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문경시

문경...묘적암 나옹화상 부도

임병기(선과) 2016. 12. 14. 07:31
728x90

 

 

대승산 마애 사면불에서 바라본 윤필암.묘적암(2014.05.01)

 

 

부도전(2014.05.01)

 

 

부도전.

동봉당 부도.동산당 부도

 

많은 답사 매니아들도 묘적암 부도전은 익히 알고 있지만, 대부분 입구 동봉당 부도를 뵌 후 발길을 돌린 경험이 있을 것이다.

나역시 그러했었다.

 

 

묘적암 나옹선사부도

동봉당부도 후방 등산로 10여미터에 있다.

방형기단 상부에 둥글게 홈을 파고 그 위에 탑신을 올렸다.

 

나옹(1320~1376)

혜근(慧勤)이라고도 한다. 속성(俗姓)은 아씨(牙氏). 초명은 원혜(元惠). 호는 나옹·강월헌(江月軒). 나옹화상이라는 호로 더 잘 알려져 있으며 설화의 주인공으로도 많이 나온다. 아버지는 선관서령(膳官署令) 서구(瑞具)이며, 어머니는 정씨(鄭氏)이다.

 

21세 때 친구의 죽음을 계기로 공덕산 묘적암(妙寂庵)의 요연(了然)에게 출가했다. 그뒤 여러 사찰을 순력하다가 1344년(충혜왕 5) 양주 회암사(檜巖寺)에서 4년간 좌선하여 깨달음을 얻었다. 1347년(충목왕 3) 원나라로 건너가 연경(燕京) 법원사(法源寺)에서 인도 승려 지공(指空)에게 배우고, 다시 자선사(慈禪寺)로 가서 처림(處林)의 법을 받았다. 그뒤 명주(溟州) 보타락가산(補陀洛伽山)의 관음보살을 참례하고, 육왕사(育王寺)에서 석가모니상을 예배했다. 1352년에는 복룡산(伏龍山)의 천암장(千巖長)을 찾았다. 1355년 연경으로 돌아가 원나라 순제(順帝)의 명으로 광제사(廣濟寺) 주지가 되었다. 이듬해 10월 개당법회(開堂法會)를 여니 순제는 금란가사(金襴袈裟)와 상아불자를 하사했다. 순제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다시 법원사로 지공을 찾아가 그의 부촉을 받고 1358년(공민왕 7) 귀국했다. 귀국 후 평양·동해 등지로 다니며 설법하다가 오대산 상두암(象頭庵)에 은거했으나, 공민왕의 간곡한 청으로 1361년 상경하여 내전에서 설법하고 신광사(神光寺)의 주지가 되었다. 그뒤 공부선(功夫選)을 관장했으며, 1361년부터 용문산·원적산·금강산 등지를 순력한 뒤 회암사의 주지가 되었다.

 

1371년 왕사에 봉해지고 대조계종사 선교도총섭 근수본지중흥조 풍복국우세보제존자(大曹溪宗師禪敎都摠攝勤修本智重興祖風福國祐世普濟尊者)의 호를 받았다. 그뒤 송광사(松廣寺)에 있다가 다시 회암사 주지가 되어 절을 중수하고 교화활동을 펴자 사람들이 본업을 잊고 몰려들어 길이 메워질 정도로 성황을 이루었다. 1376년(우왕 2)에는 문수회(文殊會)를 열어 크게 법명을 떨쳤다. 왕명에 의해 밀성(密城:밀양) 영원사(瑩源寺)로 옮기던 중 여주 신륵사(神勒寺)에서 입적했다. 보우와 함께 고려말의 위대한 고승으로 일컬어지며, 조선 불교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그림과 글씨에도 뛰어났으며, 노래를 많이 지어 문집인 〈나옹집〉에 보존하고 있다. 그의 노래 가운데 특색 있는 것은 〈나옹삼가 懶翁三歌〉로 통칭된 〈백납가 百納歌〉·〈고루가 枯髏歌·〈영주가 靈珠歌〉의 3편이다. 누더기, 해골 같은 몸, 보배스러운 구슬을 노래하고 삶에 집착하지 말고 불성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 주제이다. 정골사리(頂骨舍利)는 신륵사에 있고, 비석과 부도가 회암사에 남아 있다. 저서로 〈나옹화상어록〉 1권과 〈가송 歌頌〉 1권이 전한다. 시호는 선각(禪覺)이다...출처/다음백과

 

 

탑신석과 상부의 연봉형 보주를 일석으로 조성했다.

 

 

기단

 

 

탑신석 상부를 평편하게 치석하고 중앙에 1단 괴임을 조출하였다.

 

 

대승사 홈페이지에는 부도에는 명문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육안으로 확인하지는 못했다.

 

화상일완 장우도중 하유양공 접지유성(和尙一椀 藏于屠中 下有兩孔 接之有聲)

화상의 발우가 부도속에 간직되어 있으며 밑면에는 두 개의 구멍이 있어 닿으면 소리가 난다.

 

 

나옹선사의 부도가 묘적암에 봉안된 까닭은 무엇일까?

양주 회암사의 나옹화상의 부도비에서 그 단초를 찾을 수 있었다.

즉 묘적암은 나옹선사가 출가한 사찰이었다.

 

회암사지선각왕사비(檜巖寺址禪覺王師碑)

사리(舍利)가 155과가 나왔다. 기도하니 558과로 분신(分身)하였다. 뿐만 아니라 대중들이 재 속에서도 얻어 개인이 스스로 비장(秘藏)한 것도 부지기수였으며, 3일 간 신광(神光)이 비추었다. 석달여(釋達如) 스님은 꿈에 화장장 소대(燒臺) 밑에 서려 있는 용을 보았는데, 그 모양이 마치 말(馬)과도 같았다. 상주(喪主)를 태운 배회암사(檜嵒寺)로 돌아오는데, 비가 내리지 않았는 데도 갑자기 물이 불어났으니, 이 모두가 여룡(驪龍)의 도움이라 했다. 8월 15일에 부도(浮圖)를 회암사 북쪽 언덕에 세우고, 정골사리(頂骨舍利)는 신륵사에 조장(厝藏)하였으니, 열반한 곳임을 기념하기 위해서이다. 이와 같이 사리를 밑에 모시고 그 위에 석종(石鐘)으로서 덮었으니, 감히 누구도 손을 대지 못하게 함이다.(중략) 그리하여 그 길로 공덕산(功德山) 대승사(大乘寺) 묘적암(妙寂庵)으로 달려가 요연선사(了然禪師)에게 몸을 던져 삭발하고 사미계를 받았다. (이하생략)...한국금석문종합영상시스템에서 발췌

 

나옹선사의 부도는

입적한 신륵사, 오래 주석했던 양주 회암사. 원주 영전사(국립중앙박물관)에도 봉안되어 있다.

 

 

2016.12.06

728x90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