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남도/밀양시

밀양...영원사지

임병기(선과) 2015. 4. 6.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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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답사 때의 동선과 사뭇 다르다. 분명 다리를 건너 진입했었는데 새길이 개설 되었나 보다.

하지만 마을에서부터 사지로 향하는 길은 유년의 고향 마을 처럼 익숙하다. 

 

그때는 가을이었지 아마.

그렇게 흘러 갔다.

모두들 잘 계시는지.

 

 

마을 민가옆 밭에 모아 놓은 장대석

 

 

주초

 

 

장대석과 석조부재

 

 

석불좌상 앞 고맥이돌

 

 

밀양박물관 옥외전시장의 영원사지 석조물

 

 

영원사에 관한 창건과 폐사는 정확히 전하지 않으나, 가장 빠른 기록은 893년 수철화상보월탑비이다. 이기록에 따르면 경문왕이 수철화상(817~893)에게 심원산사 주지로 명하였으며 심원산사가 영원사라고 한다. 즉 영원사는 경문왕 재위시에 향화를 피웠음을 알 수 있다. 그이후는 고려후기에 집중적으로 나타난다. 

 

익제 이재현이 유원고려국조계종자씨산영원사보감국사비문병서, 박전지의 용봉산용암사중창기에 무외 스님이 왕명으로1310~1315년 주지로 주석하면서 금당, 낭무廊廡를 개수한 기록이 있다. 그리고 이곡(1298~1351)의 가정집에 고려사천태불은사중건기, 경사보은광교사기, 조정숙공사단기 등에 1330~1340년 경 의선스님이 주지로 있었던 자료가 있다.

 

또한 1376년 나옹선사가 왕명를 받아 양주 회암사에서 이곳으로 오다가 여주 신륵사에서 입적했다는 내용은 우리에게 익숙한 것이다. 이후에도 이문화(1358~1414) 영원사의 선조루 시가 신동국여지승람에 남아 있어 영원사는 조선초기까지도 운영되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범우고 여지도서 경상도읍지 등에는 폐사의 기록만 남아 있어16세기 이전에 영원사는 향화가 끊겼을 것으로 추정한다.

 

 

영원사에 있었던 불상들을 한 곳에 모셨다. 좌측으로부터 3분의 좌상과 맨우측 입상한 분으로 훼손이 심하고, 지의류의 영향으로 원형을 잃어 버렸지만 통일신라 후기. 고려초기에 조성된 불상으로 알려져 있다.

 

 

여기서 소설 한편 탈고해보자.

답사 현장에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왼쪽 2번째 불상 뒤편에는 화려한 주형거신광배가 있다, 광배앞 불상 광배로 추정한다면 불상은 지권인 수인의 비로자나불 아니 었을까?

 

통일신라 후기 광배 정상부에 삼존불이 표현된 광배를 살펴보자.

 

 

동화사 비로암 비로자나불

 

 

괴산 각연사 비로자나불

 

 

성주 심원사 광배

 

 

성주 심원사 비로자나불

 

  

 

창녕 사리 광배

 

 

영덕 관음사 광배

 

 

그래서 광배앞 불상도 비로자나불로 생각된다. 양손목이 결실되었지만 지권인 수인으로 보이지 않나? 나만 그런가?

 

여수 죽림사 비로자나불

 

손모양을 비교해보길 바란다.

이 사진이 마지막 사진이 되어 버렸다. 이후 도난당했다.  이 불상뿐만 아니라 우리카페에 소개 후 많은 비지정 문화재가 도난당했다. 카페를 운영하면서 가장 안타까운 부분이다.

 

 

현재는 혼구대사부도와 부도비로 전하지만 아직도 진위여부에 대한 논란이 많다고 한다. 학자가 아닌 답사객의 느낌으로 소설을 갈기고 싶다. 일장춘몽이어도 좋고 호접몽이면 금상첨화지 않은가?

 

 

익제 이제현의 글로 인해 혼구대사의 탑비로 고려후기에 조성한 것으로 회자된다. 뿐만 아니라 3개의 발가락, 귀갑문의 무문양, 비좌상면의 복련 형태 등은 고려후기의 양식이라고 전한다. 또한 논쟁의 중심에 있는 제액의 불전지기佛殿之記의 불전佛殿은 보감국사혼구의 법호로 해석한다.

 

하지만 단정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한편으로는 사적기로 보는 시각도 있다. 나도 여기에 동의한다. 물론 명백한 논리적 에비던스는 없다.

 

1. 근자에 이곳을 답사한 이지누가 만난 마을 노인들에 의하면 부도는 부도골, 탑비는 현재 위치 뒤편에 있었다고 증언한다고 한다. 즉 부도의 주인공과 탑비는 별개로 조성한 것으로 본다.

 

2.불전佛殿은 전각을 지칭하는 의미로 보고 싶다.  왕사든 국사든 불전이라고 칭한 사례가 있었나?   

 

3.1966년 발견된 비신편 및 대동금석화에 실린 보감국사묘응비명 탁본의 비교분석을 통해 비신의 규모 및 글자수를 추정결과 확연한 차이가 있다고 한다. 따라서 영원사에는 혼구부도비와 제액에 불전지기를 새긴 비가 따로 존재했다는 주장이다.

 

의문을 가지고 접근하는 것도 답사의 일미지만 우리는 제자리에서 그냥 즐기면 된다. 논리의 전개는 학자들의 자리로 비워두고...

 

 

부도 역시 2가지 설이 서로 다르게 접근하고 있다. 학자들마다 이론적, 양식적 근거를 제시하고 있으나 차치하고 개략적으로 대비해보자.

 

우선 고려후기에 조성된 혼구의 부도라는  설이다. 이설도 이제현의 비명에 근건한 설일 것이다.

두번째는 통일신라 후기의 부도이며 혼구의 부도는 아니라고 본다. 1966년 청자와편이 발견된 석실 부근에 있었던 부도가 혼구의 부도로, 현재는 부도골에서 사라진 3개 부도중의 하나라고 본다. 그러면서 부도의 주인공은 영원사에 주지로 있었던 수철화상의(817~893) 부도 가능성도 제기하고 있다고 한다. 실상사의 부도와 동시에 조성되었다는 이야기인가?

 

우리 생전에 밝혀질까?

 

 

 

 

알고는 있는데

말은 할 수 없고

참 답답하시죠?

 

 

 

폐사지처럼 산다...정호승

 

요즘 어떻게 사느냐고 묻지 마라

폐사지처럼 산다

요즘 뭐 하고 지내느냐고 묻지 마라

폐사지에 쓰러진 탑을 일으켜 세우며 산다

 

나 아직 진리의 탑 하나 세운 적 없지만

죽은 친구의 마음 사리 하나 넣어둘

부도탑 한 번 세운 적 없지만

폐사지에 처박혀 나뒹구는 옥개석 한 조각

부둥켜 안고 산다

 

가끔 웃으면서 라면도 끓여먹고

바람과 풀도 뜯어먹고

부서진 석등에 불이나 켜며 산다

 

부디 어떻게 사느냐고 다정하게 묻지 마라

너를 용서하지 못하면 내가 죽는다고

거짓말도 자꾸 진지하게 하면

진지한 거짓말이 되는 일이 너무 부끄러워

입도 버리고 혀도 파묻고

폐사지처럼 산다

 

2015.0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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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10월에 다녀온 글을 가져왔다.

 

많은 사람들이 답사 못지않게 지방의 특색 있는 음식 맛보기도 답사의 중요한 동선에 포함 시킨다. 나는 자란 환경 탓인지 미식가, 식도락가는 고사하고 마당쇠 식성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길을 나서며 문득 폐사지에서 자장면을 주문해야 겠다고 생각하고 깜짝 이벤트를 염두에 두었는데, 무슨 면소재지에 중국집도 없단 말인가?

 

 

 

망해도 철저하게 망한 영원사지.

차라리 석불상, 부도비도 땅속에 묻혀 발견되지 않았으면 좋았을 텐데...

폐사지는  흔적, 자취만 남았어도  화장으로 덕지덕지한 절집보다 여유롭고, 한가로우며, 나만의 불전을 세울 수 있는 그런 답사처건만 영원사절터에서는 그런 감흥의 이입이 애초에 스며들지 않는다.

 

신동국여지승람에 자씨산 영원사에 선조루가 있다고 했으니 아랫마을 할머니들의 친구가 되었을 미륵불을 모신 전각이 있었겠지만, 행정구역상 '서원리'는 사림의 거유 점필재 김종직을 모시는 서원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학비리, 행정 명칭이야 서원리든 말든 동네 사람들에게는 절골, 탑골로 전해지는 것은 이곳도 예외가 아니다. 얼굴은 뭉개지고 손발은 떨어져 나갔어도 할머니 어머니에게는 후세에 우리를 구원할 미륵불이며, 현세 고통을 잠시나마 잊게해주는 지고지순의 신앙처인 까닭이다.

 

 

대추밭 한가운데 손바닥만한 공터에 강제구금된 부도, 부도탑비(?). 네분 석불이 계셨다. 

 

밀양읍지에 이제현이 비문을 지었다고 전해오는 몸돌을 잃은 부도탑비는 거북모양의 받침돌과 이수만 남아 있다. 귀부는 힘이 있어 보이고 여의주를 물고 있다. 등에는 육각형을  새겨 두었으며 이수에는 희미하지만 제액이 보인다.

 

중대석,상대석이 만행길 나선 부도는 팔각 평면에 기단과 지붕돌만이 남아 있다. 기단은 안상이 보이고 구름무늬와 연꽃무늬를 새겨 놓았다. 또한 지붕돌에는 기와골과 막새기와까지 표현하였다. 

 

모여 있어 더 서러운 네분 부처님. 어떤이에게는 얼굴표정을 감추어도 이심전심 누구도 원망하지 않는 온화한 미소, 따뜻한 눈웃음이 전해온다는데...

미혹한, 건방진 나는 짜증만 난다. 아무리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본다지만 정면이라도 탁트인 공간을 마련할 수는 없을까? 버려진 날보다 살아갈 날이 더욱 긴 세월 아닌가?

 


영원사에도 대추알 처럼 많은 숨겨지고 왜곡된 사연이 없지 않겠지만 역사의 전면에 등장했을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자. 한적한 시골 절집에 어울리지 않은 솜씨의 부도,부도비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삼국유사를 집필한 일연 선사의 제자로 알려진 보감국사 혼구 스님이다.

 

강진 무위사에서 계를 받고, 승과에 급제하였지만 운문사에 주석하시던 일연스님을 찾아가 제자가 되신 스님이다. 오늘날 전해오는 삼국유사에 많은 부분을 보충한 인물이며 충렬왕과, 충선왕 재위시 국사를 지냈으며 1322년 칠곡 송림사에서 영면하시었다.

 

이런 사료로 부도, 부도탑비는 지방 장인의 작품이 아니라 왕실소속 장인의 작품임을 조심스럽게 말할 수 있다. 또한 영원사는 고려말 번창한 사찰이었으며 일연선사가 장흥 가지산문 보림사 맥을 이은 선승인 점을 고려, 영원사는 선종 사찰이었음을 추측 가능하다.

 

부도 공부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여주 신륵사 자초 무학의 스승 나옹선사 부도. 금산사 방등계단과 함께 석종형 부도의 시원으로 자리매김하는 부도다.

고려말 양주 회암사지 중창불사를 마친후 회향식에 참석하는 사람이 인산인해를 이루자, 나라에서 산문을 닫고 나옹선사를 회암사에서  밀양 영원사로 유배(?) 보내게 된다. 유배길에 여주 신륵사 근처에서 자연사인지 타살인지 입적한다.

 

만약, 나옹화상이 영원사에 무사히 도착  주석하다 입적하였다면 왕사인 무학이 영원사를 중창하지는 않았을까? 이때까지도 비록 첩첩산중이었지만 영원사는 조석으로 부처님 전에 향을 공양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장면이 없었지만, 아니 자리할 틈도 없었겠지만 님들이 준비한 음식으로 대추나무 아래서 성찬을 즐기며,  어느님의 판소리 한 대목이 울려퍼지는 폐사지에서 나지막히 보감국사 혼구 스님의 열반송을 읊조려 본다.

 

"가시나무 숲에 태어나 험한 시대를 살아왔네.

오늘 가는 길 과연 어디인가?

흰 구름 끊긴 곳이 청산인데

떠나는 사람 다시 그 청산밖에 있네."

 

2006.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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