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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광역시/인천광역시

인천...송암미술관 석조물

by 임병기(선과) 2016. 11.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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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동양제철화학이회림 회장이 수집한 고미술품을 송암문화재단에 기증하면서 종로구 수송동에 있는 이회림 회장의 사저를 개조하여 송암미술관을 설립하였다. 1992년 10월 31일인천시 남구 학익동으로 미술관을 이전하면서 전시를 시작하였다. 2005년인천광역시에 송암미술관을 무상으로 기증하였고, 2007년인천시립박물관 분관으로 편입되었다. 2008년부터 2010년에 걸쳐 송암미술관 본관을 리모델링하고 2011년 4월 25일 재개관하였다.

 

송암미술관 답사 목적은

고려후기 석탑과 철조여래좌상 부도 마애관음보살좌상을 뵙기위해서였다.

 

하지만...

 

2층 불교미술관에 전시된 철불은 복제품이어서 사진도 담지 않았다.

 

 

근세작 추정

 

 

고령개포동 관음보살좌상의 모작이다.

 

 

근세작 추정

 

 

몇기 석탑 부재의 조합일까?

 

초층 옥개석이하. 상륜부는 후보물이 분명하다,

탑신석도 비례미와 거리가 먼 후보물로 추정된다.

 

 

 

 

려말선초 작품이라는 안내문이 보인다.

동의하는가?

 

 

 

귀부

 

 

동자석. 진품으로 추정

 

 

석양

 

 

하마비

하마천보불승 불연백타둔혼

下馬千步不乘 不然百打臀棍

천보전에 말에서 내리지 않으면 엉덩이 백대를 칠 것이다.

 

어디에 설치되었던 하마비의 복제품일까?

 

 

장명등

 

 

 

 

부도

조선후기 부도. 방형대석위에 종형 탑신. 상부에 복련, 괴임에 앙련을 조식하고 보주를 뾰족하게 마감하였다.

 

 

백화당 자은대사

白花堂 資(?)訔大師

 

 

 

 

왕릉앞 혼유석 하부 괴임돌인 고석 같다.

 

 

 

목조보살좌상

<목조보살좌상>이다. 보살좌상의 높이는 49cm, 어깨폭 20cm, 무릎폭 24.5cm으로 크지 않으며, 어깨폭과 무릎폭이 거의 같아서 전체적으로 안정감은 조금 떨어지는 편이라고 할 수 있다. 머리에는 보계가 높이 솟아있고 보관이 따로 제작되어 떨어지게 되어 있다. 높은 바닥면 위에 앉아있는 보살은 턱이 각지지 않고 턱선이 완만히 둥글며, 살짝 올라간 눈매와 둥근 콧날, 작은 입은 마치 어린아이를 연상케 할 정도로 오밀조밀하게 표현되었다. 상호에서 귀 부분은 조금 도드라지게 표현되어 장신구가 눈에 띄며, 그 위로 흘러 내려오는 보발은 어깨에서 한번 묶이고 다시 2가닥으로 갈라져 있다. 등의 중앙부분에는 횡선으로 길게 나무의 갈라짐이 보이지만 전체적인 형태에는 큰 영향을 주지 않고 있다. 높게 제작된 바닥면의 아랫부분은 분실되었으며 안쪽의 복장물은 현재 없다.

 

목조보살좌상은 옷주름의 표현과 보관은 고식을 따르고 있으며, 신체비례와 동자와 같은 얼굴의 표현은 16세기부터 나타나는 불상들의 모습에서 그 양상을 찾아 볼 수 있다. 특히 1624년 제작된 송광사 응진당의 두 보살은 높이가 약 90cm, 어깨폭이 21cm로 짧아진 비례의 전형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바닥면의 높이를 높게한다거나 옷주름의 간략화를 고려하면 당대의 유명했던 조각승의 작품으로 추정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또 이러한 짧아진 비례의 표현이 16세기 중반부터 본격적으로 제작되기 시작하여 17세기에 다수가 제작되는 점을 미루어 보아 본관 소장 <목조보살좌상>은 그 범주 안에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출처/박물관 홈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은 중품중생의 아미타수인을 결하고 있으며, 신체는 거의 직선에 가깝고 장방형의 얼굴은 약간 숙였다. 불두의 나발은 앞과 뒷부분이 부분적으로 떨어져나갔으며, 눈썹과 콧털은 녹, 입술은 주색을 칠했던 흔적이 남아있다. 신체의 비례는 어깨 폭과 무릎 폭이 약 1:1.5로 안정적이며 흘러내리는 대의자락은 정돈된 모습으로 표현하였다. 무릎은 낮게 표현하고 대의의 앞자락은 한쪽에서만 흘러내려와 부채를 펼쳐놓은 것 같은 모습으로 율동감을 주고 있다. ‘U’자형으로 길게 내려온 대의는 배 아랫부분에서 겹쳐져있고 오른쪽 어깨를 감싸고 있는 대의자락은 모서리부분이 물방울처럼 내려와 마치 소매를 집어 올린 듯한 형태를 이루고 있다. 대의 안에 승각기는 사선으로 표현하였으며 왼쪽어깨로 넘어간 대의자락은 왼쪽어깨 뒤쪽으로 넘어가 걸쳐있다.

 

상의 전체적인 신체비례와 세부적인 특징을 고려하면 조각승 가운데 진열(進悅)의 작품으로 추정이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진열은 1695년 전북 전주 서고사 나한전의 가섭존자상의 발원문을 통해서 성심(性沈)의 문하에서 불상 제작의 수련기를 거쳤음을 알 수 있으며, 1719년 목포 달성사 소장 목조지장보살상과 시왕을 개금한 사실을 통해서 활동시기를 1695년에서 1719년으로 보고 있다. 현재 진열의 수화승으로써의 기년작은 1706년의 곡성 서산사 목조관음보살좌상, 1713년 경기도 고양 상운사 아미타삼존불상(관음보살은 다른 시기로 조성추정), 1722년 부산 범어사 관음전 목조관음보살좌상이 남아있으며, 진열 作이라고 추정되는 작품들이 조사를 통해 밝혀지기 시작하고 있다.

 

진열(進悅) 作이라고 추정되는 작품들을 살펴보면 안정적인 신체비례와 정돈된 옷주름, 앞쪽으로 넓게 펼쳐지는 대의자락, 그리고 어깨너머로 내려오는 대의 끝자락의 형태를 통해서 양식적인 특징을 살펴볼 수 있다. 본관 소장의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은 특히 1713년 경기도 고양 상운사의 불상들과 양식적인 특징을 같이하고 있어 비슷한 시기에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보살상보다는 여래상을 조금 크게 제작한 듯한 이 삼존상의 양식은 조각승 진열이 자신만의 개성을 정착시킨 상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본관 소장의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또한 18세기 초반의 시기적인 특징을 반영하고 있는 상으로 간주 할 수 있겠다...출처/박물관 홈

 

 

석불좌상

 

 

동자상

 

 

좌대

 

 

목조대세지보살입상

 

 

석조물이 아닌 특히 도자기에 관심 많은 사람이라면 꼭 들리기를 권한다.

 

2016.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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