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쟁이 아래 좁은 골목길 외롭게 서 있다. 참말로 외롭게.
절제사 홍후 청덕선정비節制使 洪侯大恒 淸德善政碑
절제사節制使? 무관직武官. 병마兵馬, 수군水軍으로 구분하여 정삼품관正三品官으로 임용하고 각 지방의 거진巨鎭을 지휘하게 하였다.
법성에 조창이 개설된 것은 1천여년 전 고려초엽이다. 유형원(1622~1673)이 쓴 반계수록에 보면 서기 992년(고려 성종 11년)에 개경이남 12개 조창 가운데 전남에 영광 부용창(법성창), 나주 해육창, 영암 장흥창, 승주 해룡창 4곳이었고 1035년(고려정종원년)에 법성창에는 1,000석을 싣는 초마선 1척과 각선(배) 6척을 배치하였다. 조선초기에는 영산창과 함께 전라도 이대조창이었는데 그때 법성조창 관할에 속한 고을은 영광, 흥덕, 부안, 함평, 무장, 장성, 정읍, 고부, 고창, 옥과, 담양, 진원, 창평, 순창, 곡성 등 15개 고을을 관할했고 1512~ 1514년에는 호남곡창의 전세중 전남 전역의 전세를 법성포에 모으면서 그 창고의 방비를 위해서 진량진 수군만호를 배치했으며 조선이 38척 조군만도 1,344명이 되었다.
홍대항洪大恒 조선왕조실록에는 순조 34년(1834년) 무과 장원 급제 기록이 보이며, 법성진 절제사는 1851년 부터 1853년까지 재임하였다.
홍대항 철비에 관한 달빛에 물든 야사가 전한다. 법성진 야간 조창지기 수병들이 아침이면 목숨을 잃는 사태가 빈번하여 절제사도 자주 바뀌었다고 한다. 새로 부임한 홍대항은 이런 일을 예방하고자 제사를 지내고 사태를 수습하기 위하여 참한 처녀를 낭자를 제물로 유인하였다. 그날밤 지네가 나타나 처녀를 죽이려고 하자 처녀가 어린시절부터 기르던 두꺼비가 지네를 죽이고 처녀는 목숨을 구했다. 이후 홍대항 첨사는 두꺼비의 보은을 기리기 위해 철비를 세웠다고 전한다.
그 철비는 홍대항 철비와 함께 남아 있었으나 일제 강점기에 전쟁물자로 공출당했다는 슬픈 이야기가 민초들에게 구전된다.
비문을 보자(지극히 개인적인 판단임)
절제사 홍후 청덕선정비節制使 洪侯大恒 淸德善政碑
일심지주 一心砥柱 근근기적 謹勤其糴 함풍삼하 咸豊三夏
백사빙호百事氷壺 이열아륜怡悅我輪 공십이조共十二造
성정이 맑고 깨끗하며 한결같이 올곳은 자세로 사심없이 공정하게 세금을 징수하여 즐겁고 기쁜 마음으로 열두 고을에서 뜻을 모아 그를 기리고저 1853년 여름 비석을 세웠다.
(조정에서 비를 세웠다는 자료도 보인다.그렇다면 내 해석은 시건방이 하늘을 찌르는 격이다.그래도 즐겁기 그지 없는 것은 뭐지?)
일심지주 一心砥柱
근근기적 謹勤其糴 함풍삼하 咸豊三夏
백사빙호百事氷壺
이열아륜怡悅我輪 공십이조共十二造
다른 철비와 달리 왕관처럼 보인다
우리나라의 철비(목록,사진)
선정비를 세운 민초들의 바람은...
2016.04.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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