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고흥군

고흥...능가사 부도전

임병기(선과) 2014. 8. 8. 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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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흥. 이번이 3번째 답사길이었다. 능가사는 2009년 답사기가 남아 있지만 경내의 부도만 보고 담장 너머 부도전은 미처들리지 못했었다. 얼마전 우리카페 회원으로 부터 경내의 부도도 부도전으로 옮겼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번 동선에 포함시켰다.

 

대웅전

 

대웅전 후벽

대웅전 불단

 

1639년 조성된 목조삼존불

 

 

능가사 부도전은 경외 쉽게 말하면 입구에서 좌측 길을 따라 올라가면 공용 주차장 못미쳐 우측에 자리하고 있다. 부도전은 앞쪽에 제자 사영당 부도와 스승 추계당 부도를 모시고 뒤쪽으로 낮은 단을 조성 후 여러기를 봉안했다.

 

 

 

좌측 석종형 추계당부도와 우측사영당 부도. 본래 위치로 추정되며 조성연대는 능가사 사적비문(1750년), 능가사 사천왕상 복장기(1667년), 응진당 16나한 조성기(1685년), 해동불조원류海東佛祖源流의 기록을 통해 보면 추계당 성안性安의 제자로 사영 신희泗影 信熙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추계당 부도는 17세기 중반, 사영당 부도는 17세기 후반으로 추정한다.

 

 

 

벽해당 부도

 

 

 

설봉당 부도

 

 

광희대사 부도

 

 

O해당 부도

 

 

설암당 부도

 

 

주인공이 알려지지 않았다.

 

 

창주 벽천당 부도

 

주인공 불명

 

이 부도가 예전에는 능가사 경내에 위치하였었다.

 

 

 

 

 

 

좌측 석종형 추계당부도와 우측사영당 부도. 본래 위치로 추정되며 조성연대는 능가사 사적비문(1750년), 능가사 사천왕상 복장기(1667년), 응진당 16나한 조성기(1685년), 해동불조원류海東佛祖源流의 기록을 통해 보면 추계당 성안性安의 제자로 사영 신희泗影 信熙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추계당 부도는 17세기 중반, 사영당 부도는 17세기 후반으로 추정한다.

 

 

추계당 부도. 방형 하대석 위로 8각 복련을 새겼다. 그 위에 원형 홈을 파고 탑신부를 얹었다. 탑신부 하대에는 돌아가면서 물고기, 게 등이 조각되었다. 탑신 중앙에는 4개 유곽,  9개의 유두가 돌출되어 있다.유곽 사이에 방형 위패를 새기고 그 안에 “秋溪堂”이라는 당호를 새겼다. 상대에는 문양이 없고 바로 천판으로 연결되었는데 희미한 연화문이 장식되었다. 상륜부는 사방으로 피어오르는 구름문양을 새겼다. 

 

 

 

 

 

사영당 부도.  방형 하대석을 놓고 귀퉁이에  용두를 조각하였다. 그위로는 한 돌로 연결된 복련이 이어지고 있는데,  8엽의 연화문이 장식되었다. 다시 복련 위로는 8각의 중석이 연결된다. 탑신은 편구형이다. 한면에 방형의 위패모양을 새기고 사영당 “泗影堂” 당호를 새겼다. 옥개석 상단은 팔작지붕형으로 추녀마루를 표현했다. 옥개석과 한 개 부재인 상륜부는 복발과 보주를 새겼다.

 

 

 

 

 

 

2014.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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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영산의 여덟 봉우리가  - 유영봉, 성주봉, 생황봉, 사자봉, 오로봉, 두류봉, 칠성봉, 적취봉- 멀리 보인다. 옛날 중국의 위왕이 세수를 하다가 대야에 비친 여덟 봉우리에 감탄하여 신하들에게 찾게 하였으나 중국에서는 찾을 수 없어 우리나라까지 오게 되었는데, 왕이 몸소 이 산을 찾아와 제를 올리고 팔영산이라 이름지었다고 전해온다.

 

능가사(楞伽寺)는 신라 417년(눌지왕 원년) 아도화상(阿度和尙)이 창건하였다고 하나 그대로 믿고 따르기에는 의문이 많다. 팔영산 중턱에 보현암(普賢庵)이 언제부터인지 창건되어 뒤에 보현사(普賢寺)로 불리우게 되었다. 보현사가 뒤에 능가사로 되었다고 「능가사사적비(楞伽寺事蹟碑)」에서는 밝히고 있으나 ?地理志類?에서는 서로 다른 사찰로 기록되어 있다. 아무튼 능가사는 언제 창건되었는지 불확실하나 임진왜란 때에 일본군에 의해 불에 타버려 폐사찰(廢寺刹)이 되었다고 한다. 

 

 

호남의 평지 가람 처럼 천왕문에서 일직선으로 대웅전이 보인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규모에 맞배지붕을 올린 문으로 어칸은 통로로 사용하고 양 협칸에는 사천왕상을 모시고 있다. 

 

능가사 사적비에 의하면, '천왕문 화주 시한 별좌 회익 왕상화주 천일 중인 삼보화주 지웅(天王門化主是閑別座懷益王像化主天日仲印三輦化主智雄)'이라하여 천왕문을 지을 때 사천왕상도 함께 조성하였음을 알 수 있다. 

 

동방 지국천. 남방 증장천

 

사적비의 기록대로라면 천왕문의 상량문에서 밝혀주고 있듯이 최초 초창연대가 1666년(현종 7)이므로 천왕상 역시 이때 동시에 조성된 것으로 추측된다.

 

능가사 목조 사천왕상의 배치는 지금까지 본적이 없는 사례여서 흥미롭다. 절에서 사천왕을 바라보아  비파를 든 동방 지국천왕 좌측 먼쪽 위치하며 반 시계방향으로 옆자리에 남방증장천을 모셨다. 아래자료는 고흥군청에서 가져왔다.

 

"외모를 보면 머리 뒤의 보관이 다른 예와는 달리 화려한 연화문이 그려진 원통형의 관을 쓰고 있다, 얼굴은 험상궂은 표정이며 왕방울 눈과 주먹처럼 생긴 멍석코 등이 괴량감을 주고 있다. 머리 뒤에는 화염문이 빈약하게 묘사되었으며 손에는 비파를 들고 있다. 자세는 반듯이 서 있는 입상이 아니고 의자에 걸터 앉은 자세이나 엉거주춤한 모습이다. 남방증장천 역시 앞의 지국천과 동일한 수법이다. 다만 손에 칼을 쥐고 있는 것이 다르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사천왕 발밑에 악귀(惡鬼)같은 괴물을 딛고 있는 것이 통례인데 여기서는 입구 우측에 있는 동방지국천만이 발 아래에 어린 동녀(童女) 기생이 지국천의 왼쪽 다리를 떠받치고 있다."   

 

 

북방 다문천. 서방 광목천.

 

반시계 방향으로 돌아 천왕의 위치가 배열되었다. 맨아래의 설명처럼 라마교의 영향인지 알 수 없지만 남도끝 고흥에서 만난 사천왕은 지금까지 머리속의 잘난(?) 지식을 일순간에 텅비도록 만들었다. 역시 사천왕 배열은 주지스님도 모른다는 말이 맞는 것 같다.

 

"입구 좌측의 북방다문천(北方多問天)과 서방광목천(西方廣目天) 역시 머리에 쓴 보관이나 갑옷의 양식은 앞의 천왕상과 동일 기법이다. 손에 들고 있는 지물은 북방다문천은 긴창을 들고 있고 서방다문천은 오른손에 뱀을 움켜쥐고 있다. 자세는 완전하게 직립한 것이 아니고 뒤에 의자를 놓고 엉거주춤하게 걸터앉은 자세이다. 발 아래에는 악귀형의 괴물이 없다.

 

한편 라마교의 영향을 받은 티베트계의 사천왕은 지국천이 비파, 중장천은 칼, 광목천이 새끼줄이나 뱀, 다문천은 족제비 또는 보탑을 들고 있다. 능가사의 사천왕상 중 동방지국천이 비파, 남방증장천이 칼을 쥐고 있고, 서방광목천이 뱀을 쥐고 있는 것을 보면 청나라를 통한 라마교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은 결과물이 아닌가 한다. 이같은 추정은 보관에서 보여준 원통형이 외모에서도 가능케 해준다.

 

이상과 같은 능가사 사천왕상의 라마교 영향은 고흥군의 지리적 여건을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즉 남해안에 인접한 지역으로서 중국과의 무역을 생각할 수 있으며 또는 가까운 곳에 있는 운대리 청자도요지와도 무관하지 않을 것 같다. 어쨌든 능가사 사천왕상은 이미 문화재로 지정된 보림사 사천왕상 및 불갑사 사천왕상의 외모와는 사뭇 다른 양상을 보여주고 있음이 주목된다. 또한 조성연대(1666년)를 확실하게 알 수 있는 예로서 우리나라 사천왕상 연구에 귀중한 사례가 되고 있다."  

 

 

산지중정 사찰의 그윽한 진입공간과 가볍운 상승효과와는 거리감 먼 천왕문에서 일직선상의 대웅전이다. 본디의 배치보다는 최근 불사와 가람정리로 인한 결과로 보고 싶다. 각종 나무와 가람내 정원같은 분위기로 인해 텅빈 공간이 많음에도 황량한 느낌은 들지 않았다.

 

 

"종신에「康熙三十七年戊寅三月日 興陽八影山楞伽寺…」의 주종명이 있어 1698년( 숙종24)에 만들어진 범종임을 알 수 있다. 용뉴는 쌍용으로 정상에 여의주를 물고 있으며 음통은 없으며, 천판은 이중의 연화문을 표현하였다. 상단은 16엽 연화문이고 하단은 입상화문이다.

 

상대에 원형으로 자리를 마련해 12자의 범자문을 차례로 돌렸다. 인동문을 장식한 유곽(27×34㎝) 안에 9개의 유두를 표현하고 있다. 4곳의 유곽사이에는 천의를 걸친 보살입상과 문호형 장식을 보였는데 그 안에「主上展下壽萬歲」라는 문구가 양각되었다."

 

 

"종신의 중앙부에는 주역에서 나타나는 전양인 乾(≡)에서 전음인 坤(≡≡)에 이르기까지 팔괘를 양각으로 둘렀는 바 이는 조선 범종에서 볼 수 없는 특이한 점이라 하겠다. 이러한 예는 같은 경내의 능가사 사적비 이수에서도 표현되고 있어 주목된다. 하대로 내려와서는 두 줄의 띠를 둘렀고 그 안에 화판과 당초문대를 돌렸다. 특히 화판은 각각 그 문양을 조금씩 다르게 표현하여 정교함을 엿볼 수 있다.

 

종신 중앙의 주종명은 음각인데 이에 따르면 시주자는 통정상운(通政尙云)등 68人이며 工匠․助役․緣化秩․別座․都監․三綱 등을 밝히고 있다. 당시 주지는 도학(道學)이다. 한편 경내의 능가사사적비 음기에는 「金鐘化主雙海 重鑄別座順侃 都監前僧統義軒」으로 적고 있다."

 

 대웅전

 

개금한 원만한 상호의 목조 석가모니불. 나발,  육계가 보인다. 삼도, 법의 통견으로 옷주름이 두껍게 나타난다.

가슴에는 승각기가 보이고 항마촉지 수인이다. 무릎은 오른발이 올라가는 길상좌 옷주름이 유려하게 무릎 전체를 덮고 있다. 좌우에서 협시보살은 문수와 보현으로 추정되는데 , 도난 당하여 다시 조성한 불상이라고 한다.

 

 대웅전 본존불과후불탱

 응진전

 응진전 삼존불좌상. 좌측 나한

 

 국가의 길흉대사가 있을 때마다 어깨와 흉부에서 땀을 흘린다고 한다.

 

 응진전 우측 나한

 

능가사 사적비. " 방형에 가까운 자연석 좌대 위에 귀부를 올리고 그 위로 비신과 이수를 갖춘 완형의 비이다. 이 비는 비신 전면 상단에 전서체의 횡서로 「興陽八影山楞伽寺事蹟碑」라 쓰고 비명은 「朝鮮國全羅道興陽縣八影山楞伽寺事蹟碑銘幷序」이다. 전면은 모두 19행으로 1행 63자인데 행서체로 홍문관부제학 오수채가 짓고 사헌부대사헌 조명교(1687~1753)가 전서와 함께 비문도 썼다. 말미의 「崇禎紀元後再庚午 月 日立」이라는 명문으로 보아 1750년에 세웠음을 알 수 있다. 

 

 

"세부양식을 보면 귀두는 용두화되었으나 목이 짧아 웅크린 모습이다. 입안에 여의주를 머금었는데 측면에서 나타나고 있다. 귀부 전면에는 머리를 중심으로 하여 양편에 8괘를 시문하였다. 이러한 예는 경내 대웅전안의 동종(1698년)에서도 표현되고 있는데 다른 지역에서는 흔하지 않는 경우이다.

 

귀갑은 하단에 6각문을, 상단에는 파상문을 조출하였는데 비늘이 말려져 올라있는 듯이 표현되었다. 이하 유사한 예로는 조선후기에 세운 영암 도갑사의 도선수미비(1653년)의 구부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비좌는 하단으로 연주문을 돌리고 부분적으로 시멘트로 후보를 하였다. 그 위로는 귀부 전체의 균열을 배려했는지 철제띠를 돌렸다. "

 

 이수에는 운용문을 새겼다.

 

응진당 옆  8각원당형의 부도. 방형 하대석 귀퉁에 동물을 새긴 모습은 지금까지 본 기억이 없다. 아쉽게도 마모가 쉼하여 어떤 동물인지 분명하지 않다. 팔각중대석 네면에는 꽃무늬를 새겼다. 특이하게도 만개한 모습이 아니라 꽃이 피어나는 과정을 묘사한 것으로 흥미롭다. 나머지 네면에는 용두, 북쪽은 코끼리와 사자상을 새겼다.

 

상대석 에는 두겹 앙련이 보인다. 8각 탑신은 별다른 조식이 없다. 겹처마인 옥개석은 귀꽃에 동물형상을 표현하였고 우동과 그 사이로 완만한 경사를 이룬 기왓골이 보인다. 상륜에는 본디부재인지 불분명한 부재가 올려져 있다. 조성연대는 조선시대 후기로 추정된다고 한다.

 

 

                  여승...송수권

 

                      어느해 봄날 이던가, 
                      밖에서는 살구꽃 그림자에 뿌여니 흙바람이 끼고

                      나는 하루종일 방안에 누워서 고뿔을 앓았다
                      문을 열면 도진다 하여 손가락에 침을 발라가며
                      장지문에 구멍을 뚫어 토방 아래
                      고깔을 쓴 여승이 서서 염불 외는 것을 내다보았다
                      그 고랑이 깊은 음색, 설움에 진 눈동자, 창백한 얼굴
                      나는 처음 황홀했던 마음을 무어라 표현할 순 없지만
                      우리 집 처마 끝에 걸린 그 수그린 낮달의
                      포름한 향내를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나는 너무 애지고 막막하여져서 사립을 벗어나
                      먼 발치로 바리때를 든 여승의 뒤를 따라 돌며
                      동구 밖까지 나섰다
                      여승은 네거리 큰 갈림길에 이르러서야 처음으로 뒤돌아보고
                      우는 듯 웃는 듯 얼굴상을 지었다
                      (도련님, 소승에겐 너무 과분한 적선입니다.
                      이젠 바람이 찹사운데 그만 들어가 보셔얍지요)
                      나는 무엇을 잘못하여 들킨 사람 처럼 마주서서 합장을 하고
                      오던 길을 뒤돌아 뛰어오며 열에 흐들히 젖은 얼굴에
                      마구 흙바람이 일고 있음을 알았다.

 

                      그 뒤로 나는 여승이 우리들 손이 닿지 못하는
                      먼 절간 속에 산다는 것을 알았으며
                      이따금 꿈속에선 지금도 머룻잎 이슬을 털며
                      산길을 내려오는 여승을 만나곤 한다.

 

                      나는 아직도 이 세상 모든 사물 앞에서
                      내 가슴이 그 때처럼 순수하고 깨끗한 사랑으로
                      넘쳐 흐르기를 기도하며 시를 쓴다.

 

***** 능가사를 나서면서 문득 송수권 시인의 "여승"이 생각났다. 답사기를 준비하면서 시를 인용할려고 검색하였더니 시인이 고흥 출신이어서 참으로 묘한 느낌이다.

 

2009.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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