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남도/공주시

공주...공산성

임병기(선과) 2019. 8. 20. 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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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성

서문인 금서루 부근에서 숙박을 하고 이른 시간에 산성을 올랐지만 햇볕은 한 발 앞서 기승을 부립니다.


 

비석군

주로 선정비가 대부분이며 스쳐 지납니다.


 

비림의 비석중

제민천교 영세비濟民川橋 永世碑비와 제민천명비가 눈에 들어 옵니다.

영세비는 공주의 제민천과 제민천교의 중수에 대한 기록 입니다.


 

제민천명濟民川銘

"제민천은 지막골에서 발원하여 공주시내를 관통하여 북으로 흘러 정지산을 돌아 금강으로 흐르는 하천이며, 다리는 중동에서 봉황동으로 통하는 목에 있었다고 합니다.


1817년(순조 17) 여름 대홍수로 제만천이 범람하고 교량이 붕괴되자 백성들은 그 수리를 원하였다. 그러나 공사에 필요한 비용은 3천여 금이라는 막대한 액수로 백성들에게 거둘 수 없는 매우 많은 돈이었다. 이에 비변사에 보고하여 충청수영의 군자미를 얻고 자체자금과 부여와 연기의 공전을 합하여 사업의 자금을 겨우 마련하였다. 다리의 복구는 8월에 마치고 하천의 둑을 고쳐 쌓는 일은 이듬해인 1818년 4월에 모두 완료되었다. 그 과정에서 공이 있는 관리와 자금의 지원에 협조한 강신환 등 원납인 10인의 이름을 기록하여 두었다."

(디지털공주문화대전에서 발췌)

 

 

금서루.공산성의 서문입니다.


공산성公山城

"사적 제12호. 둘레 2,200m. 웅진성(熊津城)·쌍수산성(雙樹山城)으로 불리기도 했다.

금강에 접한 표고 110m의 구릉 위에 석축과 토축으로 계곡을 둘러 쌓은 포곡형 산성이다. 475년 백제 문주왕이 웅진(지금의 공주)으로 천도하여 538년(성왕 16) 사비로 옮길 때까지 64년 동안 백제의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인 공주를 보호하기 위해 축조되었다.


축성시기는 국력이 안정된 동성왕 때 이루어진 것으로 짐작된다. 백제시대에 축조된 이래 여러 차례의 개축을 거쳐서 현재까지 보존되고 있다. 성의 구조는 석축 약 1,810m, 토축 약 390m이다.


석축산성은 안팎으로 돌을 쌓는 협축방식을 이용했으며, 내탁외축(內托外築)을 한 부분도 있다. 상단의 너비는 약 70cm 정도이고, 안쪽에는 백회를 발라서 성벽의 석재가 무너지지 않도록 했다.


토축산성은 돌을 혼합하여 쌓았는데 대개 높이 1m, 바닥너비 8.5m, 윗면너비 3m 정도이다. 성내에는 깊이 2m 정도의 호(壕)가 형성되어 있다. 서쪽 성벽은 토축된 위에 돌을 쌓아 축조했다.


성에는 진남루(鎭南樓:南門)·공북루와 암문(暗門)·치성·고대·장대(將臺)·수구문(水口門) 등의 방어시설이 있으며, 동문과 서문의 터가 남아 있다.성내에는 영은사(靈隱寺)·광복루·쌍수정(雙樹亭)·명국삼장비(明國三將碑)·쌍수산정주필사적비(雙樹山亭駐驆事蹟碑)와 주초석·창고터·연못터 등이 남아 있고, 만하루지(挽河樓址)·임류각지(臨流閣址)·장대지 등이 발굴조사를 통해 밝혀졌다. 동쪽과 서쪽에는 보조산성이 있어 공산성을 보호하고 있다. 공산성은 백제멸망 뒤 백제부흥운동이 벌어지기도 했던 곳이며, 1623년 이괄의 난 때 인조가 이곳으로 피난했던 일화도 있다."(다음 백과사전)






 

 

공북루拱北樓

서문인 금서루를 통과하면 좌측 성벽 위쪽에 위치

금서루를 지나 공북루와 동문인 영동루, 명국삼장비는 영은사와 만하루 답사에 땀을 너무 흘려 오늘 일정을 고려하여 건너 뛰었습니다.


"북문루이며 원래 망북루(望北樓)가 있었다. 1530년(중종 25)에 증보(增補)된 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망북루가 언급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16세기 중반에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불에 타거나 무너진 것으로 보인다.

공북루는 1602년 충청도관찰사로 부임한 유근이 공주 공산성에 감영을 설치하기 위해 절차를 계문하여, 1603년에 공주목사를 겸임하라는 비답이 내려지자 산성을 수축(修築)한 후에 옛 망북루의 자리에 세운 것이다. 60년 후인 1663년(현종 4)에 오정위가 충청도관찰사로 부임하여 중수를 하였고, 1765년 관찰사 윤동승이 중수를 하였다. 이후 몇 차례에 걸쳐 중수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되나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사실을 확인할 수 없다. 1903년(고종 40)에 홍승헌이 관찰사로 부임하면서 중수하였고 「중수기문」을 남겼다. 일제강점기인 1927년에도 한 차례 중수를 하였으며, 1964년 국고 보조비로 보수하여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디지털 공주문화대전에서 발췌)

 


공산성 백제 건물지

 


쌍수정 앞 배제 왕궁터의 연지

"자연석을 쌓아 원형으로 만들었고, 규모는 깊이 3m, 지표면 지름 7.30m, 바닥 지름 4.78m에 이른다. 못 벽면은 물이 새지 않게 1m의 공간에 진흙을 다져 채운 뒤 부정형의 할석으로 면을 맞추어 비스듬히 쌓아올렸으며, 표면에 부정형의 할석을 평평하게 깔았다.

발굴 조사 결과 못 바닥 제일 밑층에는 물이 고여 있었음을 증명하는 청흑색의 부식된 점토층이 나타났고, 그 위에 퇴적된 암갈색 토층이 있었으며, 통층 위로는 백제의 수막새 등 기와편과 삼족 토기, 벼루편 등 백제계 유물만 출토되는 층이 있었다. 그 위에서 신라계 토기편들이 출토되었다."(디지털공주문화대전)

 


쌍수정雙樹亭

쌍수정 앞 왕궁터는 발굴 조사중. 


"1734년(영조 10)에 창건되었는데, 창건 당시의 이름은 삼가정(三架亭)이었다. 그 후 여러 차례 중건하였으며, 1903년(고종 40)에 수축(修築)하였다. 지금의 건물은 1970년 전체적으로 해체, 복원한 것이다.쌍수정 앞에는 인조가 이곳에 머물렀을 당시의 사적을 기록한 쌍수정사작비가 남아 있다.

쌍수정은 1624년 이괄이 난을 일으켜 인조가 남쪽으로 내려와 공산성에서 피난하고 있을 때 두 나무에 기대어 멀리 북쪽 궁궐을 바라보았는데, 난이 평정되었다는 소식에 두 그루의 나무에 금대와 통정대부의 작호를 내린 것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정자이다. 이는 1788년 관찰사 홍억이 지은 쌍수정 중수기에 잘 보인다. 중수기에 따르면인조가 쉬었던 두 그루의 나무가 죽어 옛 흔적을 찾아 볼 수 없게 되자 옛터를 기념하기 위하여 관찰사 이수항(李壽沆)이 1734년(영조 10)에 건립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낙전당(樂全堂) 신익성은 ‘쌍수정기’를 지어 인조가 검을 차고 말에 오라 쌍수정에 행차’하였다고 하였고 이하곤의 두타초(頭陀草)에서도 쌍수정이라 언급하여 쌍수정이 영조대 이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므로  쌍수정은 인조가 금대를 두르면서 바로 지어졌을 가능성이 크며 이수항의 건립 기록은 중수에 대한 착각일 수도 있다. 때문에 추가의 자료를 통해 정확한 건립연대를 판단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그 후에, 1787년(정조 11)에 관찰사 홍억이 대지를 평탄하게 한 후 다시 건축하였으며, 고종 1903년 (광무 7)에는 관찰사 홍승헌이 다시 수축한 것으로 전한다. 이후 1947년 공주읍 보승회의 주관으로 중수하였으며, 1970년에는 옛 건물을 전면 해체하여 새로 복원하였다.

(디짙털공주문화대전 발췌)

 


진남루鎭南樓

공산성 정문인 남문 입니다.

 


영은사靈隱寺


1458년(세조 4) 세조가 명하여 창건되었다. 처음 사찰 이름은 묘은사이었으나,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 때 인조가 영은사에서 피신한 뒤 은적사로 바꾸었다. 1616년(광해군 8) 영은사에 승장(僧長)을 두어 전국 8도의 사찰을 관장하게 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특히 임진왜란 당시 승병 합숙 훈련소로 쓰였는데, 영규대사가가 일으킨 승병들이 이곳에서 조련을 받고 금산 전투에 참여하였다. 현재 절에 전하는 탑 부재(部材) 등의 양식으로 보아 영은사가 고려시대 초기에 창건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만하루挽河樓. 공산성 연지

 


만하루挽河樓

강학과 휴식 무엇보다도 군사적 기능으로 건립된었다고 합니다.

만하挽河는 두보의 시 세병마洗兵馬 마지막 구절에서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안득장사만천하安得壯士挽天河, 정세갑병장불용淨洗甲兵長不用

어떻게 하면 힘센 장사를 얻어 하늘의 은하수 물을 끌어다가, 갑옷과 무기를 깨끗이 씻어 영원히 사용하지 못하게 할 것인가

"여지도서(輿地圖書)의 「성지조」와 「누정조」 부분에 1754년(영조 30) 충청감사 김시찬(金時粲)에 의해 공산성 동쪽 연못가에 6칸으로 건립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공주판관 박사석의 아들인 박윤원이 쓴 「만하루기」에도 관찰사 김시찬이 규획하여 건립하였으며,언제 훼철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일성록(日省錄)』과 1859년(철종 10)에 편찬된 공산지, 1871년(고종 8)에 편찬된 『호서읍지』 등에 만하루에 대한 언급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까지 존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1984년 현재의 건물로 복원되었고, 2006년 보수 공사가 이루어졌다."(디지털 공주 문화대전에서 발췌)

 

 

공산성 연지 公山城蓮池

"석축을 단이 생기도록 정연하게 쌓아, 윗부분은 동서로 최대 길이 21m, 너비 12m 정도이고, 아랫부분은 최대 길이 9m, 너비 4m로 좁게 쌓아 석탑을 거꾸로 세워놓은 모양을 하고 있다. 서남 방향에는 잘 다듬은 돌 2매씩을 길게 쌓아 10여 개의 계단을 설치하였다. 바닥에는 판판한 돌을 깔았고, 동·서벽 쪽에는 너비 40㎝의 배수로를 설치하여 물의 흐름을 쉽게 하였다."(디지털 공주문화대전)

 


공산성

느긋하게 여유를 갖고 둘러 볼 계획이었으나, 금서루,쌍수성,왕궁터. 진남루.영은사.만하루 다시 성벽을 타고 원대 복귀하였습니다.

아침 이른 시간 많은 시민들이 운동을 즐기고 있었으나, 땀이 많은 나에게는 고역 이었으며, 공북루, 영동루까지 성벽을 왕복하는 것은 오늘 답사 동선을 고려하면 무리라고 판단하여 주마간산식의 답사가 되었습니다.


일선에서 물러나면 만추에 다시 찾아 아침 산보를 즐기고픈 답사지로 남겨 두어야겠습니다.

그나자나 공산성 근처 숙박시설에 실망했습니다.

모든 업소가 그럴리는 없겠지만, 퇴실 할 때 보니 방바닥과 티비설치대에는 먼지가 쌓여 있었으며 얼굴에 바를 화장품도 비치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빗에는 머리카락이 엉켜 있고....

일본 여행이 주춤하는 사이에 반대급부로  국내여행 활성화의 호기라고 생각되겠지만 바가지 요금은 물론 이고 이런 상태로는 그런 기대는 요원 할 것 입니다.

 

 

2019.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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