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남도/산청군

산청...지곡사지 부도.부도비

임병기(선과) 2017. 9. 11. 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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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곡사지

두차례 답사에서도 미쳐 몰랐던 부도 1기, 부도재 1기를 뵙기 위해 들렸지만

돌아와서 자료를 보니 전혀 엉뚱한 방향에서 헤매이었다.


우가진 풀 때문에 현장에서도 찾지 못한 석탑재와 부도는 겨울날 훌쩍 다녀와야겠다.


 

지곡사지에 흩어져 있던 부도를 함께 모셨다.

주변에 석탑재를 찾았지만 인연 짓지 못하고 아쉬운 발길을 돌렸지만 땀을 씻고 한 기 한 기 부도를 살펴보는 즐거움도 누렸다.


 

비구니 법수당

근자에 모신 부도


 

﨎明堂大師 玄應 之塔, 壬午 四月 日 立(쌍명당대사 현응 지탑,임오 사월 일 립)


 

 

 

 

계진대사 영월당탑 戒眞大師 影月堂塔

옥개석은 후보하였다..


 

  


명문을 확인 할 수 없었다

 


德融大师 含悟之塔(덕융대사 함오지탑)

 


대석은 후보

 

 

 


당호를 새기지 않았다.

대석은 후보

 

 

 


化主 椘仁 比丘, 明源堂大師 懼眼 之塔, 二九五九年 四月 八日 立(화주 초인 비구, 명원당대사 구안 지탑, 이구오구년 사월 팔일 립)

 

 

 

 

 


심적사 못미쳐 우측의 부도 2기. 2011년 사진이다.

 

 

한암대사탑비 寒巖大師塔碑.숭정기원후삼을사 崇禎紀元後三乙巳.1785

한암대사에 관한 기록은 없으나 홍유스님의 산음심적암기 山陰深寂庵記에 등장한다. 당시에 노스님으로 칭한 것으로 보아 홍유스님(1718~1774)보다 먼저 태어났지만 홍유스님 입적 11년 뒤에 1785년에 열반에 드셨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다 기사년 여름에 우리 한암(寒巖) 스님께서 花林寺에서 오셔서 몇 달을 살면서 갑자기 한숨을 쉬며 개탄하며 말하였다.선암(禪庵)이 다 쓰러져 가는데 어째서 성인의 교화를 보수하지 않는가? 청명절은 시절이 온화하고 수확이 풍성한 때라 힘을 합쳐 다시 수리하기엔 딱 좋은 때이다. 너희들 가운데 누가 나와 뜻을 같이 하겠는가?"


"아! 암자를 세우는 일은 雲日이 시작하였고, 雲日의 뒤로 두 세 사람이 힘을 보태어 보수를 하였다. 아직 그 규모를 얻지 못하였을 때 우리 스님이 계셔서 집이 비로소 제대로 완성이 되었다. 이로써 집이 이루어지려면 또한 사람과 때를 기다려야함을 알 수 있다.

어느 날 寒巖 노스님께서 성열을 보내어 나에게 일의 전말을 써 달라고 부탁을 하기에 내가 문장이 졸렬하다고 사양하였다. 그러자 성열 스님이 말하였다."

  


한암대사 부도,부도비

 


추파대사 부도.부도비

 

 

추파당대사탑비秋波堂大師塔碑. 숭정기원후삼병신 崇禎紀元後三丙申. 1776


추파홍유.1718(숙종 44)∼1774(영조 50). 조선 후기의 승려.

성은 이李, 호는 추파秋波.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경기도 광주에서 출생하였다. 10세에 이미 수백 권의 책을 읽어 천재라고 일컬어졌으며, 19세에 방장산(지리산) 백련암에서 가사를 입었다. 처음에는 편양문파鞭羊門派 조관?冠에게 수업하였으며, 그 뒤 여러 사찰을 다니면서 선지식의 지도를 받았고, 나중에는 벽암문파에 속하는 성안性眼의 법을 이었다. 선종·교종에 모두 통했으나 만년에는 주로 염불에 귀의하여 후학을 가르쳤다. 유교에도 밝았으며, 빼어난 문장으로 이름을 얻었다.


산청의 청암사淸巖寺 심적암深寂庵에서 입적한 후, 제자들이 영정을 심적암에 안치하고, 탑을 옥류동玉流洞에 건립하였다.  법맥은 선수善修―각성覺性―진언震言―정혜定慧―성안性眼―홍유 이어진다. 제자로는 문연文演·천제天濟·관식慣拭 등이 있다. 저서로 추파집秋波集』 3권과 편지글을 모은 추파수간秋波手柬』 1권이 있다


산음심적암기 山陰深寂庵記...추파 홍유.

 

대저 절을 짓는 것은 화려함을 자랑하려고 토목의 일을 일삼는 게 아니라 부처님을 받들고 천수(天壽)를 축원하여 국가의 복을 빌려는 까닭이니 그 관계하는 바가 중하다고 하겠다.요사이 불교를 공부하는 사람들을 보면 다들 경전을 강독하거나 묵묵히 앉아있는 것을 잘 하는 것으로 여겨서 집이 무너지는데도 팔짱을 낀 채 수리하지 않으면서 “이건 우리가 할 일이 아니다” 라고만 하니, 이 어찌된 일인가.

이 암자는 현종(顯宗)경술년(1670)에 비구 운일(雲日)이라는 자가 자기 땅을 정해 집을 지어 향을 태우고 도를 닦는 도량으로 만들었지만 正堂과 익각(翼閣)뿐이어서 살기에 좁았다.


갑자년에 강씨 선비가 우뚝하게 正樓를 세우고 갑술년에  설암(雪巖)대사가 靜廳을 세웠으며, 경술년에 임자취(林自翠)가 조실을 다시 보수하였고 계묘년에 이암(怡巖)대사가 익각(翼閣)을 수리하여 사람들이 편안하게 지내며 누울 수 있는 있는 곳으로 만들었으나 아직 넓지는 못했다.

 

성상즉위 22년 을축년에 설봉(雪峯) 화상이 중추의 뜻을 가지고 대중들과 의논하여 우선 나무를 베어다 기와를 구웠으나 마치지 못하고 떠났다. 그 다음해 의수(義修)가 관동(關洞)과 성열(聖悅) 두 상인과 마음을 모아 소임을 맡고 그 서까래를 모아 지붕을 이으니 규모가 다 새로워졌다. 다만 기술자를 잘못 구해서 들보와 용마루가 갑자기 기울어 다들 근심하였지만 바로잡을 방법이 없었다.


그러다 기사년 여름에 우리 한암(寒巖) 스님께서 花林寺에서 오셔서 몇 달을 살면서 갑자기 한숨을 쉬며 개탄하며 말하였다.선암(禪庵)이 다 쓰러져 가는데 어째서 성인의 교화를 보수하지 않는가? 청명절은 시절이 온화하고 수확이 풍성한 때라 힘을 합쳐 다시 수리하기엔 딱 좋은 때이다. 너희들 가운데 누가 나와 뜻을 같이 하겠는가?

 

한(閒)아! 자네는 마음이 밝고 믿음직하니 재화를 맡도록 해라.

天아! 자네는 중후 한데다 주지를 오래했으니 여러 가지로 사무를 자네가 감독하도록 해라.

종(宗)과 현(玄)아! 대중의 일이 심히 고달프니 자네들이 가서 달래 주도록 해라.

흘(屹)! 자와 칼과 톱은 자네가 다 지휘하여 새기는 일을 해라.

수(修)야! 자네는 아주 부지런하고 근신하니 나를 도와 일을 완성하라.

다음해 봄에 강도(講徒)를 해산시키고 친히 힘써 수고를 하였다. 그러자 사람들이 다투어 시주를 하였는데 전 통상(統相) 이언상(李彦祥)이 수십관의 돈을 내었고 계봉(鷄峯) 원(愿)은 볍씨 여러 말을 심을 수 있는 논을 바쳐 완성을 도왔다.

이때에 여러 소임을 맡은 자들과 대중들이 다 그 마음을 다하였다.

터는 그 옛터가 좁다하여 축대를 보충하여 넓혔으니, 정당은 5가(架칸)로 짓고 정청은 3가로 지었으며,익각과 뒷방은 가각 2가로 지었다. 그해 봄에 시작하여 가을에 완성하였으니 그 규모의 융성함은 옛날보다 조금 못하였지만 창문과 칸살(間架)의 크기는 오히려 나았다.

 

건물에 기대어서면 마음이 황홀함을 느끼게 되고 당에 오르면 몸이 편안한 즐거움이 있다.좌선하는 자들이나 경전을 잡은 자들이 동서에 섞여 있고 새벽과 밤에 향을 사르며 성상의 천수가 만세를 누리도록 축원하니, 팔짱을 낀 채 수리를 하지 않는 것에 비해 도움이 만 배는 되리라.


아! 암자를 세우는 일은 雲日이 시작하였고, 雲日의 뒤로 두 세 사람이 힘을 보태어 보수를 하였다. 아직 그 규모를 얻지 못하였을 때 우리 스님이 계셔서 집이 비로소 제대로 완성이 되었다. 이로써 집이 이루어지려면 또한 사람과 때를 기다려야함을 알 수 있다.

어느 날 寒巖 노스님께서 성열을 보내어 나에게 일의 전말을 써 달라고 부탁을 하기에 내가 문장이 졸렬하다고 사양하였다. 그러자 성열 스님이 말하였다.


“ 스님은 오랫동안 한암스님 문하에 있었으면서, 스님께서 이처럼 특별한 공훈을 세우셨는데 어찌 기록으로 드러내어 광채를 드날리지 않으시렵니까?

또 여러 사람들이 힘쓴 공로를 목판에 기록해 나중 사람들이 이를 보고 흥기(興起)해서 이 암자가 오래도록 썩거나 무너지지 않게 하려면 스님께서 다시 지으신 공이 어찌 오늘에 그치겠습니까?.“

내가 말하였다.

“ 참 그렇습니다. 참으로 그대 말과 같습니다.”

그리고 기록하였다.

 


구연탑

부도의 이칭

극락의 구품연지를 이름이리라.

 


그런데 참 말도 안되는 자료가 인터넷을 도배질하고 있다.

(나도 글을 준비하면서 년도가 맞지 않아 확인하였다)

여행작가.신문사 기자.개인 블로그.한국민족문화백과사전 등등 각성 하길 바라면서....


대부분의 기록을 보자.

"추파당 홍유(泓宥) 부도와 비는 1836년(헌종 2)에 건립되었다. 호가 추파 또는 경암(鏡巖)인 홍유는 불교 선종과 교종 모두에 능통했는데 만년에 선종에 귀의했다. 유교에도 밝아 불교와 유교를 비교한 저술을 남겼다. 1774년(영조 50) 5월 13일에 57세로 입적했다. 한암은 1845년(헌종 11)에 건립되었는데 홍유와 비슷한 시기에 머물러 선종에 귀의했지만 자세한 활동은 알려져 있지 않다."


오류는?


첫째.누군가에 의해 숭정기원후삼병신 崇禎紀元後三丙申을 1776이 아닌 1836으로 기록한 것을 확인없이 마구 퍼 날랐다.

뒷문장(1774년(영조 50) 5월 13일에 57세로 입적했다)을 유심히 보아도 오류임을 알텐데 어처구니가 없다.

또한 부도 글씨는 남원부사 서무수徐懋修이가 썼으며, 서무수가 남원부사로 재직했던 시기는 1774.9~1777.1이므로 당연히 1776년이 된다.


둘째. 호를 추파 또는 경암 鏡巖 이라고 했다.

"경암은 추파스님의 제자로 스승의 부도탑과 탑비 건립, 문집 발간을 주도하며 명사들의 서문‧발문‧비문을 받으러 쫓아다닌 제자 관식慣拭 의 호라고 한다.스승과 제자의 호가 같을리는 절대 없다.그것은 아마 여암 신경준이 쓴 추파집 서문의 마지막 단락「… 甲午五月十三日入寂 壽五十七 慣拭傳師之衣鉢者也 年廿五入室 號鏡巖云…」을 “갑오년 5월13일 입적하였는데 세수 57세였다. 관식은 대사의 의발을 전해받은 자인데 나이 25세에 입실하였고 호는 경암이라고 한다.”고 해야 하는데 “… 관식은 대사의 의발을 전해받은 자인데 나이 25세에 입실하였다. (대사의) 호는 경암이라고 한다.”라고 잘못 해석한 것으로 보인다. 


경암은 우리 지리99에는 친숙한 이름이다. 옛산행기방에 지리산기, 대원암기, 무주암기, 불일암기 등 스님의 글이 많이 소개되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많이 사라졌다. 관식(慣拭)이 나중에 법명을 응윤(應允)으로 바꾸었는데 바로 그 응윤이 경암이다. 산청 출신으로 그의 집이 경호(鏡湖)에 있었기 때문에 호를 경암(鏡巖)이라 불렀다고 그의 행장에 기록되어 있다."(출처/지리99에서 발췌)

 


부도비 귀부(1)

개인 사유지에 있다. 2011년 사진

 


개인 사유지의 귀부 그리고 저수지 가의 귀부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그 단초를 찾아 보자


신증동국여지승람 新增東國輿地勝覽 산음현山陰縣조에 고려 예부 상서 손몽주孫夢周가 쓴 혜월慧月과 진관眞觀의 두 비碑가 있다는 기록이 남아 있으며, 또한 홍유스님의 글에도 동일한 내용이 실려 있다.


산음 지곡사 유람기(遊山陰智谷寺記...추파홍유秋波 泓宥(1718-1774) / 번역:하혜정(국사편찬위원회 연구위원)

  

"이 절의 애초 창건은 신라 때에 응진(應眞)이 하였고, 중간에는 고려 때 혜월(慧月)이, 마지막으로 진관(眞觀)이 또 새로 수리하였는데, 진관도 고려 때 사람이다. 이 세 분 대사들은 다 덕이 중하여 당세에 왕의 스승이 되어 국가를 도운 분들이니, 그 뛰어나고 훌륭한 공훈은 비문에 실려서 절의 동서쪽에 짝으로 세워졌다.법당 앞에는 돌을 다듬어 섬돌을 만들고 그 면에 이렇게 글을 새겼다. "곡성군수가 철물(鐵物)을 감독하고 함안군수가 섬돌을 쌓았다." 그 자획이 지금까지도 완연하니, 당시에 부처님의 도를 숭상했던 것을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세 분 대사가 건립하였다는 것 역시 분명하다."


즉, 추파 홍유스님의 글에 의하면 혜월, 진관선사 스님은 왕사이었으며, 두 스님의 탑비가 지곡사에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그렇다면  부도비는 1774년 까지는 훼손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된다.

 


팔각원당형으로 추정되는 부도재는 지곡사지  뒷산 중턱 과수원에 있고,

또다른 1기의 부도는 저수지 앞 왼편 산자락에 있다고 한다

(나는 오른쪽 산을 헤매고 다녀 찾지 못했다)


따라서 지곡사지에는 총 10기의 부도가 있다.

 


귀부(2)

 

 


쌍어문이다.

영암사지 귀부가 스쳐간다.

 

  



영암사지 적연선사 부도


지곡사지 부도비의 쌍어문으로 미루어 동시대에 동일집단의 장인이 세운 부도로 추정하면,

산뒤편 과수원에 팔각원당형으로 추정되는 일부부재만 남았다는 부도는 진관스님이 주인공이며 쌍어문인 새겨진 부도비도 진관국사의 부도일 가능성이 높다 하겠다.


실제로 지곡사지 진관선사오공탑비 비문에 스님이 영암사를 다녀온 기록도 보여 교류가 있었음을 짐작 가능케 한다.

"선사는 영암산 여흥선원(靈巖山 麗興禪院)에서 법원(法圓)대사를 친견하였다”


*****진관선사 오공탑비에 대하여 인터넷에 올려져 있는 년대는 종잡을 수가  없다.

생몰연대와 대사의 행장이 글마다 다르며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

즉, 태어나기도 전에 영암사를 다녀 왔으며, 또한 생존시기에 부도비문을 찬하였다는 등의 내용이다.

그래서 직접 오공탑비문을 보지 못해 글에서 편년은 생략하였다.



영암사지 귀부




영암사지 쌍어문

 

올겨울 즈음

부도재, 부도, 석탑재를 찾아서 길 나서야겠다.


2017.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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