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남도/창녕군

창녕...창녕박물관 석탑 옥개석

임병기(선과) 2017. 1. 24. 08:39
300x250
300x250

 

 박물관 야외전시장


점심 식사중. 김량한 님과 성득용님이 달창저수지에서 발견된 옥개석를 비롯  안심리 문인석.안심사 부도.운봉마을 석불대좌 중대석.원동서당 석등대석. 부용정 탑재. 구계리 옥개석 등 창녕의 비지정 문화재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일미사지를 끝으로 비지정 문화재에 대하여 화룡점정을 찍는다고 자만했던 자신이 내심 부끄러웠으며 오후에 대구로 귀가중에 조용히 혼자 둘러보기로 작정하였는데 님들이 동행하였다.

 

 

2009년 성산면 달창지 바닥에서 수습된 옥개석 2기와 상층기단갑석재.


옥개석에 대하여 공식적인 자료는 보이지 않는다.

창녕향토사연구회원들은 이 부재와 더불어 부용정의 탑신석 2개. 박물관 경내의 부용정에서 수습한 탑신석.운봉마을의 석불대좌의 안태고향을 용흥사지로 추정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비슬산의 화강암 암질과 탑신을 비롯한 다른 부재 암질과 동일하며 주변에 전해오는 사찰은 용흥사지와 부속 산내암자 밖에 없기 때문이라고 하였다.(용흥사지 부재에 대한 답사기를  이 글에 이어 올릴 예정이다)


참고로

문화재청 한국의 사지 창녕군편에 등재된 용흥사지 관한 글에서는 위에서 언급한 부재에 대한 설명이 되어 있지 않다.

그 내용을 발췌하면

"창건과 폐사에 관한 기록은 전하지 않으며 동국여지승람에는 기록이 없으나, 여지도서, 범우고에는 위치만 기록하고 있다. 1832년 경상도 읍지에는 병술년에 예조에서 영조의 화령옹주(1754~1821)의 원당이었다는 기록하고 있으며,부속암자로 심적암지(深寂庵址), 은적암지(隱寂庵址), 극락암지(極樂庵址), 각료암(覺了庵).남암 북암이 있었다고 한다.한국의사지에는 안심사의 부도만 언급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 104권, 영조 40년 10월 16일 갑오 1번째기사 1764년 청 건륭(乾隆) 29년                
심능건(沈能建)이 화령 옹주(和寧翁主)에게 장가들었는데, 청성위(靑城尉)라고 불렀다. 그는 심정(沈鼎之)의 아들이다."

순조실록 24권, 순조 21년 9월 3일 경술 4번째기사 1821년 청 도광(道光) 1년                         
화령 옹주(和寧翁主)가 졸하였다. 하교하기를,

"화령 옹주가 졸서(卒逝)하였으니, 장생전(長生殿)의 퇴판(退板) 1부(部)를 보내고 예장(禮葬)과 조제(弔祭)는 전례에 의하여 거행하라." 하였다.


즉 화령옹주의 원당이었으면 19세기에도 사찰이 운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초층 또는 2층 옥개석 추정

옥개 받침은 5단이며, 낙수면 물매가 깊고, 상층에 각형 2단 탑신괴임을 두었다.


 

5단 층급받침


 

낙수면과 탑신괴임


 

3층 옥개석 추정

초층탑신석과 같은 유형이며 상부에 찰주공이 있다.


 

찰주공

사리공으로 판단하기에는 너무 얕다.

그래서

3층 옥개석으로 생각하였다.


 

상층기단 갑석 부재

부연이 있고 상부에 각형 2단 괴임을 두었다.


 

여기서 떠오르는 석탑이 없나요?

석가탑 이후 경주를 벗어나는 전형의 석탑

경주 마동,청도 봉기리. 창녕 술정리 동탑.성주 보월동...


이런 탑들과

창녕박물관 옥개석과 상층기단갑석의 유형이 같지 않나요?

옥개석의  5단 층급. 각형 2단 괴임.그리고 2매 부재로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상층기단. 갑석의 부연. 각형 괴임...



창녕 술정리 동삼층석탑...사진/누들스


 

결론적으로

용흥사지의 석탑부재가 맞다는 가정하에 용흥사는 8세기 중반 이후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된 사찰로 추정됩니다

(개인적인 견해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제가 이 옥개석을 처음 뵈었을까요?

 


처음인 줄 알았는데 

2009년 5월 1일 창녕의 천녁학소(오종식)님의 안내로 창녕 비지정 문화재 답사때에 이미 뵈었더군요

 

 

이제 나이탓을 하렵니다.

 

2017.0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