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상주시

상주...신봉리 석조보살입상

임병기(선과) 2019. 2. 7. 1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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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류도 있지만

글은 아래 2007년 답사기로 대신한다.

 

 

여러번 피력하였지만

고려초기

상주, 김천 지역에 유독히 보살상이 많이 남아 있는 까닭이 무엇일까?

 

아울러

성주 가야산 주변에 통일신라 하대~고려초로 이어지는 시기에 많은 비로자나불이 전하는 사유도 궁금하기 그지없다.

 

혹자들은

나에게 연구하라고들 말하지만

무지랭이 재야계로는 꿈도 꿀 수 없는 현실!

 

 

주형거신광

두광 상부의 화염문을 제외하고는 특별한 문양이 없다.

 

보관

화불 3분...

관대

 

귀는 너무 짧다

.

삼도는 희미하고

의문으로 미루어 통견의 법의

 

 

 

 

 

배면

 

 

 

 

보호각인지

감옥인지

저 간살을 낮추면 좋을텐데

 

2019.02.07 

 

아래는

2007.08.03일 글

 

 

 

 

다음 동선이 갈등을 일으킨다. 은척 화북 화서 또는 역방향 코스지만 숙박을 우선 고려 첫번째 동선을 택했다. 물론 사전에 연락된 화서에 귀농생활을 하시는 우리카페 고운님을 뵙는 것을 염두에 둔 선택이기도 했다.

 

양진당에서는 통화가 되어 기다리겠다는 님인데 통화두절이라 마음은 급했지만 화서면소재지에서 그마을에 사신다는 촌부를 태우고 천연기념물 반송으로 향했다. 촌부의 말씀에 의하면 지금도 정월보름에 마을의 안녕을 위해 동제를 올린다고 한다.

 

"상주시 화서면 상현 1리 속칭 창안 마을에는 속리산 정 2품 소나무 모양의 웅장한 자태를 지닌 수령 5백년을 추정하는 소나무가 왕성하게 자라고 있다. 이 마을은 신라 경덕왕 때 몇 사람이 마을을 이루었고 고려 때 화령현이라 하였는데 속리산 줄기의 봉황산이 마을을 에워싸고 죽전, 새재골, 창안, 하현, 주양, 당두, 무동 등 7개 자연취락을 형성하였다. 이 마을은 화령현의 요새지로서 죽전은 대장군이 살던 곳이며, 대모골로도 불렀고 봉황산의 봉황새가 대나무 열매를 먹던 대밭이 있었다 하여 대밭골이라고도 불렀다.

새재골은 일명 재골이라 불리고 사찰이 있고, 창안은 화령현의 정부미를 보관한 창고터라 한 하현의 마을이고, 당두는 옛날 당대가 무동은 화령현 당시 군인촌이라하였다는 옛말이 전해오는 것으로 보아 이곳은 지형적으로 보아 요새지임이 틀림없고, 이러한 요새지 일수록 숲이 왕성하고 깊게 이루어 요새지를 은폐하기에 알맞은 소나무가 많았으리라 믿는다.

 

 

이 상현의 노송도 이 때에 어린 소나무로 자라고 큰 나무들은 모두 잘리고 외로이 자라 오늘에 이르고 있다. 나무 밑뿌리는 헝클어진 실타래 마냥 뒤엉켜 그 폭이 5m에 이르고 두 가지가 수간으로 해서 각각 3가지로 벌려 얼핏보기엔 6포기가 한데 묶여 있는 듯하며 그 중 남쪽의 3가지는 허약하고 북쪽 3가지는 1m 20cm의 굵게 뻗어 올라 왕성하다.

높이 15m에 수관이 25m에 삿갓 모양의 웅좌함을 뽐내고 있고 위용을 더욱 높이기 위해 이무기(큰구렁이)가 보금자리를 잡아 안개가 낀 날이나 먹구름이 두텁게 낀 날에 무엇을 뜻하는지 이무기 울음소리가 들리고 마을 사람들의 접근을 막고 있다. 이무기 소리가 들릴 때엔 안개가 노송의 허리를 끼고 덮어 토성의 형태를 이룬다. 동민들은 소나무를 숭상하고 어떠한 일이 있어도 노송을 해치는 일이 없고 떨어진 낙엽이라도 땔감으로 사용하지 않으며 만일 낙엽 진 솔잎을 쓰면 재앙을 입는다고 한다."...상주시청


 

이건 무슨 조형물? 반송 옆에 여러기가 조성되어 있었다.


 

비석거리. 화서면 소재지 초입에 관음보살을 등지고 서있다. 설마 그 지독한 패러독스의 발로는 아닐테고...

 

 

대한민국표 보호각이다. 저놈의 간살!!!

영어의 몸으로 어디 중생을 구제할 수 있었겠는가???


 

"주형(舟形)으로 된 화강암(花崗岩) 판석(板石)에 양각(陽刻)한 보살상(菩薩像)이다. 불상(佛像)은 삼면보관(三面寶冠)을 쓰고 통견의(通肩衣)를 걸치고 두광(頭光)과 신광(身光)을 모각하였다. 보관(寶冠)에는 결가부좌(結跏趺坐)한 화불(火佛) 3구(軀)와 관대장식(冠帶裝飾)이 양각(陽刻)되어 있고 통견의(通肩衣)는 간결(簡潔)한 태조선문으로 두껍게 모각(模刻)하였다.

면상(眠像)은 마멸(磨滅)이 심하나 윤곽(輪廓)이 풍만(豊滿)하고 이목구비(耳目口鼻)가 반듯하다. 광배(光背)에는 원형두광(圓形頭光)과 주형신광(舟形身光)을 한 줄의 양각태선(陽刻太線)으로 나타내었고 두광(頭光)위에 화염문(火焰文)을 새겼다.

이 불상(佛像)은 간결(簡潔)하면서도 장식성이 적고 퇴화(退化)된 양식(樣式) 표현(表現)으로 보아 고려초기(高麗初期)의 작품(作品)으로 추정(推定)되며 불상(佛像)의 높이는 230㎝이다."...문화재청

 

화서를 떠나 화북 즈음에서 폰이 울리더니 왜 전화를 하지 않았냐고 우리님이 성화가 만만치 않다. 더운 날씨에 땀 흘리며 산나물 준비했는데 그냥가면 어떡하냐고 당장 돌아 오라신다. 숙박을 문경에서 하려고 문경님들과 통화되어 불가피하게 그렇게 되었습니다.

 

산나물은 영원히 유효한 약속 맞지예?

 

2007.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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