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
그렇게 여러번 답사하였지만 고암의 출생지인 줄은 인지하지 못했고
만해, 김좌진 장군의 생가지만 들렸었다.
알았더라도
미술에 문외한이어서 분명 건너 뛰었을 것이지만.
답사 매니아에게 고암은 크게 3가지 이미지로 부각되는 인물이다.
우선 해강 김규진의 제자, 해강은 일제 강점기에 죽농 안순환과 함께 전국 사찰 본사를 들려 현판과 그림을 그린 분으로 서산 개심사를 비롯하여 많은 작품이 현존하고 있다.
그리고
동백림 사건과 수덕여관. 여기서는 언급하지 않겠다.
하지만
이번 답사에서 고암 집안의 근대사의 숨은 이면을 들을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기념관
이응노[Ungno Lee,李應魯,1904.1.12~1989.1.10]생가. 홍북면 중계리 홍천마을
한국의 화가. 동양화의 전통적 필묵이 갖는 현대적 감각을 발견, 전통성과 현대성을 함께 아우른 독창적인 창작세계를 구축했으며, 장르와 소재를 넘나드는 끊임없는 실험으로 한국미술사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말년의 ‘군상’ 시리즈는 그의 평생에 걸친 예술관과 시대의식이 함축된 조형적 결과물이다.
이응노(李應魯)는 1904년 충남 홍성(洪城)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던 그는 집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화가의 꿈을 키웠다. 19세 때 서울로 올라와 서화계의 거장으로 알려진 해강 김규진의 문하로 들어갔다. 그는 김규진에게 문인화와 서예를 배웠고, 이듬해인 1924년 제3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청죽》으로 입선하면서 본격적으로 화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후에도 선전에서 묵죽화로 여러 번 입선했으며, 이로 인해 대나무를 잘 그리는 화가로 이름을 떨쳤다. 그의 호 ‘죽사(竹史)’는 이때 해강으로부터 받은 것이다.
1930년대 들어 미술계에 야수파와 표현주의 등 유럽의 화풍이 실험되고 새로운 변화가 모색되자 이응노는 전통 회화 안에 새 기운을 불어넣을 방법을 고심했다. 그는 화가로서 자리도 잡았고 나이도 이미 서른을 넘겼지만 일본 유학을 결심했다. 1935년 일본으로 건너간 그는 가와바타 미술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남화(南畵)의 대가 마츠바야시 게이게츠(松林桂月)에게 사사했다. 또한 혼고회화연구소에서 서양화를 공부하는 등 근대적인 미술교육을 받았다. 이 시기의 작품은 전통적인 사군자에서 벗어나 대상을 사실주의적으로 탐구한 현실풍경화가 주를 이뤘다.
이응노는 1945년 3월 귀국했다. 곧이어 우리나라는 해방을 맞았고, 그는 1946년 단구미술원을 설립하여 후진양성에 힘썼으며, 1948년부터 홍익대학교 동양화과의 주임교수가 되었다. 그러나 해방되고 5년 뒤에 6.25전쟁이 일어나 세상이 혼란에 빠졌고, 그 와중에 그의 아들이 인민군에게 끌려가는 아픔을 겪었다. 그는 한국전쟁을 전후해서 《거리풍경-양색시》(1946), 《피난》(1950), 《재건 현장》(1954), 《영차 영차》(1955), 《난무》(1956) 등의 작품을 통해 전쟁으로 인한 혼란과 이를 다시 일으켜 세우려는 사람들의 모습을 호소력 강한 필치로 그려냈다
이응노는 1958년 그의 나이 55세 때 세계 미술계에 나아가 그들과 함께 호흡하고 경쟁하기로 다짐하며 프랑스 파리로 향했다. 그는 프랑스에서 독일로 바로 가 1년간 활동하다 1960년 파리에 정착했다. 이미 대상의 사실적인 재현에서 벗어나 반추상적 표현을 선보였던 그는 파리로 이주한 뒤에는 당시 유럽을 휩쓸던 추상 미술의 영향을 온몸으로 받아들였다. 먹이나 물감 이외에 천이나 한지 등의 재료들을 캔버스에 붙여 만든 콜라주나 태피스트리 등 여러 가지 재료를 작업에 도입하면서 실험적인 작품을 만들었다. 그는 파리 화단의 앵포르멜 운동을 주도했던 전위적 성향의 폴 파케티 화랑과 전속계약을 맺었다. 1962년 폴 파케티 화랑의 첫 개인전에서 콜라주 기법을 이용한 완전추상 작품을 발표해 호평을 얻었고, 1963년 살롱도톤전에 출품하면서 유럽 화단에 알려지게 되었다.
1964년 파리 세르뉘시 미술관 내에 동양미술학교를 설립하여 수많은 유럽인들에게 서예와 사군자를 가르쳤다. 1965년 제8회 상파울로 비엔날레에서 명예대상을 획득하여 세계 미술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그러나 뜻하지 않게 그는 1967년 동베를린공작단사건에 연루, 강제 소환되어 옥고를 치르고, 1969년 사면되었다. 이후 파리로 돌아간 이응노는 1970년대에 서예가 갖고 있는 조형의 기본을 현대화한 문자추상을 선보였다. 그리고 1977년 또 다른 정치적 사건에 연루되어 1989년 작고하기 전까지 국내활동 및 입국이 금지되었다.
자연과 인간의 생동하는 움직임을 문자와 인간 형상, 다양한 화법을 통해 표현해오던 이응노는 작고하기 10년 전부터는 오로지 사람을 그리는 일에 몰두했다. 이러한 변화는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을 계기로 ‘인간 군상’ 작업으로 이어졌다. 익명의 군중이 서로 어울리고 뒤엉켜 춤을 추는 듯한 풍경을 통해 그는 사람들 사이의 평화와 어울림, 서로 하나가 되는 세상을 갈망했다. 이는 유난히 굴곡진 한국 현대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전쟁과 남북 분단, 정치적 혼란기의 여러 사건을 직간접적으로 겪은 작가가 평생에 걸쳐 얻은 예술관, 시대의 의식과 호흡하는 예술에 대한 고뇌와 탐구를 함축한 조형적 결과물이었다.
이응노는 1983년 프랑스 국적을 취득했다. 1987년에는 북한의 초대를 받아 평양에서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1989년, 그가 사람을 그린 지 10년이 되던 해 서울 호암갤러리에서 그의 대규모 회고전이 기획되었다. 이응노는 고국의 땅을 밟을 수 있다는 희망에 이 전시에 대한 기대가 컸지만, 정부의 입국금지 명령에 의해 끝내 희망이 좌절되었다. 그리고 전시 첫 날 파리의 작업실에서 심장 마비로 쓰러졌다. 그는 이튿날 86세를 일기로 조용히 생을 마감했다. 그는 파리에서 활동한 위대한 예술가들이 누워 있는 파리 페르 라세즈 묘지에 잠들었다. 2000년에는 서울 평창동에 이응노미술관이 개관했으며, 2005년 이곳이 폐관하자 대전광역시가 이응노미술관의 수장품을 인수하여 대전광역시 이응노미술관을 2007년 5월에 개관했다.
주요 작품에는 《청죽》(1931), 《홍성 월산하》(1944), 《돌잔치》(1945), 《피난》(1950), 《대숲》(1951), 《우후(雨後)》(1953), 《난무》(1956), 《문자추상》(1964), 《무제》(1968), 《구성》(1973), 《군상》(1986) 등이 있다.
2015.10.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