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건택님이 소개해준 용봉산 산림 휴양원에서 달콤하게 하루를 보냈다. 어제 저녁 서천에서 불면의 밤과 저녁식사의 부실함을 오늘은 직접 요리한 찬과 쇠주 한잔에 날려보내고 숙면을 취했다. 본래 새벽잠이 없는 아침형 인간이기에 서둘러 능선을 넘어 용봉산 일주문을 통과했다. 새벽 산사의 인기척에 멍멍이의 난리 부르스가 용봉산의 아침을 깨우고야 말았다.
용과 봉황이 있는 산사. 이름만으로도 사격이 느껴지는 사찰이다. 발굴되는 각종 유물로 창건 년대를 백제 말 혹은 통일신라시대까지 추정된다고 한다. 창건 시기의 가람터는 현재의 용봉사에서 서쪽으로 조금 올라간 뒤편에 신경리 마애불 초입에 자리하고 있다.
용봉사 마애불
일주문을 지나 왼쪽 바위에 숨은 듯이 있어 놓치기 쉬운 마애불 입상이다. 마애불은 머리쪽은 양감이 있지만 아래로 내려올 수록 볼륨이 줄어 들었다. 타원형 상호, 소발, 육계도 보인다. 가는 눈은 웃는 듯하며, 귀는 길고, 입은 작아 보인다. 수인은 홍성미륵불의 표준(?) 양식으로 오른손은 내리고 왼손은 시무외인을 하고 있다. 법의는 통견으로 U자형 옷주름은 선각으로 표현하였다. 하반신은 볼 수 없다.
마애불 옆 바위면에 불상 조성 기록이 있어 다른 불상의 연대를 짐작하는 데에 중요한 단서가 되는 가치가 높은 마애불이다. 조성기에 의하면 불상은 통일 신라 소성왕 1년(799) 4월에 장진대사가 발원하여 원오법사가 새겼다고 한다.
貞元十年己卯日仁符
佛願大佰士元鳥法師
香徒宮人長珍大
대웅전 못 미쳐 근자에 조성한 부도 옆에 조선시대 원구형 부도 한 기가 보인다. 신경리 마애불 초입에 위치했으나 1910년 무렵 풍양조씨 선조묘를 쓰기 위해 이건했다고 전해온다. 육각대좌, 원구형의 탑신, 육각의 옥개석으로 마무리했다.
용봉사의 가람배치는 크게 3단으로 조성했다. 최상단에는 삼성각, 대웅전 아래에 요사와 용화보전, 최하단에 옛사지에서 발굴된 부재와 부도가 있다.
이지누님의 골골샅샅 찾아간 부처님 글에 정다산이 용봉사를 다녀간 내용이 있지만 당시에도 용봉사는 폐사 직전이었던 모양이다.
" 다산이 1795년 천주교 사건에 연루되어 지금의 홍성 근처인 금정도(金井道) 찰방(察訪)으로 좌천된 적이 있었으며 이때 용봉사에서 하룻밤을 묵으면서 시를 남겼는데 ‘용봉사에 들르다(過龍鳳寺)’라는 것이다. 자유롭지 못한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다다른 용봉사에서 묵어가기를 청했지만 이틀은 재워 줄 수 없다는 스님의 말조차도 마음에는 들지 않았으니 시의 중간에 당시 용봉사의 모습이 나온다.
“…따르는 종 나에게 말해주기를(僕夫向余言) / 절간 하나 골짝에 들어있다나(蘭若在中谷) / 말을 내려 지팡이 들고 나서니(下馬理輕策) / 관원 신분 생각 할 게 뭐 있나(豈復念緋玉) / 긴 그늘 높은 언덕 내리덮고(脩陰下曾阜) / 비단 돌 시내 굽이 깔렸는데(錦石委澗曲) / 서릿발 살짝 덮은 드높은 바위(巖經微霜) / 푸른 대에 끼어든 붉은 담쟁이(紅間翠竹) / 절집이 나뭇가지 끝에 걸려 있으니(禪樓出樹) / 싸늘한 정경에도 반갑다마다(滄便悅目) / 노승이 하는 말이 절이 황폐해(老僧辭荒廢) / 이틀 유숙 접대는 어렵다나(未足待信宿) / 깨진 대 홈통 물줄기 아직 남았고(破餘點滴) / 낡은 절간 단청 빛 흐려 어둡네.(古殿暗丹綠)…”
용봉사 영산회괘불탱...문화재청
문화재청에서 자료를 가져왔다.
"화면 중앙에 석가를 화면 가득 그리고, 8대보살, 10대제자 등의 무리가 석가의 주위에 에워싼 구도이다. 석가는 오른손은 무릎에, 왼손은 배꼽에 갖다 댄 모습으로 중앙에 앉아있다. 석가불 양 옆으로 서 있는 8명의 보살들의 얼굴은 갸름하고 연꽃 등을 들고 있으며 불법을 지키는 수호신격인 사천왕과 제석천, 범천이 보살들과 함께 석가불 주위를 에워싸고 있다. 그림의 윗부분엔 10명의 제자들이 있으며 석가와 머리모양이 같은 보살도 보인다. 주로 붉은색과 녹색을 많이 사용하였고 연녹색과 자주색 등의 중간색을 넣어 화면이 차분하고 온화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이 그림은 숙종대왕의 아들이 일찍 죽자 거대한 불화를 그려 아들의 명복을 빌기 위해 제작된 것이다. 조선 숙종 16년(1690)에 승려화가 진간이 그렸는데, 영조 1년(1725)에 그림을 고쳐 그리면서 적어 놓은 글이 그림의 아랫부분에 있다. 이 괘불도는 본존인 석가불의 크기가 작아진 점 등에서 17∼18세기의 특징을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작품으로 회화사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여겨진다."
가장 하단에 모아 놓은 석조물이다. 멍멍이의 방해로 접근을 못하고 멀리서 잡았다. 문화재청 글을 가져왔다.
1984년 충청남도문화재자료 제 162호로 지정된 이들 석조물은 모두 3점이며, 그 가운데 멧돌과 석조는 현재 용봉사지의 단애면에 방치되어 있고, 석아는 현재의 용봉사 경내에 옮겨져 있다. 장방형 석조는 1매의 화강암으로 조성되었는데, 외형의 크기는 길이 290cm, 너비 136cm, 높이 136cm, 길이 240cm, 너비 104cm, 깊이 45cm의 내구를 갖추고 있다.
석조 옆에 방치된 맷돌은 170×150cm에 높이 25cm이다. 석아는 현재 적묵당 아래 축대 수풀사이에 위치하며 높이 67cm, 지름 86cm의 원주형 화강암에 반구 형태의 절구공을 마련한 모습이다.
석조는 물을 담아 쓰던 용기로 한쪽 모서리에는 물이 흘러 나가는 배수구가 잇더 넘치는 물이 흘러내릴 수 있도록 홈을 만들었다. 마애는 일명 마대 또는 마학이라고도 하는데, 돌로 만든 멧돌방아로 네모난 모양의 돌로 되었다. 석구는 돌절구로 네모난 모양으로 가공된 몸체에 팽이 모양의 둥그런 홈이 파여 있다.
용화보전 벽의 반야용선도
신경리 마애불
용봉사를 폐사시킨 조선후기에 명문가로 유명한 풍양 조씨가문의 공조참판을 지낸 조희순 묘자리를 지나 산을 오르면 만날 수 있다. 묘자리는 사찰 부속 건물이, 마애불 앞 넓은 터는 금당자리 었을 것이다.용봉산 정상부분 우뚝 솟은 바위면에 새긴 거대한 마애불입상불로 앞으로 약간 숙인 바위면에 감실을 내어 불상이 걸어 나오게했다.
거대불로 엄숙하고 권위있게 보인다. 용봉사 마애불입상처럼 머리 부분은 깊게 새겨 볼륨이 있으며 아래는 얕게 돋을 새김했다. 수인은 홍성 지역 마애불, 불상의 표준 양식과 같으며 편년으로 미루어 다른 불상의 모델이 되었을 것이다. 머리 위쪽으로 바위 위에 보개처럼 돌 하나를 얹었다. 고려 때 불상으로 전해온다.
4월 중순 이른 아침. 산바람은 차갑게 얼굴을 스치지만, 땀에 젖은 몸도 말릴 겸 삼배 후 좌정하고 바라본 부처님 상호에는 미소가 흐르고 있었다. 질곡의 세월을 겪은 부처지만 찾아와주는 홍성 사람들에게 늘 웃으면서 손을 내밀어 주었듯이, 나에게도 두 팔로 어깨를 안아주는 듯하여 잠시라도 기대어 잠들고 싶었다.
*** 글을 읽은 홍성에 거주하시는 한건택님의 댓글을 가져왔으니 참조하세요.
"최초의 용봉사는 신경리 마애불 앞 마당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마애불 주변과 마당에 고식의 기와가 출토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옛 용봉사 터는 고려 이후의 사찰이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또한 용봉사를 폐사시킨 사람은 풍양조씨가 아니라 평양조씨 입니다. 아직도 용봉사 주변의 땅은 평양조씨의 소유가 많습니다. 1906년 용봉사를 폐사시켰고 주민들이 현재의 위치에 다시 건립하였습니다.
용봉사 영산회괘불탱은 숙종의 아들과는 관련이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진간은 화사가 아닙니다. 정확한 화기에 의하면 화사(畵師)는 해숙(海淑), 한일(漢日), 처린(處璘), 수탁(守卓), 덕름(德凜), 형린(泂璘 ), 심특(心特) 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오류는 문화재청에 등록 될 때 당시 잘못 기록되어 올려진 결과입니다."
2010.04.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