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남도/함양군

함양...지리산 두류암지 부도

임병기(선과) 2017. 11. 11. 19:15

 

 

 

두류암지.

벽송사 옆을 통과. 광점동 주자창에 주차후 헤맨 시간 포함 1시간 20분 소요되었다.

의병장 석상룡선생 묘소에서 폰 오작동으로 두류암지 부도는 산행 중에 만나 함께 두류암지를 들린  광주에 거주하시는 분이 보내주신 사진이다. 거듭 감사 말씀드린다.

 

광점골 주차장.얼음골 독가촌 (40분). 독가촌에서 개울 4번 건너 두 계곡 합수점을 건너 능선 100여미터에서 우측길.석상룡 선생 산소

두류암지. 100여미터 진행. 부도(40분)

 

 

 

 

두류암지는 선비들의 옛산행기에 여러 차례 등장한다.

(자료 지리99카페. 가객님.과일가게 청년 님의 글에서 발췌하였다)

 

1.1580년 4월 5일~4월 11일, 변사정.유두류록(遊頭流錄)

초7일에 아침 일찍 밥을 먹고 출발하여 용유담(龍遊潭)을 지나 두류암(頭流庵)[*현 어름터의 두류암터]에 도착하였다. 층층의 벼랑이 깎아지를 듯 솟아 있고 절벽이 만 길 높이로 우뚝 서 있었다. 온갖 꽃이 다투어 피어나니 꽃향기가 계곡을 온통 뒤덮었다. 하루 종일 앉아서 완상하니 날이 저무는 것도 몰랐다. 마침내 선방(禪房)에 들어가 함께 잤다

 

*변사정

1529(중종 24)∼1596(선조 29).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본관은 장연(長淵). 자는 중간(仲幹), 호는 도탄(桃灘).  이항(李恒)의 문하에서 수업하였고, 1583년(선조 16)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경기전참봉(慶基殿參奉)이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남원에서 2, 000여명의 의병을 모집, 정염(丁焰)·양사형(楊士衡) 등에 의하여 의병장으로 추대되었다. 체찰사(體察使) 정철(鄭澈)이 비장(裨將) 이잠(李潛)을 보내어 그의 부장(副將)이 되게 하였다. 만년에 지리산 산내면 내령부근에 정자를 짓고 우거.

 

 

2.1594년 <조경남>선생의 [지리산 난중일기]

11월24일.어둘 녘에 한 사람이 와서 알리기를, 왜적 50여 명이 오늘 낮에 두류암(頭流菴)으로 들어와 이내 흩어져 산을 뒤지고 있습니다.” 하였다.

 

3.1610년. 9월 2일 ~ 9월 8일. 박여량선생의 [두류산일록]

두류암과 상류암으로 가는 갈림길에 이르렀다. 두류암은 예전에 내가 유람하며 쉬었던 곳이지만, 상류암은 아직 가보지 못한 곳이라 나는 여러 사람들에게 상류암으로 가는 길을 선택하도록 강요하였다. 상류암은 묘운이 새로 지은 곳으로, 상봉에서 내려가는 길이 아직 나지 않았다. 숲 속에 난 한 갈래 도랑길을 겨우 찾아 등성이를 넘기도 하고 골짜기를 따라가기도 하면서 물고기를 꿴 것처럼 한 줄로 내려갔다. 한 낭떠러지에 이르렀는데 위로는 잡을 만한 것이 없었고, 아래로는 몇 길이나 되는 절벽이었다. 다른 사람들과 따라온 승려들 모두 개미 떼처럼 절벽에 붙어 내려갔는데, 나는 발을 내딛지 못했다. 어쩔 줄 몰라 안절부절하고 있을 대, 멀리서 나무를 베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는 산을 잘 타는 승려들이 내가 못 내려오리라 짐작하고 기구를 설치하여 나를 내려가게 하려는 것이었다.

 

4.1611년(광해 3) 3월 29~ 4월 8일.유몽인선생의 [유두류산록]
4월3일.드디어 두류암(頭流庵)에 들어갔다. 암자 북쪽에 대(臺)가 있어 그곳에 올라 정남쪽을 바라보니, 바위 사이로 폭포수가 쏟아지고 있는데 마치 옥으로 만든 발을 수십 길 매달아놓은 것 같았다. 저녁 내내 앉아 구경하더라도 피곤하지 않을 듯하였다. 마침 비가 그치고 날이 활짝 개었다. 골짜기에서 서늘한 바람이 불어와 매우 상쾌한 느낌이 들었다. 오래 앉아 있을 수 없어 선방으로 들어가 편히 쉬었다.
 

5.1867년 8월 26일~8월 29일 , 김영조(1842~1917).유두류록(遊頭流錄)

고개 하나를 넘어 숲 아래 있는 돌 시내에 이르러, 각자 소반 위의 배 하나씩을 먹었다. 큰 언덕을 지나 두류암(頭流菴)[*현 어름터골의 두류암터]에 이르니, 농가 수십 호가 모두 띠풀로 지붕을 얹고, 나무를 얽어서 살고 있었다.

 

6.1871년 9월 4일~8일까지 5일간. 배찬(裵瓚) <유두류록>

 

마침내 본격적으로 산에 오르기 시작하였는데, 계곡이 매우 좁고 산세가 급하고 험하니, 모두 의대(衣帶)를 벗고 혹은 죽장을 들고 짚신을 신고서 앞에서 영차하면 뒤에서 응하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마을 사람들은 우리를 위해 나무를 베며 길을 열었고 수령을 부축하여 견여(肩輿)에 태웠다.& 비현(扉峴*[현 사립재을 넘으며 굽어보니 두류암(頭流庵*[현 어름터골에 있었던 암자, 벽송암(碧松庵*[현 벽송사인데 이는 함양(咸陽)의 경계이다.

 

*배찬(裵瓚)1825~1898 *순조 을유(1825) 2월 10일생. 1898년 졸 /산청군 생초면 고읍리(현 상촌리) 거주. 자는 禹瑞, 호는 錦溪, 본관은 盆城(김해)이다. 생원시 합격. 향리에 금계재를 지어 후학을 양성.

 

 

 

 

 

사전에 인지 못 했던 의병장 석상룡 산소

 

의병장 석상룡...출처/징비록 갤러리


구한말...일제의 침략에 국운이 기울어져 갈 무렵...

 그 몸을 잊고 분연히 일어나 일제에 맞서 싸운 15만의 의병들. 그중 1만여의 의병들은 지리산을 무대로 활동했다.

 그중에서도 지리산 계곡 중 가장 깊고 거친 칠선계곡을 무대로 활동했던 별호 비호장군으로 세상에 그 흔적을 남긴 의병장 석상룡(石祥龍) 장군을 함양 마천에서 마주하였다.

 

  비호장군, 석상룡 의진은 여러가지로 특이한 점이 있었다. 

  이들은 의병장에서 부터 부대원 하나하나 모두 지리산 산사람, 포수나 화전민 출신이었다. 부대원의 수는 작았으나 지리산 계곡과 능선 하나하나를 손바닥 들여다 보듯이 하는 사람들이고 날래고  용맹하여 명성이 높았다.

 

 1. 석상룡 의병장의 선조 이야기

  

석상룡 의병장의 출신도 특이하다.  그는 해주 석씨로 중국 명나라 병부상서 석성(石星)의 13세손 종손이었다. 중국 명나라의 유민이 지리산 골짜기까지 흘러들어와 살게 된 사연도나름 유명하다. 조선 중기의 역관 홍순언이 중국땅에서 의로 도와준 여자가 석성의 부인이 되었고 부인에게서 홍순언의 얘기를 익히 들어온 그는 홍순언과 조선에 대해 호감을 가지게 되었다.

  

명나라의 고관인 그는 조선 태조의 혈통을 바로 잡고, 또 수년 후에 임진왜란이 발발하여 조선이 위기에 처하게 되자  그는 적극적으로 진언하여 조선파병을 이끌어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런데 임진왜란이 장기전으로 돌입하며 명의 국력이 쇠락하게 되는 단초를 제공하게 되고 이로 인해 석성은 그 책임으로 인해 투옥되어 결국은 옥사하게 되는데..그는 죽기 전, 옥중에서 부인과 아들에게  조선으로 망명하도록 유언하여 그 부인과 둘째 아들 천은 조선으로 피했으나 맏아들 담(潭)은 귀양을 가서 수년간 고생한 후 석성이  신원되면서 풀려났다.  담은 명이 기울고 있고 그 가문을 다시 일으킬 길이 없어 후에 다시 조선으로 오게 되었다.  조선은 담을 수양군(首陽君)에 봉하고, 해주 석씨로 사성하면서 황해도에 살게 하였다. 

 

 1644년, 명의 멸망후 명의 유민들은 청의 요구로 잡혀가게 되었는데 조선에서는 이들을 숨겨 경상도 산음(山陰,지금의 산청)에 살게하였다.이곳이 산청과 함양의 경계지역인 생초지역이다.오랜 시간이 지나며 이들 석성의 후손들은 지역관리와 토호들의 횡포에 못이겨 전답을 다 뺐기고 지리산 북쪽의 가장 험한 칠선계곡이 있는 함양 마천 추성리에 자리를 잡게 되어 오늘에 까지 이르고 있다.

 

 2. 의병전쟁의 길로 나서다.

 

 1907년 정미늑약으로 국권강탈이 가시화 되던 그 시기, 전국에서 그리고 지리산 자락에서도 의병전쟁의 치열한 불길이 타올랐다. 원래 근근히 먹고 살기에도 바빴고, 모여살지 못하고 뿔뿔히 흩어져 사는  화전민들을 조직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으나 고광순이나 김동신 같은 지리산 의병장들의 활약에 자극 받기도 하였고,  일제가 법령을 발하여 산포수들의 총포를 뺏아 산포수들과 화전민들의 생계를 위협하였다. 

 

일제는 함양 마천 추성리 인근 벽송사와 남원 실상사에 주둔하여 화전민들을 괴롭혔다.이런 상황에서 화전민 중 그나마 살이가 괜찮았고 또 글을 알았던 석상룡이 나서 함양,산청,남원 지역의 화전민과 산포수들을 모아 창의하였다.

 그렇게 구성된 석상룡부대 50여명은 험준한 지리산 자락을 누비며  의병전쟁을 수행하였다. 실상사전투, 성삼재전투, 벽소령전투, 쑥밭재전투등을 거치며 왜의 진영을 급습하여 다수의 왜적을 살상하였다.

 

치고 빠지는 그의 부대의 활약상이 얼마나 신출귀몰했으면 석상룡 의병장의 별호가 비호장군이었겠는가.

의 부대는 1910년 국권강탈 이후에도 지리산을 배경으로 활동했는데 결국 1912년 석상룡 장군이 일제에 체포되면서 그의 의병전쟁은 막을  내리고 말았다.

  

3. 한많은 최후..

 

 1912년 체포 후 그는 5년간 투옥되어 갖은 옥고를 치루었다.

  결국 그 모진 고문의 영향으로 1920년, 50세로 순국하였다.  석상룡 의병장의 아우가 되는 채용(彩龍)이 일경의 눈을 피해

 그 묘소를 지리산 천왕봉 아래 쑥밭재에 모시고 돌을 깎아  송공비를 세웠다.

 

 그 비문을 보자면

 

'公의 자는 龍見이라 했고, 세칭 비호장군이라 불렀다.

  용력이 뛰어나 국가멸망의 위기에 의병을 일으켜 지리산중에서 왜경을 참(斬)한것이 심히 많았다.

  필경에 투옥되어 5년뒤에 나왔으나 옥중 고질로 경신년 10월에 울분을 머금은채 세상을 떠났다."

 

 그렇게 적고 있다.

 

 이 비문이 그의 일생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우리 명산인 지리산에는 한국전쟁 전후에 좌우대립의 과정에서 수많은 군경과 빨치산, 또 무고한 주민들이 피가 흘렀던 곳임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나 이 아픈 역사 이전에 또 그 위에 나라를 지키고자 지리산에 피를 뿌린 1만 여 의병의 피도 흘렀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여기까지 내가 찍은 사진이며, 아래 부터는 광주 계신 분이 보내 온 사진이다.

내려오면서 찍을려고 했던 비경을 담아오지 못해 못내 아쉽다.

 

 

두류암지 부도

석상룡선생 묘소,두류암지를 지나 쑥밭재로 가는 산길 옆에 자리한다.

 

자연암반 위에 복련이 조식된 원형 대좌 상부에 촉공을 두고 탑신을 올렸다.

탑신에는 문양없이 소박하며, 당호를 새기지 않았다.

사모지붕형 옥개석과 보주는 일석이며, 보주 하단에는 앙련을 표현하였다.

조선후기에 조성된 부도이다.

 

조선조 두류암지를 스쳐간 옛선인들의 산행기에도 전혀 언급이 없다.

 

 

 

 

 

 

사지에는

돌확 등이 산포해있으며, 넓은 경작지(?), 주거지가 층단을 이루어 자리하고 있다.

 

 

 

 

 

 

두류암지를 마지막으로

거의 2년에 걸쳐 현재까지 알려진 지리산 자락 부도 순례는 끝난듯 하다.

겁 없는 시도 였고, 무사고로 마친 것이 여간 다행스럽지 않다

생수 한 병 달랑 들고 산에 올라온 나를 보고, 두류암지를 안내하신 분의 당부의 말씀이 귓가에 생생하다.

 

산을 무서워 하십시오.

100미터를 등산하더라도 배낭을 매고 비상식량은 꼭 준비하세요

혼자는 가급적 지리산 처럼 깊은 산은 피하십시요.

 

전화번호를 주고 받았으니 빛고을에서 꼭 쇠주 한 잔 대접하고프다.

 

2017.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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