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북도/순창군

순창...강천사 오층석탑.부도전

임병기(선과) 2018. 11. 12. 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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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만 업데이트

 

 

 

 

 

 

 

 

 

 

 

 

 

 

부도전

몇년 사이에 3기 부도가 더 봉안되었다.

 

 

이월당(伊月堂)

 

 

 

 

월하당(月河堂)

 

 

 

 

당호가 훼손?

 

 

 

미월당(眉月堂)

 

 

 

 

2018.10.28

 

아래는

2011.07.26일 글이다.

 

 

도선교. 도선국사가 창건한 절집인 모양이구나. 어렵게 인연지은 절집이다. 첫번째는 쏫아붓는 폭우를 뚫고 달려왔지만 계곡물 범람을 우려한 공단직원에 의해 출입을 봉쇄당하였고 또 한번은 초딩 동기들과 관광버스 대절하여 등산하기로 약속되어 있었지만 집안 혼사로 무산되었었다. 그래서인지 늘 마음속에 죄스런 빚으로 남겨진 강천사. 장독대 형상의 기둥의 상징성이 분명 있을텐데.

 

 

주차장을 지나 초입에서 만나는 병풍폭포. 병풍바위를 비단처럼 휘감는 폭포로 높이 40M, 폭15M, 낙수량은 분당 5톤이며 작은폭포는 높이 30M,폭5M 이다,전설에 의하면 속세에서 죄를 지은 사람이 병풍바위 밑을 지나면 죄가 소멸 한다고 하여 물속에 뒤어 들고 싶었지만 입수금지 경고문이 발길을 잡더라.

 

강천산은 1981년 1월 7일 전국에서 최초로 군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순창에서 정읍 쪽으로 약 8㎞ 가게 되면 이 곳 강천산 입구에 이른다. 진입로 좌측에는 넓고 아름다운 맑은 강천호가 있다. 파란 하늘의 뭉게구름이 비단결같이 잔잔한 호수 위로 비춰질 때면 찾는 이의 마음을 설레이게 한다.
 

수려한 산세와 울창한 숲, 기암괴석, 그리고 짜릿한 스릴을 느낄 수 있는 절경 등의 볼거리를 갖춘 풍부한 관광자원이 있어 자연공원으로 지정을 받게 되었다. 산세가 웅장하거나 높은 편은 아니지만 계곡이 깊어 사시사철 맑은 물이 흐른다. 사람들은 광덕산은 몰라도 강천산은 잘 알고 있는데, 강천산이라는 이름은 원래 강천사라는 절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한다.


강천산은 전북 순창군 팔덕면 청계리 996번지 일대에 위용을 자랑하고 있는 해발 583.7m와 광덕산(해발565m)을 비롯하여 해발 603m의 산성산은 연대봉, 선녀봉, 장군봉, 왕자봉, 형제봉, 신선봉, 옥호봉, 수령봉, 깃대봉, 천지봉으로 이루어진 빼어난 아름다움을 간직한 자랑스런 산이다.골골마다 발원하여 흐르는 맑은 물이 중천으로 합류하여 돌과 돌, 바위와 바위에 부딪히는 물소리는 계곡을 울리며 강천호로 흘러간다. 푸른 숲 맑은 물, 아름답고 시원한 계곡, 계절마다 산의 경관이 변하고 그 경관이 한결같이 수려하여 호남의 금강 강천산이라 부른다.

 

 

강천산군립공원. 영문도 모르고 차량 출입금지 푯말에 불만을 가졌지만 진입공간에 신발과 양발을 벗고 맨발로 흙을 밟으며 산책할 수 있는 트레킹 코스가 있었다. 신발을 벗어들고 유유자적 즐기는 답사이어야 하건만 발바닥에 전해오는 촉감 대신 눈에 담기도 바쁜 시간의 노예가 되어 길을 재촉했다.

 

 

진입로 요소요소에 설치된 벤치에 앉으면 명경지수의 계곡물 사이로 자유롭게 유영하는 1급수에서만 생존하는 송어를 볼 수 있다. 

 

 

벌써 몇번째 다리인가? 절집에 가는 길 어니 다리는 멀고도 멀다 . 두륜산 대흥사는 9개 었던가?  통과의례? 그건 나의 마음 가짐을 돈독히 하라는 암시겠지만 이른 아침임에도 불구하고 날은 덥고 땀은 비오듯 흘러내려 오히려 자세가 흐트러지니 사천왕이든 금강이든 나투시어 건방진 중생 버릇을 고쳐야하는데 염천에 휴가를 떠난 듯 절 집 진입공간은 한가롭다.

 

 

 절에서 전하기로는 887년(진성왕 1)에 도선국사가 창건하고, 1316년(충숙왕 3)에 덕현(德賢) 스님이 중창하면서 오층석탑을 세웠다고 한다. 조선시대에서는 1482년(성종13)에 작성된 「강천사모연문」을 통해 이 해에 절이 중창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모연문은 신말주(申末舟, 1439~?)의 부인 설씨가 적은 글로서 당시 강천사의 중건에 관련된 내용이 잘 기록되어 있다. 신말주는 신숙주(申叔舟)의 동생인데,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그는 1470년(성종 1)에 순창에 내려가 오랫동안 있었다고 한다. 이 모연문에 따르면 절은 옛날에 신령(信靈) 스님이 광덕산 가운데서 명승지를 골라 그곳에 초암을 짓고 지낸 것에서부터 유래한다고 한다.

 

그 뒤 세월이 흘러 절이 폐허가 되자 중조(中照) 스님이 서원을 내어 시주를 모아 중창했는데, 부근에 부도가 있으므로 절이름을 임시로 부도암으로 불렀으며, 이 때 절은 비록 자그마한 규모였지만 청정한 수도처로서 유명했다고 한다. 그러나 얼마 안 있어 절은 다시 퇴락되었고, 중조 스님은 설씨의 도움을 얻어 중창을 이루었다고 한다. 이 때의 중창은 설씨 부인의 힘이 매우 컸는데, 가부장적 남성 위주의 권위가 사회를 지배하던 당시에 여인의 힘으로 큰 불사를 이룬 점에서 의미가 있다. 그리고 모연문에 나오는 절의 창건 부분이 절에서 전하는 내용과 다소 차이는 있으나 중창 내력을 잘 전하는 점에서도 중요하다.

 

이후 절은 임진왜란때 불타 없어졌으나 1604년(선조 37)에 소요(逍遙)대사가 중창했다. 한편 1760년(영조 36)에 출판된 『옥천군지』에는 당시 절의 부속암자로 명적암 ․ 용대암 ․ 연대암 ․ 왕주암 ․ 적지암 등 5개 암자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어 절의 규모가 컸음을 집작케 한다. 이어서 1855년(철종 6)에는 금용(金容) 스님이 중창했다.

 

 

계곡에 걸쳐진 다리가 예사롭지 않다. 물을 건너기 위한 목적이라면 저렇게 견고하게 건설하지 않고 사진 아래에 보이는 징검다리가 오히려 절집 분위기에 어울릴텐데. 암자로 가는 길 아니면 다른 용도가 있을 것 같아 보이지 않는 안내문을 원망하지 않고 발품을 팔았더니 부도전이 눈앞에 펼쳐진다.

 

 

부도는 현재 4기가 있는데, 부도군은 사찰의 정문에서 300m 떨어진 위락단지 방향으로 위치해 있다. 부도군은 문헌자료가 없어 어느 때 주석한 스님의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석종형으로 지대석과 석종, 보주로 되어 있다. 고려시대 후기의 사회적 불안과 불교의 퇴락으로 접어드는 상황에서 간략한 형식의 부도를 만들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부도에서 조각은 찾아볼 수 있다.

 

현재 부도밭에는 4기의 부도가 있는데 부도에 새겨진 법명은 세월이 오래 지나 모두 풍화되어 알 수 없으나 법명은 알 수 있다. 부도 전면에서 왼쪽 첫 번째 것은 이월달(伊月堂), 두 번 째는 월하당(月河堂), 세 번째는 미상, 네 번째는 미월당(眉月堂)이다. 부도군은 현 주지스님이 부임하여 정리하였다.

 

 

대웅전은 1961년에 정면 3칸, 측면 3칸에 겹처마 위에 팔작지붕으로 만든 목조건물이다. 원형주춧돌 위에 배흘림기둥을 하고 있으며 주심포형식으로 세웠다. 외부 벽화에는 심우도가 그려져 있다. 창호는 교살창이며 중앙칸은 3분합이고 좌우의 협칸은 각각 2분합으로 되어 있다. 내부의 천장은 목조 구조가 들어나 보이는 연등천장이고 바닥은 우물마루이다.

 

 

대웅전 삼존불. 여러자료에는 현판 때문인지 석가여래 삼존불로 설명했지만 미타 수인의 아미타불 삼존불 같다. 좌우 협시가 지장과 관음보살이다.

 

 

대웅전 중정의 훼손된 석등부재. 기단과 옥개 상륜의 보주가 남아 있다. 새로 조성된 두 기 석등이 불을 밝히고 있지만 옛부재를 활용하여 간주석과 상대석 화창을 복원하였으면 좋을텐데. 어느 절집 스님에게 그런 이야기를 하였더니 새로 조성하는 것이 훨씬 비용이 적게 든다고 했다. 빈자일등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그러한 사찰이정표에 천년고찰이라는 문구는 왜 표기하는지 모르겠다. 사찰의 격은 화려하게 꾸미는 것이 아니라 그윽하게 배어나오는 것이다.

 

 

강천사 다보탑(多寶塔). 왜 다보탑인가? 석가탑과 더불어 초기에는 쌍탑이었을까? 아마 다보여래 경전의 법사리를 봉안하여 그렇게 불리운 것은 아닐지? 

5층 탑은 고려 충숙왕 3년(1316)에 덕현선사가 강천사를 중창할 때 세운 것이라 한다. 그런데 1950년에 이르러 6.25동란 때 강천사의 전체 건물이 소실되는 화를 입었는데 그때 이 탑도 화를 입어 도괴된 바 있었다. 그후 1959년 당시의 주지 김장엽 스님이 강천사를 다시 세울 때 탑도 다시 세우게 된 것이다.  2,3,4층의 옥개석이 6.25당시의 총탄에 의해 일부가 파손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92호.  방형의 대석 위에 초층 탑신을 직접 세운 석탑으로, 탑신과 옥개석은 각각 1매석으로 구성되었다. 초층 탑신에는 우주가 모각되었고 그 위에는 왼쪽 부분이 심하게 파손된 옥개석이 올려져 있다. 옥개석은 상당히 높은 3단의 층급받침을 갖추고 있는데, 처마는 직각을 이루며 옥개석의 윗면에는 1단의 낮은 탑신받침이 조출되어 있다. 2층과 3층 탑신도 우주가 모각되었지만 초층 탑신에 비해 급격히 축약된 모습이다.

 

층급받침 역시 3단으로 구성되었지만 1층의 그것보다 더 높다. 옥개석 상부에는 1단의 탑신받침이 조출되어 있다. 4층 탑신석은 3층 탑신석에 비해 높고 우주가 모각되지 않았으므로 또 왼쪽 부분이 치석되지 않은 점에서 후보된 것으로 보인다. 상륜부는 현재 노반이 결실된 채 복발과 보륜이 1매석으로 구성되었다. 고려시대의 석탑으로 추정된다.

 

 

대웅전 중정 명문이 새겨진 괘불대 3기가 있는데, 이 가운데 하나에는‘ 乾隆八歲十五’로 되어 있어 1700년대에 조성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인터넷에 떠도는 많은자료에 당간지주로 표기되어 있어 안타깝다. 자료를 마구잡이로 퍼가서 유포시킨 결과이다. 전남 강진 어느 절집 스님 말씀대로 구태여 구분하는 내가 문제인가?

 


보살상은 사찰 정면 우측 산 자락에 자연적으로 서 있는 입상 관세음보살상이다. 이 보살상은 사찰 특에서 옆면으로 보아야만 뚜렷한 관세음보살상이며 정면에서는 그저 평범하다. 관음상 앞 건너편 산자락에 동암(東庵)이라는 암자가 있어 옛 스님들이 관음상을 보고 관음기도를 하지 않았나 하는 추측이다. 이 석불 관음상은 언제 되어 있는지 알 수 없으나 구전에 의하면 마음이 청정하지 못하면 관음상으로 보이지 않으며 평범한 돌로 보이고, 선을 많이 베풀어 마음이 청정한 사람만이 관음상으로 나툰다는 것이 알려져 있다.



 

절의대

삼인대


팔덕면 청계리 소재한 강천사(剛泉寺)의 바로 앞 내를 건너 남쪽에 정면 1칸의 비각(碑閣)이 보이는데 바로「삼인대(三印臺) 비각(碑閣)」이다.

비각 안에는 높이 157㎝, 폭 80㎝, 두께 23㎝의「삼인대(三印臺)비(碑)」가 세워져 있다. 이 비(碑)는 숭정후재갑자(崇禎後再甲子, 1744년 영조20년) 4월에 세운 것으로 홍여통(洪汝 通), 윤행겸(尹行謙), 유춘항(遊春恒)등 군의 선비들이 발기하여 대학자인 도암(陶庵), 이재 (李縡, 1680∼1746)가 비문(碑文)을 짓고, 정암(貞庵), 민우수(閔遇洙, 1694∼1756)가 비문의 글씨를 썼으며 지수재(知守齋), 유척기(兪拓基 1691∼1767)가 전서(篆書)를 쓴 것이다.

연산군(燕山君)의 학정이 극에 이르자 1506년(연산군 12년) 드디어 박원종(朴元宗, 1467∼ 1510), 성희안(成希顔, 1461∼1513) 등이 주동이 되어 연산군(燕山君)을 몰아내고 성종의 둘 째 아들이며 연산군의 이복동생인 진성대군(瞋城大君)을 추대하여 왕위에 오르게 했다. 이것이 이른바 중종반정(中宗反政)이다.
신씨(愼氏)는 연산조때 좌의정(左議政)을 지낸 신수근(愼守勤)의 딸이었다. 중종반정(中宗反政)을 주동하고 성공한 박원종(朴元宗)등 반정공신(反政功臣)들은, 신수근(愼 守勤) 일파가 반정을 반대했다는 이유로 숙청하고 이어 신수근의 딸을 왕비(王妃)로 두었다가는 뒷날 후환이 있을 것을 염려하여 중종(中宗)에게 폐비(廢妃)를 강요하였다. 이에 중종 은 처음에는 반대하였으나 결국 공신들의 강압에 못이겨 신씨(愼氏)를 폐출(廢黜)하고 윤여필(尹汝弼)의 딸인 숙의(淑儀) 윤씨(尹氏)를 새 왕비(章敬王后)로 맞아들였다.

장경왕후 윤씨(章敬王后 尹氏)는 왕자를 낳고 살다가 결혼한지 10년만인 중종 10년(1515) 에 사망하였다. 장경왕후(章敬王后)가 사망하자, 이때 순창군수(淳昌郡守)인 충암(庶庵) 김정(金淨, 1486∼ 1521), 담양부사(潭陽府使) 눌재(訥齋) 박상(朴祥, 1471∼1530), 무안현감(務安縣監) 석헌(石 軒) 유옥(柳沃, 1485∼1519)등 세사람이 비밀리에 이곳 강천산 계곡에 모여서 과거 억울하게 페위된 신비(愼妃)를 복위시킴이 옳다고 믿어, 각기의 관인(官印)을 나뭇가지에 걸어 맹세하고 상소(上疏)를 올리기로 결의하였다. 이때 이들이 소나무 가지에 관인을 걸어놓고 맹세한 곳이 여기라 하여 이곳을「삼인대(三印 臺)」라 부르게 된 것이다.

세 사람은 관직으로부터의 추방은 물론 죽음을 각오하고 상소문(上疏文)을 올렸는데, 당시 무안현감인 유옥(柳沃)에게는 노모(老母)가 계시는데 형제가 없었다. 그래서 순창군수인 김정(金淨)과 담양부사인 박상(朴祥)은 "우리는 형제가 있으므로 죽게 되어도 다른 형제가 부모를 모실수 있지만 그대가 만약 불행한 일을 당한다면 노모를 봉양할 사람이 없으니 그대의 이름을 빼는 것이 옳다"고 하여 상소문(上疏文)에는 유옥(柳沃)의 이름을 적지 않았다.

이렇게 하여 신씨(愼氏) 복위상소(復位上疏)가 올라가니 조정에는 반정공신(反政功臣)들이 적극 나서서 이들을 잡아다가 처형하려고 하였다. 이에 정광필(鄭光弼)이 극력으로 말려서 목숨은 건질 수 있었으나, 김정(金淨)은 함림역(含琳 )으로 박상(朴祥)은 오림역으로 유배 되었다. 김정(金淨)은 그로부터 4년후인 1519년의 기묘사화(己卯士禍, 中宗 14)에 조광조(趙光祖)와 함께 연루되어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1521년에 사사(賜死)되었는데 그때 그의 나이 36세였다.

그리고 유옥(柳沃)은 복위상소(復位上疏)로 인한 화는 면했지만 얼마 후에 병으로 죽었다. 그후 1775년 (영조 51년)에 조정에서는 신비(愼妃)를 복위하였고, 단경왕후(端敬王后)라 추증했다.

삼인대(三印臺)는 지난 1963, 1977, 1987, 1991년에 보수(단청)하고 주변에 철책을 세워 보호 관리하고 있으며 1978년에는 "삼인대 비(三印臺 碑)의 내용을 한글로 번역 음각하여 비각 (碑閣) 옆에 새로운 비석을 세웠다. 1994년 지역의 향토인과 세 분 선생의 후손들에 의해 삼인문화선양회가 구성되어 1995년부터 매년 8월 삼인문화축제를 삼인대(三印臺)에서 개최하고 있다

 

모과나무


이 강천산의 앞쪽으로 가까운 곳 삼인대와의 사이에 한 그루 노거수가 서 있는데 나무의 높이는 20m, 둘레는 3.1m, 수령은 300년이 된 모과나무이다. 이 모과나무는 지금도 꽃을 피우고열매를 맺고 있어 가을에 이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기분좋은 볼거리가 되고 있다. 순창군에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이 모과나무를 지난 1981년 보호수를 지정하고 관리하다가 지난해 1998년 1월 9일에는 기념물 제 97호로 지정하 여 관리하고 있다.

 

 

강천사...윤인구

 

장 맞드는 게으른 사월
강천사나 가볼까
길을 막는 걸쭉한 농짖거리
순천아줌마 보따리도 좀 들어주고
삼인대에 주저앉아 귀찮은 세월 벗어놓고
맞지도 않는 손뼉장단을 치다보면
한나절 품팔이 가신 어머니 오시나
아랫재 넘어오는 소쩍새 울음소리
아이는 입이 파랗게 꽃을따서 먹었지
소쩍 소쩍 온 산에 붉은 진달래
청승맞게 울어대는 봄날
있지도 않았던 복사골 처자와
옛사랑이 그리워지면
무작정 하루 쯤 전원을 꺼버리고
장 맞 익어가는
강천사나 가볼까

 

2011.07.26

***순창문화원.문화재청.한국전통사찰정보를 참조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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