입적을 예고하셨고, 열반하신 당일에도 평상시처럼 운동을 하시고 입적 직전까지 시자 스님들에게 법문을 들려주신 뒤 입정에 드신 그대로 좌탈입망(座脫立亡) 하셨다. 그 날이 2003년 12월 13일, 스님께선 세수 92세, 법랍 72세를 일기로 스승이신 만암 스님의 모습처럼 결가부좌 하신 채 고불총림 백양사 설선당 염화실에서 입적하셨다.


스님의 저서로 <선과 현대문명> <절대현재의 참사람> <절대 참사람> 등이 있다.


 

이른 아침

스님도 깜짝 놀라셨습니다.


열정 때문에 탐방을 허락하신다며, 다른 스님을  소개해주셧습니다.



동행 하신 스님.

저기가 전각이 있던 자리 입니다라는 말씀을 남기고 내려가시어 온전히 혼자서 즐거움을 만끽하였습니다.

 

 

운문암 부도

우리 카페 오분향님의 답사 사진을 보고 가슴에 품고 있었던 님입니다.

백양사의 선원으로 출입이 자유롭지 못하며, 더구나 차량 출입이 금지되어 쉽게 참배할 수 없는 산내암자 입니다.


 

 

방형 지대석

대좌

탑신

화염보주


 

  

 

지대석

방형지대석 위에 복련을 새겨 마치 하대석 처럼 보입니다.

나이탓인지 이런 작례로 얼른 생각나지 않습니다.

 


대좌에는 앙련과 간엽을 표현했습니다. 

 


지대석과 대좌

 


종형 탑신

 


탑신석 상부의 홈

별석의 보주를 끼웠던 홈일까요?

 


화염보주

 

 



부도의 주인공은 누구 일까요?

백얌사 홈페이지에는 " 벽송, 정관, 백파" 스님이 머물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세분 중에 한 분의 부도는 아니었을까요?

개인적으로는 입적한  운문암 너머 순창 구암사에만 남아 있고 개창한 백양사 운문암에는 없는 백파선사 부도로 생각되지만 어떤 근거도 없습니다.


벽송지엄碧松 智嚴(1464~1534)


함양 벽송사를 중창하였고 쌍계사에 부도가 남아 있으며,1511년 봄 용문산(龍門山)에 들어가서 2년을 지내다가 1513년 오대산(五臺山)으로 옮겼고, 다시 백운산(白雲山)·능가산(楞伽山) 등 여러 산을 옮기면서 도를 닦았다. 1520년 지리산에 들어가 외부와의 교제를 끊고 불법연구에 더욱 몰두하였다.


하동 쌍계사 벽송지엄 부도


정관 일선 靜觀一禪(1533~1608)


사명유정(四溟惟政),편양언기(鞭羊彦機),·소요태능(逍遙太能)과 더불어 서산대사의 4대 제자의 한 명이다.

"연산(連山: 지금의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출신. 성은 곽씨(郭氏). 호는 정관(靜觀). 휴정(休靜) 문하의 4대 문파 가운데 하나인 정관문(靜觀門)의 창시자이다.


한때 속리산 법주사(法住寺)에 머물렀고, 만년에 휴정(休靜)의 강석에 참학(參學)하여 그의 심인(心印)을 이어받았다. 1608년 가을에 병을 얻어 덕유산 백련사(白蓮社)에서 입적하였다.


속리산 정관당 부도

무주 덕유산 백련사.정관당 부도


백파긍선(白坡亘璇, 1767〜1852)선사.


우리가 알고 있는 선운사 부도전 추사가 찬한 대기대용비의 주인공입니다.

 속성은 이씨(李氏)이며 본관은 완산(完山)이고 호남의 무장현(현재의 무주지역)에서 조선 영조 43년(1767)에 태어났다. 호는 백파이고 긍선은 법명이다. 12세에 출가하여 선운사(禪雲寺)의 시헌장로(詩憲長老)에게 배웠다. 뒤에 평안북도 초산(楚山)의 용문암(龍門庵)에 머물면서 공부하고, 다시 방장산(方丈山:지리산) 영원암(靈源庵)으로 가서 설파상언(雪坡尙彦)에게서 선(禪)의 종지(宗旨)를 받았다. 전북 남원군 영구산(靈龜山) 구암사(龜巖寺)로 돌아와 회정(懷淨)의 법통을 잇고, 백양산 운문암(雲門庵)에서 개당(開堂)하자 강중(講中)이 백 수십 명이었다고 한다.


 순창 구암사 백파선사 부도

선운사 백파선사의 대기대용비 모본


이른 아침

탐방을 허락해주신 운문암 스님,

부도 존재를 알려주신 오분향님께 감사드립니다.

 

 

주인공과 행장을 찾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는데...

 

2019.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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