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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화천군

화천...반수암지 부도

by 임병기(선과) 2017. 9.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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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장사. 사내면 삼일리

법장사는 반수암지에 창건한 사찰이다.

 

반수암伴睡庵

곡운 김수증(1624~1701)의 곡운집에 따르면 곡운이 화음동에 들어와 살던 시절(1675년) 이후 평강(平康) 현감(縣監) 시절에 사귀었던 금강산의 홍눌弘訥스님이 이곳으로 들어와 창건한 사찰로 전한다, 이후 범우고, 관동지에는 사찰이 명기되어 있었다고 한다.

따라서 조선 후기까지 향화를 피웠던 사찰로 추정되며, 폐사에 관한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김수증의 풍악일기(1680년 경신년.숙종 6년. 9월)에 홍눌스님이 등장한다.

 

"9월26일 맑음.
승려 홍눌(弘訥)과 상견(尙堅)이 신림암에서 왔기에 만나보았다. 그들의 말로는 이전에 곡운(谷雲)에 거주할 때 승려 각헌(覺軒)과 함께 나를 신수암(神秀菴)에서 만난 적이 있었노라고 한다. 식사를 마치고 아이들과 함께 내수점(內水岾)으로 향하였다. 푸른 시냇물이 구비 돌아 미륵대에 이르는데, 매우 깊고 그윽하여 노닐 만하였다. 암석이 솟구친 곳에는 큰 불상을 새겨 놓았는데, 앞에는 돌로 대(臺)를 만들어 놓았으며 송림(松林)은 하늘을 덮고 있었다."

 

김수증金壽增(1624~1701)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연지(延之), 호는 곡운(谷雲). 할아버지는 김상헌(金尙憲)이다. 1650년(효종 1)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1652년에는 세마(洗馬)가 되었다. 그 뒤 형조정랑, 공조정랑을 거쳐 각사(各司)의 정(正)을 두루 역임하였다. 젊어서부터 산수를 좋아하여 금강산 등 여러 곳을 유람한 뒤 기행문을 남기기도 하였다.

 

1670년(현종 11)에는 지금의 강원도 화천군 사내면 영당리에 복거(卜居 : 살만한 곳을 가려져 정함)할 땅을 마련하고 농수정사(籠水精舍)를 지었다. 그 뒤 1675년(숙종 1)에 성천 부사로 있던 중에 동생 김수항(金壽恒)이 송시열(宋時烈)과 함께 유배되자 벼슬을 그만두고 농수정사로 돌아갔다. 이때 주자(朱子)의 행적을 모방하여 그곳을 곡운(谷雲)이라 이름 짓고, 곡운구곡(谷雲九曲)을 경영하였다. 1682년 화가인 조세걸(曺世傑)을 시켜 「곡운구곡도」를 그리게 하였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송시열과 동생 김수항 등이 죽자, 벼슬을 그만두고 화음동(華蔭洞)에 들어가 정사를 짓기 시작하였다. 1694년 갑술옥사 후 다시 관직에 임명되어 한성부 좌윤, 공조 참판 등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모두 사퇴한 뒤 세상을 피해 화악산(華嶽山) 골짜기로 들어가 은둔하였다. 이때 그는 성리학에 심취하여 북송(北宋)의 성리학자들과 주자의 성리서를 탐독하였다.

 

그 가운데에서 특히 소강절(邵康節 : 중국 북송의 유학자 邵雍을 그 시호로써 일컫는 이름)의 음양소식관(陰陽消息觀)을 정사의 조경(造景)에 응용하였다. 이와 같은 사상을 도상화(圖象化)하는 데 힘을 기울여, 주돈이(周敦頤)와 주자의 행적에 나타나는 「태극도」, 「하도낙서(河圖洛書)」, 「선후천팔괘도(先後天八卦圖)」 등을 정사의 경내에 있는 바위에 새겨 ‘인문석(人文石)’이라 하였다. 또한 계곡에 있는 바위들에 천근석(天根石), 월굴암(月窟巖) 등 소강절의 사상시(思想詩)에 나오는 음양소식관을 담은 이름도 붙여 조경을 하였다. 이들의 유적은 지금도 남아 있어 성리 사상이 건축에 미친 영향을 구체적으로 알려 준다.

 

춘천의 춘수영당(春睡影堂)에 제향되었으며, 저서로는 『곡운집』과 1692년 조세걸의 「곡운구곡도」에 그와 후손들이 창작한 「谷雲九曲歌」를 곁들여 만든 『곡운구곡도첩』이 있다. 남양주시 와부읍 덕소리(德沼里)에 묘가 있다. 묘비는 1710년에 세웠으며 비문은 김창흡(金昌翕)이 썼다.

 

 

화음동정사지 華陰洞精舍址

 

"조선 후기 당쟁과 정치적 불안 속에서 생활하던 사대부 관료들은 언제나 때가 되면 조용한 자연 속에 은거하여 독서와 후생(後生)을 가르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러한 정치적 상황에서 김수증은 1670년(현종 11) 이곳에 들어와 초당을 짓고 곡운정사(谷雲精舍)라 하였으며, 농수정(籠水亭)과 가묘(家廟)도 건립하였다. 그 후 잠시 관계에 나가기도 하였으나,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동생 수항(壽恒)이 사사되자 다시 벼슬을 버리고 곡운정사로 돌아왔다.

 

『화음동지(華陰洞誌)』에 따르면, 김수증은 정자를 짓고 요엄류정(聊淹溜亭), 계곡의 남쪽 언덕에 네 칸 집을 짓고 부지암(不知庵), 암자 왼쪽에 두어 칸 집을 지어 자연실(自然室), 울타리를 치고 문을 닫아 함청문(含淸門), 울타리 밖의 채포(菜圃 : 채소밭)를 불가부지포(不可不知圃), 문 밖에 우물을 파고 한청정(寒淸井), 우물 아래 못을 파고 청여허당(淸如許塘), 못가에 축대를 쌓고 표독립대(表獨立臺), 정자 아래 물가의 넓은 바위를 천관석(川觀石), 천관석 옆에 있는 다리를 추진교(趨眞橋), 추진교 옆의 바위를 음송암(蔭松巖)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서쪽으로 가면 석문오(石門摀)가 있는데, 이곳이 밖에서 들어오는 길목이다. 산 아래 물가에 요엄류정과 맞보고 있는 바위에 정자 하나를 더 세워 삼일정(三一亭)이라고 하였는데, 지형 관계로 기둥 세 개만 세웠다. 들보 밑바닥에 태극도(太極圖)를 그려넣고, 그 옆에 팔괘(八卦)를 그렸다.

 

세 개의 서까래에는 각각 ‘陰陽(음양), 剛柔(강유), 仁義(인의)’의 여섯 글자를 쓰고, 세 기둥에는 모두 64괘(卦)를 그렸다. 세 기둥은 각기 8각이어서 모두 24각으로 24절기를 의미하였으며, 십이벽괘(十二辟卦)·십이율(十二律)·십이지(十二支)를 써넣었다.삼일정 앞에 수십 칸이나 되는 크고 넓은 바위가 있는데, 여기에 하도낙서(河圖洛書)·선후천팔괘(先後天八卦)·태극도를 그리고, 이 바위를 인문석(人文石)이라고 불렀다. 또 인문석에는 ‘河(하)·洛(낙)·羲(희)’, ‘人文石(인문석)’이라고 7자를 전자로 새겼다.

 

또 표독립대 동쪽 모퉁이에 크고 높은 바위 위에 수십 척이나 되는 긴 다리를 놓고 한래왕교(閑來往橋)라고 하였으며, 바위를 월굴암(月窟巖), 다리 건너 큰 바위를 천근석(天根石)이라고 불렀다.삼일정 위쪽에 3칸 집을 짓고 무명와(無名窩)라 하였으며, 동쪽의 한 칸에 붉은 칠을 하고 제갈무후(諸葛武侯) 화상과 매월당(梅月堂:김시습)의 초상을 걸어 놓고 ‘有知堂(유지당)’이라는 현판을 달았다.

 

동쪽으로 가면 바위벼랑이 병풍처럼 둘러 있는데 이곳을 장운병(張雲屛)이라고 하고, 아래쪽을 소산대(小山臺), 위쪽을 산봉암(山峰巖)이라고 하였다. 삼일정의 물을 따라 서쪽으로 가면 넓이가 수십 자나 되는 너럭바위가 있는데, 이것을 호석(互石)이라고 하며, 호석의 동편과 장운병의 서편 사이를 명서오(冥棲塢)라고 하였다."...한국민족화대백과사전

 

 

접근하는 길목은 고기 굽는 냄새와 피서객들로 북적대어

바위에 새겨진 명문은 찾아 볼 엄두도 내지 못했다.

 

 

부도

석종형으로 자연 암반위에 홈을 파고 부도를 안치했다.

탑신과 연봉형 보주가 일석이며, 보주아래에 돌란대를 마련했다.

법장사 무량수전 뒤편에서 현위치로 이건하였다고 한다.


부도의 주인공은 곡운선생이 금강산에서 초청한 홍눌 스님이라고 알려져 있다.


김수증의 풍악일기(1680년 경신년.숙종 6년. 9월)에 홍눌스님이 등장한다.

 

"9월26일 맑음.
승려 홍눌(弘訥)과 상견(尙堅)이 신림암에서 왔기에 만나보았다. 그들의 말로는 이전에 곡운(谷雲)에 거주할 때 승려 각헌(覺軒)과 함께 나를 신수암(神秀菴)에서 만난 적이 있었노라고 한다.


즉, 부도는 1680년 9월 이후에 조성하였다.


또한

김수증이 <<유화악산기(遊華嶽山記)>><<곡운집>>권4에서 ""신미 (辛未, 1691) 8월 28일 신랑(申郞)과 더불어 반수암 승 홍눌과 손잡고 ……""


즉, 1691년 이후에 조성한 부도이다.


그리고 곡운집에 홍눌 스님이 마지막으로 등장한다.

""반수암은 우리집으로 부터 1리 정도에 있다. …… 암자는 겨우 10여칸으로 감(龕) 속에 조그만 금불(金佛) 1구가 안치되어 있다. 암자 오른편으 로 부도 한 개가 있으니 즉 홍눌사승(寺僧)의 사리를 간직한 것이 다.""


즉,홍눌스님이 입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결론적으로

홍눌스님의 부도는 1691년 이후 김수증이 운명한 1701년 사이에 봉안되었음을 추론할 수 있다.

 

 

돌란대와 보주


 

기단


 

 

화천

용호동.성불사지.운봉암지.반수암지는 인연 지었지만

2014년 기회를 놓친 계성사지는 이번에도 문을 열지 않았다.

계성사지는

금년 가을부터 발굴이 시작된다고 한다.

발굴 조사 후에는 모두가 자유롭게 출입 가능한 날이 오리라 믿는다.


2017.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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