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남도/산청군

산청...지곡사지 세진교비

임병기(선과) 2017. 9. 7. 0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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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진교洗塵橋

속세의 풍진을 털고 건너라는 뜻은

다리를 건너는 순간 극락이라는 의미겠지?

 

지곡사지에서 뵙지 못한 2기 부도를 찾아 가는 길

비석 사진은 담았건만

명문에 관한 자료 검색에는 실패 하였다.

 

산청군지.산청문화유적분포지도.산청문화유적지표조사,산청금석문 총람 등 관련 도서는 있었지만 언감생심 접근할 수는 없었다.

 

 

지당마을을 지나 저수지 못미쳐 우측에 자리하고 있다.

자연 암반 상부를 치석하여 복련을 새기고 비신을 세웠다.

세진교는 직접 자료를 찾지 못했지만 1716년 개설되어 1936년 대홍수로 유실되었으며, 일부 부재는 마을 회관등에 남아 있다고 한다.

 

 

기단

 

 

우리카페 심충성님이 명문 일부를 알려주어 옮겨 옵니다.

숭정기원후 팔십구년 병신 팔월일 崇禎紀元後八十九年 丙申 八月 日

당성후인 홍구송 찬 홍유기 서 지곡사 석량 기 唐城後인 洪九宋 撰 洪有杞 書 智谷寺 石梁 記

 

 

 

비석 반대편 계곡

이 계곡을 가로질러 교량을 세웠을 것이다.

 

세진교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추파스님의 글에서 홍예교임을 찾을 수 있다.

 

산음 지곡사 유람기(遊山陰智谷寺記...추파홍유秋波 泓宥(1718-1774) / 번역:하혜정(국사편찬위원회 연구위원)

 

"회계현(會稽縣 남쪽 10리 땅에 높고 험한 산이 있다. 바라보면 하늘 속으로 들어간 듯한 이 산은 방장산으로 선경(仙經)에서 말하는 삼신산 가운데 하나이다. 이 산에 사는 사람은 처음에는 어리석었더라도 오래 살다 보면 지혜로워지는 이변이 있는 까닭에 지리산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지리산 한 줄기가 구불구불 동쪽으로 흐르다가 일어나 봉우리를 이룬 것이 취봉(鷲峰)과 국사봉(國師峯)인데, 두 봉우리 아래 지은 절이 국태사(國泰寺이다. 또 지곡사(智谷寺)라고도 부르는데, 그것은 그곳 토박이들이 그 골짜기 이름을 따서 붙인 것이다.

 

이 절의 애초 창건은 신라 때에 응진(應眞)이 하였고, 중간에는 고려 때 혜월(慧月)이, 마지막으로 진관(眞觀)이 또 새로 수리하였는데, 진관도 고려 때 사람이다. 이 세 분 대사들은 다 덕이 중하여 당세에 왕의 스승이 되어 국가를 도운 분들이니, 그 뛰어나고 훌륭한 공훈은 비문에 실려서 절의 동서쪽에 짝으로 세워졌다.법당 앞에는 돌을 다듬어 섬돌을 만들고 그 면에 이렇게 글을 새겼다. "곡성군수가 철물(鐵物)을 감독하고 함안군수가 섬돌을 쌓았다." 그 자획이 지금까지도 완연하니, 당시에 부처님의 도를 숭상했던 것을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세 분 대사가 건립하였다는 것 역시 분명하다.

 

전각과 누각의 체계는 대웅전이 가운데 서고 약사전이 왼쪽에 자리하며 극락전이 오른쪽에 있다. 앞에는 큰 누각이 있으며 누각 밖에는 천왕문과 금강문 두 문이 있다. 앙실(鴦室)과 회랑 요사채가 기러기처럼 좌우로 펼쳐져 다 법전을 호위하여 지키니, 황상(皇上)이 조정에 임할 때에 신료들이 앞에 시립한 것과 같은 형상이다. 이것이 영남의 여러 사찰 중에 으뜸인 까닭이고, 선객(禪客)과 시인들이 오로지 국태사를 꼽는 것도 이 때문이다.

 

산속의 많은 선암(仙庵)도 때에 따라 생겼다 없어졌다 하였지만 지금 남아 있는 것은 여섯이다. 심적암(深寂庵)과 영당(影堂)은 강백(講伯)이 불법을 천명하는 곳이며, 적조암(寂照庵)과 나한암(羅漢庵), 태자암(太子庵)과 서운암(瑞雲庵)은 진실로 참선하는 자들이 마음을 밝히는 자리이다.

 

골짜기에는 돌을 깎아 만든 세진교(洗塵橋)가 공중에 걸린 무지개처럼 놓여서 장마가 여러 달을 그치지 않아 성난 파도가 계곡 어귀에 넘쳐나도 행인들이 물 건너기를 걱정하며 탄식하는 일은 없었다. 구름이 걷히고 비가 개일 것 같으면 물빛과 하늘빛이 아래위로 서로 이어지고 게다가 무성한 수풀과 긴 대나무까지 좌우에서 비추니, 6월 폭염이라도 이 다리에만 오르면 열기를 씻기에 충분하다. 또한 유람객이 이 다리에 서면 속세의 근심을 씻을 수 있는 까닭에 이렇게 이름 지었다.그 산수의 기이함과 화초의 아름다움으로 말하면 사계절의 경치가 같지 않으니, 이것은 보고 즐기는 자가 어떤가에 달려 있으므로 군더더기를 붙이지 않겠노라."

 

 

지곡사지 추파당 부도.2011.02.19

 

 

지곡사지 추파당 부도비.2011.02.19

 

또한,송병선 두류산기(1879년)에도 세진교가 유존하였음을 기록하고 있다.

"산청山淸의 경계에 이르러 이군이 술을 마시고 작별하였다.경호강을 건너고 세진교洗塵橋를 건너서 심적암深寂菴으로 들어갔다 "

 

 

 

아름다운 무지개 다리는 유실되고 글씨만 남아 있다.

 

 

럭셔리한 축제 예산을 활용하면 충분히 복원 가능할텐데...

속세의 풍진을 씻어내지 못하는 우리 모두는 죄인이다.

 

2017.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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