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남도/논산시

논산...돈암서원

임병기(선과) 2019. 8. 11. 2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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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암서원은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1548~1631)이 타계한지 3년 후인 1634년(인조 12) 충청도 연산현(連山縣)의 임리(林里)에 창건되었다. 창건시 김장생을 주향으로 모셨고 1658년(효종 9)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을 추배하였다. 이어 1688년(숙종 14)에 동춘당(同春堂) 송준길( 宋浚吉), 1695년에는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을 각각 추배하였다. 처음에는 김장생 문인들이 스승을 추모하여 사우를 건립한 뒤 위패를 봉안하고 제사를 지내오다 사당 앞에 강당을 건립하면서 서원의 단초를이루었다.

 

현재의 연산면 임리(林里, 숲말)에 창건하면서 서원 서북쪽에 있던 돈암이란 큰 바위의 이름을 일컬어 서원의 이름을 돈암이라 하였다 한다. 1871년(고종 8)의 전국적 서원 훼철령에서도 철폐되지 않고 보존되었지만 1881년(고종 18)에 이르러 숲말의 지대가 낮아 홍수 때마다 서원 뜰 앞까지 물이 차므로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였다. 돈암서원은 주 교육시설을 중심으로 배향공간과 부속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돈암서원 홈)

 

 

홍살문

 

 

하마비

 

 

산앙루山仰樓

산앙(山仰) ‘고산앙지(高山仰止)’의 줄임말로 시경 거할(車舝)편에 “높은 산을 우러러보며 큰길을 가도다.(고산앙지高山仰止, 경행행지景行行止.)”라는 말로 즉 존경할 만한 선현(先賢)을 사모할 때 쓰는 표현입니다. 돈암서원 현판도 같은 의미인 듯 합니다.

 

 

안쪽

 

 

연산돈암서원비

 

 

황강 김계휘선생 사적비 黃岡 金繼輝先生 事蹟碑

 

 

입덕문(入德門)

외삼문

 

 

서원 관리소와 배롱나무

 

 

응도당(凝道堂)

일반적인 서원 배치인 전학후묘가 아니라 중심축에서 비켜서서 자리합니다.

이는 사당과 강당.동서재가 들어선  이 후 서원 옛터에 남아있던 건물을 1971년 지금의 자리로 옮겼기 때문입니다.

 

응도당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맞배집으로 양 측면 박공 하부에 눈썹지붕을 두었습니다.

눈썹 지붕 뿐만 아니라 내부 구조도 독특 합니다.

중앙에 우물마루를 깔고 좌우 앞 뒤에 방을 배치하였습니다. 최초에는 좌우 방은 벽체를 두어 ‘거경()’과 ‘정의()’라고 이름하였다고 합니다. 방의 이름이 현재 돈암서원의 동서재 명이 된 듯 합니다.


이런 강당 구조의 배경은  양성당 앞에 있는 원정비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당 앞에 강당 다섯 칸이 있는데, 옛 하옥(厦屋)의 제도를 사용하였다. 문원공이 일찍이 ?의례?(儀禮)』와 ?주자대전(朱子大全)』을 고증하여 죽림서원(竹林書院)에 강당을 창건하였는데, 이제 일체 그 유법(遺法)을 따랐다.


그리하여 방실(房室)·당상(堂廂)·서▨점(序▨)·▨▨·오루(奧漏)·의진(依陳)·호유가 갖추어져 그 이름을 ‘응도(凝道)’라 하였으니, 상고하지 못한 고제(古制)를 손바닥 보듯이 환히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당 양쪽 곁에 재(齋)가 있는데, 좌측은 거경재(居敬齋)라 하고 우측은 정의재(精義齋)라 하였으니, 대개 주자의 회당(晦堂) 양쪽 협실(夾室)의 뜻을 취한 것이다.


또한 사면에는 담장을 두르고 문을 만들었으며 문 좌우에는 글방이 있는데, 이는 와서 배우는 소자(小子)들을 거처하게 하는 곳이다. 금상(현종) 경자년(1660년)에 ‘둔암서원(遯巖書院)’이라 사액(賜額)하였다." 

 

 


숭정 경자 3월 일 선사(崇禎 庚子 三月 日 宣賜).1660년

응도당과 더불어 우암의 글씨라는 이야기가 전한다고 합니다.

 


화반

 


중앙 마루. 양쪽 방

 


눈썹지붕

 

 

 

정회당(靜會堂)

사계선생의 부친인 황강 김계휘 선생께서 강학했던 공간

 

 

의성 김 예산 팔세 경서 義城 金 禮山 八世 景書

8살 아이의 작품으로 보이는지요?

 

 

장판각(藏板閣)

책판과 왕실 하사품을 보관

 


돈암서원과 잘 어울립니다.

 

 

양성당(養性堂)

강학공간으로 앞에는 좌우 동서재를 두고 있으며, 동서재 기단 보다 한 단 높은 2단 입니다.

 

 

낙관이 흐릿하여 글씨의 주인공을 확인하지 못햇습니다.

 

 

돈암서원(遯巖書院) 원정비(原庭碑)

 

1669년(현종 10)에 세운 비로, 양성당() 앞에 위치합니다.

 

비문(한국금석문종합영상정보시스템)

사계(沙溪) 문원공(文元公) 김 선생(1548~1631년)이 숭정(崇禎) 신미년(인조 9, 1631년) 8월에 사계에서 돌아가셨다. 이미 장사지내고 나서 문인 제자들이 선생을 사모하는 마음을 붙일 곳이 없었다. 그러나 즉시 사계 옛집의 왼쪽에 사우(祠宇)를 건립하여 3년 만인 갑술년에 낙성하고, 5월 정해일에 의례와 같이 신판을 봉안 배향하였다.


그리고 신독재(愼獨齋) 문경공(文敬公, 1574~1656년) 선생의 시와 예에 대한 성문(聲聞)은 어릴 적부터 있었다. 그러므로 문원공은 문경공과 상장(相長)하는 이익이 있다고 여겼으니, 이른바 부자 사이의 지기(知己)라는 것이 있었다. 문원공 때부터 후생(後生)들이 이미 사숙(私淑)하여 들음이 있었는데, 문원공이 돌아가신 뒤는 드디어 문원공을 섬기던 예로 문경공을 섬겨 그대로 고비(선생이 있던 자리)를 거두지 않은 것이 거의 30년이었다. 문경공이 이미 돌아가자 사당에 배향하되 그 위치는 동쪽에서 서쪽을 향하게 하였고, 제생들이 모여 거처하면서 강론하고 익히는 규칙을 한결같이 문경공의 조획대로 하여, 장차 폐단이 없게 영구히 전하도록 하였다.


대저 두 분 선생의 규모와 기상은 후학이 감히 헤아려 알 바가 아니나, 한 세대가 공론(公論)으로 천거한 것으로 논한다면, 문원공은 장중하고 혼후(渾厚)함이 마치 땅이 바다를 싣고 있는 것과 같아서 그 가(涯)를 헤아릴 수 없고, 문경공은 자상하고 치밀함이 마치 정금(精金)·미옥(美玉) 같아 그 흠을 볼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두 분 선생의 성덕(成德)은 각각 다르나, 배움과 가르침은 한결같이 주자(朱子)에 근본하였기 때문에 이른바, 뜻을 세워 근본을 정하고, 경학(經學)에 전력하여 뜻을 가지며, 사물의 이치를 궁구(窮究)하여 그것을 밝히고, 자신에 반성하여 그것을 채웠으니, 이 네 가지는 대체로 포백(布帛)·숙속(菽粟)과 같아서 일찍이 하루도 빠질 수 없는 것이고 보면, 그 도에 나아감에 있어 대개 동일하지 않음이 없었다.


후세의 배우는 이들이 두 분 선생의 서로 다는 점에는 비록 억지로 생각하여 따라가기를 기대할 수 없으나, 그 서로 같은 곳을 더듬어 토론하고 힘써 행해서 죽을 때까지 마지않는다면, 두 분 선생에 도가 거의 땅에 떨어지지 않아서 비록 사해에서 기준으로 삼고 주자에게 질정해도 좋을 것이다.


문원공의 휘는 장생(長生), 자는 희원(希元)으로 벼슬이 참판에 이르렀고, 문경공의 휘는 집(集), 자는 사강(士剛)으로 벼슬이 판부사(判府事)에 이르렀으며, 두 분 시호는 다 효종대왕이 내려주신 것이다. 후에는 문경공을 효종의 묘정에 배향하였다.


사당 앞에 강당 다섯 칸이 있는데, 옛 하옥(厦屋)의 제도를 사용하였다. 문원공이 일찍이 ?의례?(儀禮)』와 ?주자대전(朱子大全)』을 고증하여 죽림서원(竹林書院)에 강당을 창건하였는데, 이제 일체 그 유법(遺法)을 따랐다.
그리하여 방실(房室)·당상(堂廂)·서▨점(序▨)·▨▨·오루(奧漏)·의진(依陳)·호유가 갖추어져 그 이름을 ‘응도(凝道)’라 하였으니, 상고하지 못한 고제(古制)를 손바닥 보듯이 환히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당 양쪽 곁에 재(齋)가 있는데, 좌측은 거경재(居敬齋)라 하고 우측은 정의재(精義齋)라 하였으니, 대개 주자의 회당(晦堂) 양쪽 협실(夾室)의 뜻을 취한 것이다. 또한 사면에는 담장을 두르고 문을 만들었으며 문 좌우에는 글방이 있는데, 이는 와서 배우는 소자(小子)들을 거처하게 하는 곳이다. 금상(현종) 경자년(1660년)에 ‘둔암서원(遯巖書院)’이라 사액(賜額)하였다.



숭정 기유년(현종 10, 1669년) 8월 일에 문인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우의정 겸 경연감 춘추관사 세자부 송시열(宋時烈)은 찬하고 문인 정헌대부 의정부 좌의정 겸 성균관좨주 세자부 송준길(宋浚吉)이 쓰고문정공(文元公) 증손 통정대부 홍문관 부제학 지제교 겸 경연▨▨관 춘추관 수찬관 김만기(金萬基)가 전액을 쓰다.

 

 

서재.정의재(精義齋)


 

 

동재.거경재(居敬齋)

 

 

 

숭례사(崇禮祀)

배향 공간 입니다.

꽃담에는 글씨가 새겨져 있습니다.


지부해함(地負海涵).

내삼문 향우측 담장

사계의 인품이 땅과 바다처럼 크고 넓다는 뜻입니다


박문약례(博文約禮)

중앙 담장

널리 익히고 이미 익혀 예를 잘 지키라는 의미입니다.


서일화풍(瑞日和風)

내삼문 향 좌측 담장

다른사람들과 조화롭게 어울리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사계 김장생

"1548년(명종 3) ~ 1631년(인조 9) 본관은 광산(). 자는 희원(), 호는 사계(). 서울 출신. 할아버지는 지례현감 김호()이고, 아버지는 대사헌 김계휘()이며, 어머니는 평산신씨()로 우참찬 신영()의 딸이다. 아들이 김집()이다.


1560년 송익필()로부터 사서()와 『근사록()』 등을 배웠고, 20세 무렵에 이이()의 문하에 들어갔다. 1578년(선조 11) 학행()으로 천거되어 창릉참봉()이 되고, 1581년 종계변무()의 일로 아버지를 따라 명나라에 다녀와서 돈녕부참봉이 되었다.


그 뒤 순릉참봉()과 평시서봉사()를 거쳐 활인서()·사포서()·사옹원() 등의 별제()와 봉사()가 내렸으나 모두 병으로 나가지 않았다. 그 뒤에 동몽교관()·인의()를 거쳐 정산현감()이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호조정랑이 된 뒤, 명나라 군사의 군량 조달에 공이 커 종친부전부(簿)로 승진하였다. 1596년 한 때 연산으로 낙향했는데, 단양·양근 등지의 군수와 첨정()·익위()의 관직이 거듭 내려졌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이듬해 봄에 호남 지방에서 군량을 모으라는 명을 받고 이를 행해 군자감첨정()이 되었다가 곧 안성군수가 되었다.


1601년 조정에서 『주역구결()』의 교정에 참가하도록 불렀으나 병으로 나가지 못하였다. 이듬해 청백리로 올려졌으나, 북인이 득세하는 것을 보고 1605년 관직을 버리고 연산으로 다시 내려갔다. 그 뒤에 익산군수를 지내고, 1610년(광해군 2) 회양·철원부사를 역임하였다.

1613년 계축옥사 때 동생이 연좌되었다가 무혐의로 풀려나자, 관직을 버리고 연산에 은둔해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그 뒤 인조반정으로 서인이 집권하자 75세의 나이에 장령으로 조정에 나갔으나, 곧이어 사업()으로 옮겨 원자보도()의 임무를 겸하다가 병으로 다시 낙향했다.


이듬해 이괄()의 난으로 왕이 공주로 파천해오자 길에 나와 어가를 맞이하였다. 난이 평정된 뒤 왕을 따라 서울로 와서 원자보도의 임무를 다시 맡고 상의원정()으로 사업()을 겸하였다. 집의()를 거친 뒤 낙향하려고 사직하면서 13가지의 중요한 정사()를 논하는 소를 올렸다.


그 뒤 좌의정 윤방(), 이조판서 이정구() 등의 발의로 공조참의가 제수되어 원자의 강학을 겸하는 한편, 왕의 시강과 경연에 초치되기도 하였다. 1625년에 동지중추부사를 임명받았으나 이듬해 다시 사직해 행 호군()의 산직()으로 낙향한 뒤 이이·성혼()을 제향하는 황산서원()을 세웠다.


같은 해 용양위부사직으로 옮기고, 1627년 정묘호란 때 양호호소사(使)로서 의병을 모아 공주로 온 세자를 호위하였다. 곧 화의가 이루어지자 모은 군사를 해산하고 강화도의 행궁()으로 가서 왕을 배알하고, 그 해 다시 형조참판이 되었다.


그러나 한달 만에 다시 사직해 용양위부호군으로 낙향한 뒤 1630년에 가의대부로 올랐으나, 조정에 나가지 않고 줄곧 향리에 머물면서 학문과 교육에 전념하였다. 늦은 나이에 벼슬을 시작하고 과거를 거치지 않아 요직이 많지 않았지만, 인조반정 이후로는 서인의 영수격으로 영향력이 매우 컸다.


인조 즉위 뒤에도 향리에서 보낸 날이 더 많았지만, 김장생의 영향력은 이이의 문인으로 줄곧 조정에서 활약한 이귀()와 함께 인조 초반의 정국을 서인 중심으로 안착시키는 데 결정적인 구실을 하였다. 학문과 교육으로 보낸 향리 생활에서는 줄곧 곁을 떠나지 않은 아들 김집의 보필을 크게 받았다.


김장생의 문인은 많은데, 송시열()·송준길()·이유태()·강석기()·장유()·정홍명()·최명룡()·김경여()·이후원()·조익()·이시직()·윤순거()·이목()·윤원거()·최명길()·이상형()·송시영()·송국택()·이덕수()·이경직()·임의백() 등 당대의 비중 높은 명사를 즐비하게 배출하였다. 아들 김집도 문하이지만, 문인들 사이에는 김장생을 ‘노선생’, 아들을 ‘선생’으로 불렀다고 한다.


학문적으로 송익필·이이·성혼 등의 영향을 함께 받았다. 하지만 예학() 분야는 송익필의 영향이 컸으며, 예학을 깊이 연구해 아들 김집에게 계승시켜 조선 예학의 태두로 예학파의 한 주류를 형성하였다.


인조 즉위 뒤 서얼 출신이던 송익필이 아버지 송사련()의 일로 환천(: 천인으로 되돌아감)되자 억울함을 풀어주기 위해 같은 문하의 서성()·정엽() 등과 신변사원소()를 올렸다.


또한, 이이와 성혼을 위해 서원을 세우고 1만 8000여 자에 달하는 이이의 행장을 짓기도 하였다. 스승 이이가 시작한 『소학집주()』를 1601년에 완성시켜 발문을 붙였는데, 『소학()』에 대한 관심은 예학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저서로는 1583년 첫 저술인 『상례비요()』 4권을 비롯, 『가례집람()』·『전례문답()』·『의례문해()』 등 예에 관한 것이 있고, 『근사록석의()』·『경서변의()』와 시문집을 모은 『사계선생전서()』가 전한다.


1688년 문묘에 배향되었으며, 연산의 돈암서원()을 비롯해 안성의 도기서원() 등 10개 서원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원()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사계 김장생. 신독재 김집.동춘당 송준길.우암 송시열을 배향하고 있습니다.

 


노주석

기단 아래 좌우에 자리합니다.

 

 

전사청(典祀廳)

각종제사를 준비하는 공간인

 

.

2019년 7월 6일의 제43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는 '한국의 서원(Seowon, Korean Neo-Confucian Academies)'이라는 이름으로 한국의 서원 9곳을 한국의 14번째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였습니다.


등재된 서원은 소수서원(1543년 건립), 남계서원(1552년 건립), 옥산서원(1573년 건립), 도산서원(1574년 건립), 필암서원(1590년 건립), 도동서원(1605년 건립), 병산서원(1613년 건립), 무성서원(1615년 건립), 돈암서원(1634년 건립)입니다.


이번에는 배향공간인 숭례사 문이 열려 있었습니다.

유네스코 등재 이후 새로운 변화 인지는 모르겠으나, 9개서원은 물론이고 우리나라의 많은 서원과 향교도 상시개방이 아니더라도 열쇠를 보관하고 있는 사람의 전화번호를 남겨 두면 좋겠습니다. 현재는 상시 닫혀 있어 까치발로 바라보는 것이 답사에 전부 이었습니다.


2019.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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