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군위군

군위...지보사 삼층석탑

임병기(선과) 2018. 10. 16. 0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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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마누라와 동행기

(오류도 있지만 그대로 옮겨왔다)


군위읍내에서 소보면의 법주사로 방향을 잡으려다 어부인에게 자문을 구했더니 돌아올 길은 참배하지 말고 한 방향으로 가자고 하명하신다.


네네네!!! 

할 수 없이 예전에 세 가지 보물, 즉 큰 가마솥, 단청물감의 재료인 흙그리고 맷돌이 있어 선방산 지보사(持寶寺)로 이름 지어진 절집으로 가는  길은 매미의 영향에서 벗어난 탓인지 가을 들판에 풍년가가 울리는 듯하다.좁은 소로를 따라 산길을 올라가며 차창에 비치는 시각적 즐거움만으로는 만추의 저무는 향을 가슴에 담지 못함이 아쉬운지 마누라는 창문을 열고 농익은 내음을 마음껏 포옹한다.

신라 의상대사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알려진 가람은 근래에 쌓은 석축마저 싫지 않는 것은 오래된 두 그루의 은행나무의 노란 은행이 먼저 눈에 들어온 까닭도 있겠지만 계단을 오르다 말고 돌아 본 주차장 저편의 소박한 석종형 부도, 사람을 억누르기 보다는 감싸 앉는 느낌의 ..루, 아담한 3층 탑과 절집 가장자리에 가득한 꽃들이 마치 여염집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들어낸 것이,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이 부끄러운 듯 마치 첫 선을 보는 그윽한 맵시를 풍기는 한 복을 갖춰 입은 자태의 애기씨 처럼  3층탑은 참배객을 맞이하고 있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서면 한껏 멋을 낸 애기씨의 치맛자락을 보는 느낌으로 다가온다.
즉 하기단을 1탱주로 양분하여 동물상, 상기단의 신중상, 1층 몸돌에는 문비가 새겨져 있으며 옥개석 받침이 4단으로 줄어든 것으로 보아 일견 신라 탑으로도 보이나 1층 탑신의 판석 괴임이 있어 오히려 고려초기의 탑이라 여겨진다.

꽃밭이 조성된 탑지 한켠에 짝이 맞지 않는 맷돌이 뒹굴고 있어 옛 시절의 3대 보물이 아닐까 라고 생각도 들지만 그 맷돌은 이미 물 건너 왜놈 손에 넘겨간 지 언제인데,오락가락 절집을 소요하고 있는 나를 버려두고 마눌은 대웅전에 들어간 지 오래이다.
마눌의 손짓 따라 대웅전에서 삼배올리고 뜰을 나왔건만 객도 승도 보이지 않는 적막강산이기에 절집 공양간을 기웃거려본들 무엇하랴!!!


다시 찾고 싶은 가람으로 메모리하면서 산길을 내려오는 도중에 마누라가 급히 소리친다.
“잠깐만! 저기 사과 좀 사가지고 가자”

 

지보사를 내려오는 산길 옆에 크지 않은 과수원 밖에 내 눈엔 보이지 않았는데 마누라는 사과를 수확하여 차에 실고 있는 노부부를 보았던 모양이다. 저기 가면 사과를 싸게 살 수 있을 거라며 기어코 나를 끌고(?) 간다. 하지만 촌로들은 대구 농산물 시장에 출하한다며 완곡히 거절하지만 울 마누라 찰거머리가 되어 사과를 사기위해 대단한 수완을 발휘하는데 -할아버지예! 차에 실린 사과 집에 가지고 가서 상품분류 작업해서 또 박스에 포장해야 되잖아예. 그러니 상자채로 파이소- 지켜보는 내가 민망스러울 정도이다.

무뚝뚝한 하지만 사람 좋아 보이는 인상의 어르신이 “이 나무상자는 26KG고 도매 시장에 나가는 박스는 15KG에 만오천원에서 이만원 받는데 어떻게 값을 매겨?“ 라는 말이 떨어지게 무섭게 울 마누라 “할아버지 큰 사과가 이만원이지예” 묻고서는 할아버지의 답도 듣지 않고 이만원 드릴테니까 파이소예 란다. (그러면서 크고 때갈 좋은 사과가 많이 보이는 상자를 가리킨다)

할아버지가 웃으시면서 반승낙을 하시자 날 보고 얼른 내리지 않고 뭐 하느냐는 식의 눈빛을 보낸다.

그렇게 사과 흥정이 끝났는데도 마눌은 계산할 시늉이 없더니만 날보고 계산하란다.
자기는 지갑을 가져오지 않았다며(제기럴 마눌 돈도 내 돈이고, 내 돈은 내 돈인데...)
우야겠노?

박봉의 남편 땜에 순하디 순한 사람이 저렇게 변했는데...
그러고도 자리 뜰 생각도 않고 자기도 친정이 시골이라며 고생 많으시다는 둥의 어르신들이 기분 좋아할 말만 장황하게 늘어놓더니만 바구니에 담긴 열과를 가리키며 저 사과도 팔 겁니까? 물으니 어르신들 마눌의 심사를 꿰뚫고 “그냥 가져가세요” 라며 비료포대를 건내신다.


ㅋㅋㅋ

사과상자보다 더 많이 담긴 열과를 끙끙대며 들고 차에 싣고서는 만족한 표정이 얼굴 가득하고 콧노래까지 흥얼거린다.

여기까지 와서 탑리의 오층석탑을 안 보고 가면 후회할 것 같아 넌지시 야그했더니 기분 좋은 목소리로 “맘대루 해”

장중한 느낌을 주는 탑리 오층탑은 전탑 양식과, 목탑 양식의 특징을 고루 갖춘 탑으로 목탑에서 석탑으로 변해가는 과정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즉 탑신의 우주와 탱주, 탑신 기둥의 배흘림, 옥개석 추녀의 반전 이 목조건축의 양식 이며, 층단형의 옥개석 낙수면은 전탑의 형식인 것이다.

차에서 한참이나 내리지 않고 뒤에 온 마누라의 손에는 빠알간 사과가 쥐어져 있지만 관심을 두지 않고 물러섰다, 다가섰다를 반복하며 말없이 탑을 쳐다보고 있는 나에게 사과를 건내길래 야 이 사람아 점심 맛없게 나중에 후식으로 먹자고 했더니 내 참
기가 막혀서! “이게 점심이야!“ 랍신다.


아이들에게는 전화를 해서 먹고 싶은 것 사먹으라고 해놓고는 우리 둘은 점심값으로 이만원을 지출했다는 괴상망칙한 논리로 날 설득해 놓구선 저녁 맛나게 해주신단다. 에이 열 받어!

옥개석 낙수면에 자란 잡초의 마른 모습이 마눌의 헝클어진 머리칼처럼 보이고, 중수기념으로 부끄럼 없이 탑신에 글을 모각해 놓은 이름도 거창한 석탑보존회의 후안무치한 작태위로 마눌의 얼굴이 오버랩 되어 나도 몰래 담배를 꺼내 불었는데도 마눌은 고개 돌려 모른 채 해준다.

이거 원!!!

석탑 순례기인지 공처가의 참담한 고백인지 모르겠군.... 쩝!!!

2003.10.26

 

 

지보사 삼층석탑

산너머 극락사가 안태고향으로 전하며, 군위 읍내 절골로 옮겨갔다가 지보사로 돌아온 탑이라고 한다.

그런까닭 때문인지 지보사 중정이 아닌 사역 중심 배치에서 벗어나 자리하고 있다.


2층기단 위에 3층 탑신을 올린 전형적인 통일신라 따르고 있으나 전성기를 지나 장엄을 갖추었다.

하층기단

지대석위에 중대석,갑석으로 구성되었으며, 중석은 양우주. 탱주를 모각하고, 탱주사이에 사자상을 돋을 새김으로 새겼다

두터운 갑석 상면에는 물매가 있으며, 전각 반전이 희미하고, 상부에 각호각 3단 굄을 조출하였다.


상층기단

중석에는 양우주, 1개 탱주를 표현하였으며, 각각의 면에 2구씩 팔부신중을 봉안하였다.

갑석에는 부연이 있고, 물매는 희미하며, 중앙에 앙련이 조각된 방형 별석의 괴임을 올렸다.


탑신

탑신과 옥개석은 각각 일 석이며, 탑신에는 양우주가 모각되어 있다.

초층탑신에는 4면에 문비가 조각되어 있다.


옥개석

낙수면 물매는 크게 급하지 않으며, 전각의 반전도 날카롭지 않다.

층급받침은 전층 4단, 상부에 2단 탑신


상륜부

노반, 복발,앙화가 남아 있다.


일견 9세기 탑으로 보이나 개인적으로는 별석 굄, 문비, 층급 받침 등으로 고려전기 석탑으로 추정된다

(아직도 정확한 조성 년대를 두고 논란이 있는 듯 하다)


 

팔부중(다음백과사전)

"명중팔부(冥衆八部)·천룡팔부(天龍八部)·팔부신장이라고도 한다. 인도의 고대에 불교 성립 이전부터 있던 여러 신인데, 불교에 수용되어 불법과 불국토 수호의 역할을 담당했다. 팔부신중은 〈법화경〉을 비롯한 〈무량수경〉·〈대반야경〉 등 여러 경전에 설명되어 있으므로 그 성립은 비교적 오래된 것으로 보인다.


경전의 내용에 따라 여러 설이 있어 경전상으로도 여래팔부중과 사천왕에 소속된 팔부중으로 나누어지는데, 일반적으로 팔부중은 부처의 설법을 듣기 위해 모여든 여러 중생을 의미하는 여래팔부중을 말한다. 즉 천(天)·용·야차(夜叉)·건달바·아수라(阿修羅)·가루라·긴나라·마후라가(摩睺羅伽)를 가리킨다. 그러나 사천왕에 소속된 팔부중은 건달바·비사사(毘舍闍)·구반다·벽협다(薛荔多)·용·부단나(富單那)·야차·나찰(羅刹) 등을 말한다. 여래팔부중과 사천왕팔부중 가운데 서로 일치되는 것은 건달바·용·야차뿐이다.


팔부중상은 원래 고대 인도 신들의 모습이 서역을 거쳐 중국과 우리나라로 들어오면서 점차 투구와 갑옷을 입은 무장한 모습으로 정형화되었다. 특히 건달바는 사자관(獅子冠)을 쓰고 손에는 삼차극(三叉戟)을 들고 있으며, 아수라는 다면다비상(多面多臂像)이고, 긴나라는 사람의 머리에 새의 몸과 날개를 가진 모습으로 표현된다. 우리나라의 팔부중상은 보통 무장형으로 자세나 지물(持物)에 일정한 규범이 없이 석탑의 기단부나 불화 등에 다양하게 나타나는데 통일신라시대의 석굴암에 조각된 팔부중상이 가장 대표적인 예이다."


 

동면


 

가루라.아수라


   

사자상


 

북면


 

마후라가.천신


 

사자상


 

서면


  

용.간나라



사자상

 


남면

 


건달바.아차

 

 


문비

 


각 4단의 촉개석 층급받침

 


상륜

노반.복발.앙화


3층 탑신은 후보물(?)

 

 


부도전

 


지보사 선방에 계시던 중

4대강 반대를 외치며 소신공양한 문수스님의 부도.

 


무염당(無染堂)부도

설마 성주산문 개종조는 아니겠지?

 

 


2018.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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