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춘천시

춘천...청평사 부도.마애부도

임병기(선과) 2019. 7. 2.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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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평사

이제는 고속철 개통과 차량으로 접근이 가능하여  소양강과 더불어 춘천을 대표하는 관광지가 되었습니다.

예전처럼 한적한 분위기를 원한다면 주중 답사 일정을 잡아야 될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도

꼭 10년전에 다녀 왔지만, 상부도전의 환적당 부도와 (전)설화당 부도를 뵙지 못하여 늘 미답처로 각인된 절집이었습니다.

오늘은 청평사 부도와 동선에 없었으나 우연하게 인연 지은 마애부도에 대한 설說을 전개해보겠습니다.

엉터리 저의 견해 보다는  자랑스런 후배인 홍성익 박사의 학위 논문인 "淸平寺에 대한 歷史考古學的硏究"를 많이 참고하였습니다.

 

 

(傳)이자현 부도

방형 지대석과 복련이 조식된 팔각중대석 받침은 일석이며, 하대석은 결실되었고 중대석과 상대석은 하나의 돌입니다.

(지대석의 팔각 굄으로 미루어 망실된 하대석은 팔각이며, 중대석도 팔각일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즉 현재 방형 중대석은 후보물로 추정됩니다)

방형 중대석의 우주는 연주문으로 표현하였고 각 면에는 범자를 새겼습니다.

상대석에는 앙련을 모각하였고, 갑석을 두었습니다.

탑신은 원구형, 우동은 높은 편이며, 상륜에는 일석으로 조성된 복발과 보주가 남아 있습니다.


이자현玄(1061년(문종 15년) ~ 1125년(인종 3년))

"고려의 학자. 자는 진정(), 호는 식암(), 시호는 진락(). 본관은 인주(). 중서령() 자연()의 손자. 문종 때 급제, 선종 때 대악서승()이 되었다가 버리고 춘천()의 청평산()에 들어가 문수원()을 수리하고 있으면서 당()과 암자()를 10여 처()에 짓고 당을 문성(), 암자를 견성()ㆍ선동()ㆍ식암()이라 각각 이름하고 선학()을 닦았다. 1117년(예종 12) 남경()에서 예종을 만나 특별히 우대를 받았으며 왕후와 공주로부터 의복을 받았다. 인종의 예우()가 또한 두터웠으며, 병에 눕자 왕이 어의()를 보내어 문병하고 겸하여 다약()을 하사, 사후 시호를 주었다. 청평산에 《청평식암()》이란 대해서()를 썼다." (인명사전, 2002. 1. 10., 인명사전편찬위원회)


 

기단부


 

지대석 상부 복련이 조식된 팔각 굄


 

방형중대석

연주문과 범자. 하대석 결실


 

상대석과 중대석


 

탑신


 

옥개석과 상륜부



(傳)이자현 부도

"1125년에 입적한 이자현의 부도로 알려져 있고 현재도 진락공 이자현의 부도로 이름되어 있다. 그러나 그간 조사된 자료에 의하며 진락공 부도는 사실과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자료를 살펴보면, 우선 진락공 부도라 한 것은 擇里志 를 인용한 듯하다.


이자현은 왕비의 인척으로서 젊은 나이였지만 혼인도 벼슬도 아니하고 여기에 숨어 살며 도를 닦았다. 그가 죽자 절 중이 부도를 세워서 유골을 갈무리하였는데 지금도 절 남쪽 십여리 지점에 남아 있다. 이자현의 것은 청평사 앞에 봉안되어 있다.


위의 인용문을 보면 진락공의 부도가 절 입구의 십여리 지점에 있다고 하였는데 십여리는 아니지만 절의 남쪽 영지 옆에 있는 부도를 진락공의 부도로 추정할 만하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택리지에서 진락공은 혼인과 벼슬을 하지않았다고 하는 등 사실과 다른 점에 대하여 기술하는 것으로 보아서 진락공의 부도라는 부분에도 역시 신빙하기 어렵다. 단지 택리지가 쓰일 당시 이곳에 부도가 건립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음으로서 건립 하한년대에 대한 자료로 참고할 만하다.


다음 자료들에는 보다 구체적인 사실들에 대하여 알 수 있다.


그 해 4월 21일... 申時에 입적하였다. ... 23일 그의 유언대로 장례를 치렀다.
선동식암에 오르니... 진락공의 藏骨處에서 나온 지석을 보았는데 글자가 깍여 모두 해석할 수는 없었다. 지석 처음 면에는 진락공의 諱字가 새겨져 있었고 항아리 속에 있는 유골을 사람들마다 꺼내어 보고 있었다. ... 지석은 두 개로 항아리와 함께 돌 틈 사이에 같이 두어서 왕래하는 監兵과 수령이 항아리를 꺼내게 하여 앉은 자리에서 보고 감상한다고 하였다. 선동에 있고 질그릇 네모퉁이에 乾坤坎离의 괘를 새기고 주홍색을 메워서 돌 사이에 갈무리하였는데 진락의 유해는 정두원이 방백일 때 기와와 벽돌에 명을 새기고 승 文玉에게 개장토록 하였다고 한다.


4~5리 올라가면 식암이 있는데 암옥은 두서너 사람이 들어갈 정도인데 벼랑 끝에 매달려 어지럽다. 내가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文玉이 여기에 산다. 곧바로 석대에 올랐는데 석대는 암자의 기와와 잇닿아 있다. 와봉은 석대 아래에 있고 서북쪽으로 몇걸음 올라가자 나한전이 있다.


이 곳에서 꺾어지면 2기의 부도가 있으며 북쪽 수리의 절벽에 암자가 있다. 바위곁 두단의 폭포가 있는데 위쪽에 나한전이 있고 물가에 진락공의 유골이 담긴 석함이 있다.


위의 자료를 종합하면 이자현은 1125년 4월 21일 오후 3시에서 5시 사이에 입적하고 4월 23일에 장사를 지냈다고 한다. 이는 이자현이 입적하고 만 2일 에 장사를 지내므로 부도를 미리 준비해 두지 않았다면 세울 수 있는 시간이 없다. 서종화의 기록에 의하면 절 서쪽으로 가면 부도 2기가 있고 북쪽으로 수리를 가면 나한전이 있다고 하였는데 이곳은 현재 적멸보궁이 있는 아래쪽 계곡이며 이 지역을 이자현의 사리가 봉안된 곳으로 비정해야 한다.


그런데 정두원이 사승 文玉에게 개장하도록 하였다는 기사가 주목된다. 정두원은 1632년 8월부터 1633년 9월까지 강원도 관찰사를 지낸 사람이다. 文玉은 춘천부사 박장원이 1651년에 청평사를 방문하여 만난 실존 인물이므로 정두원이 이자현의 유해를 문옥에게 개장하도록 했다는 기록은 사실로 보여지고 있지만 이 자료에서는 개장한 것이 부도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정두원 보다 70년 이상 후대 사람인 서종화의 기록에 물가에 진락공의 유골이 담긴 석함이 있다 라는 자료를 통하여 볼 때 정두원이 문옥에게 개장하도록 한 것은 적멸보궁이 있는 계곡의 물가에 석함으로 조성하였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진락공의 부도가 될 수 없고 주인공을 알 수 없는 부도이며 진락공부도는 적멸보궁이 있는 계곡에 도기와 석함으로 조성했다고 할 수 있다."(홍성익. 논문에서 발췌)


 

진락공의 부도 중수비로 여겼으나 아니며.

대정 12(1923년)년 청평사 주지 황계월이 세웠습니다.

 


부도전

청평사 향좌측 등산로 상에 위치

 


(전)설화당.환적당

청평사에는 적멸보궁 근처에 1기 부도가 더 있습니다.

 


(傳)설화당雪花堂 부도

방형 지대석, 팔각의 높은 복련이 조식된 하대석, 중대석은 팔각이며 연주문으로 구획하고 화문을 새겼습니다.

상대석은 하대석과 대칭으로 꾸몄으며, 탑신석은 원구형의 조선시대 부도 입니다.


옥개석 낙수면 물매는 급하고, 상륜부에는 보주받침과 보주가 있습니다.

 

 


기단부

 

 


(傳)설화당雪花堂 부도
"서종화는 1700년에 태어나 1748년에 사망하였다. 서종화가 청평사를 다녀간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이 자료의 하한년도가 1748년임이 분명하다. 따라서 1기는 1690년에 입적한 환적당의 부도임을 부도명을 통하여 알 수 있고, 1기는 주인공을 알 수 없으나 건립 하한년대를 1748년으로 추정할 수 있다. 淸平寺誌 에 수록된 3기의 부도에 대하여 자료에서는 환적당은 이미 밝혀졌고 이름을 알 수 있는 설화당 부도는 위치를 언급하지 않아 부도 3기 중에서 어느 부도를 지칭한 것인지 알 수 없다.


여기서 추론을 하면 영지 서쪽에 있는 부도는 청평사를 출입하는 주 도로변에 있으므로 누구나 확인할 수 있는 곳에 있으며 이 부도는 적어도 1748년 이후에는 현재까지 환적당 부도와 함께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또다른 부도는 적멸보궁의 동쪽 산능성이에 있었기 때문에 청평사지를 편찬할 당시에 소재를 파악하지 못하여 쉽게 소재지를 알 수 있는 3기만을 등록했다고 판단된다.


따라서 청평사지가 편찬되는 이러한 상황을 추정하고  이부도를 설화당 부도라고 이름을 붙여 안내판을 세웠고, 이를 다시 비판적 검토없이 인용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청평사지에서 어떠한 자료를 바탕으로 설화당이라는 실명을 인용하였는지 알 수 없고 또한 어느 시기의 스님인지는 현재로서 알 수 없지만 청평사지 의 전체 내용을 검토하면 사실에 근접한 자료를 기술하는 것을 볼 때 부도 3기중에 어느 하나는 설화당의 부도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환적당 부도 보다 선행하는 시기에 건립되었고 조선전기의 부도와 양식적으로 친연성이 있으므로 청평사에서 주석하였던 조선전기 스님의 부도로 추정된다"

 


환적당幻寂堂 부도

방형 지대석은 2매, 팔각 중대석을 기준으로 상,하대석에 앙련과 복련을 새기고 대칭으로 꾸몄습니다.

팔각중대석은 연주문으로 구획하고 화문을 새겼습니다.

원구형 탑신, 팔각 옥개석의 물매는 급하며 상륜에는 보주받침과 보주를 올렸습니다.


그나저나 환적당 당호는 어디에 새겼나요?


환적당幻寂堂(1603년(선조 36) ~1690년(숙종 16))

"선승(禪僧). 성은 문씨. 자는 지경(智鏡), 호는 환적(幻寂). 경상북도 구미 출신. 5세 때 아버지가 죽자 11세에 어머니를 따라서 충청북도 보은의 외가에 가서 살았다. 그 해에 출가하여 속리산 복천사(福泉寺)진정(塵靜)의 제자가 되었다. 14세에 스승을 따라서 금강산정양사(正陽寺)로 갔다. 이때 편양(鞭羊)이 법기(法器)임을 알고 열심히 정진할 것을 당부하였다. 1년 동안 정양사에 머물다가 속리산으로 돌아와서 16세에 구족계를 받았다.


그 뒤 팔공산 동화사(桐華寺)로 가서 유현(惟賢)에게 경론을 배우고, 21세에 청량산으로 들어가서 수도하였다. 이때 솔잎과 솔방울을 먹으면서 일체의 곡식을 먹지 않았으며, 그 뒤 31년 동안 생식을 계속하였다. 29세 때 다시 금강산으로 가서 편양으로부터 화두(話頭)을 받고 용맹정진하다가 여러 사찰의 고승들을 찾아다니면서 가르침을 받았다.


1644년(인조 22) 편양의 죽음을 전하여 듣고 금강산으로 가다가 도중에 병을 얻어 1년 뒤에 정양사로 가서 편양의 탑과 비를 건립하였다. 1646년 보은의 어머니를 모셔와서 보천사(寶泉寺) 가까이에 작은 집을 지어 머무르게 하고 3년 동안 봉양하다가 다시 여러 곳으로 유람하였다. 51세 때 금사사(金沙寺) 미타전에서 어머니가 생식을 금할 것을 간곡하게 권유하였으므로 다시 불에 익힌 음식을 먹게 되었다.


1656년(효종 7) 어머니가 죽자 정성껏 장례를 치른 뒤 여러 사찰을 다니며 후학들을 지도하였다. 1689년(숙종 15) 가야산 해인사의 백련암(白蓮庵)에 머물러 더욱 정진하다가 이듬해에 입적하였다. 다비(茶毘)하자 사리와 정골(頂骨)이 나왔는데, 사리는 생전에 인연이 깊었던 문경 봉암사, 춘천 문수사, 충주 월악산 덕주사, 대구 용연사, 태백산 각화사, 거창 연수사, 가야산 해인사에 탑을 세우고 봉안하였으며, 정골은 대곡사(大谷寺)에 탑을 세우고 봉안하였다.


그의 법맥은 휴정(休靜)-편양-의천으로 이어지며, 법을 이은 제자로는 조영(照影)·신경(伸敬)·상희(尙熙)·청심(淸心)·쾌민(快敏) 등이 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본문에 언급된 사찰 외에도 칠곡 대흥사에도 부도가 유존합니다.

 


하대석.중대석

 


기단부 

 


옥개석과 상륜부

 


청평사 외에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환적당 부도를 살펴보겠습니다.


문경 봉암사

가야산 해인사

거창 연수사

당호는 새기지 않았지만 연수사의 유일한 부도 입니다.

 

대구 용연사


당호는 없으나 홍성익의 논문에서 발췌하였습니다.


"朴昌鎬는 龍淵寺重修碑에 기록된 내용 중에서 다음과 같은 문장에 주목하고 있다.
절 안에 옛날 부처님의 사리를 모신 탑이 있었는데 스님들이 이것을 새로운 것으로 바꾸어 예전의 규모보다 특별히 크게 만들었다. 그 뒤편으로 松坡, 友雲, 幻寂,東雲등의 사리탑을 배열하였으니, 이 분들은 모두 宗師가 될 만한 분들이다. 506)


(506)朝鮮總督府, 朝鮮金石總覽 下, 1919, 1098쪽. 碑文에, 「寺中舊有世尊舍利所藏之塔緇徒
等易以新之特壯于前摸後列松坡友雲幻寂東雲等舍利之塔皆浮屠之所宗者也」이다."


봉화 각화사


당호가 없어 환적당부도를 특정할 수 없습니다


의성 대곡사 부도전


당호를 새기지 않았습니다.


제천 덕주사

칠곡 대흥사지


의성 대곡사는 인동 대곡사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칠곡 대흥사지는 환적당 입적 당시 인동현仁同縣(현재는 경북 구미시 인동동) 지역으로 추정됩니다.

학계에 계시는 분들께서 추적하였으면 좋겠다는 바람입니다.

 

 


청평사 삼층석탑 아래쪽 암반에 2기 마애부도가 있습니다.


 


산인 영월당(山人 影月堂)

 


당호 주인공을 찾지 못했습니다.

오른쪽 명문을 탁본하면 좀 다 정확한 자료를 찾을 듯 합니다.

 


범어 명문

 


석탑 바로 아래 밧줄이 걸린 옆 바위 입니다.

 


벽운당 碧云堂

 


역시 주인공을 찾지 못 햇습니다.



청평사

늘 그리던 환적당부도,(전)설화당부도를 뵈었지만

적멸보궁 인근 동쪽 산능성에 위치한 부도 1기와 인연짓지 못 해 다시 찾을 듯 합니다.

조만간...


2019.0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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