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김천시

김천...갈항사지

임병기(선과) 2014. 3. 6. 1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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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나지금이나 여전히 먼저 마중 나와 객을 반기는 당산목과 당산 뒤로 중부내륙고속도로가 지나고 있다. 마을 입구 뿐만 아니라 갈항사지 진입로도 좁은 길 그대로 였다. 개발과 보존 가끔은 헷갈린다. 누구를 위한 개발일까? 

 

당산

 

692년 신라 효소왕 재위시승전이라는 고승이 창건한 사찰로 중건이나 중창의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고문헌에 조선 중기까지는 갈항사라는 표기가 남아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그 이후는 폐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절터에는 석조여래좌상. 불두가 결실된 비로자나불 좌상이 있으며 국립박물관으로 이건한 쌍탑의 탑지가 세워져 있다.

 

 

 

 

 

 

 

쌍탑지

 

 

 

2014.0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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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갈항사지를 찾았을 때는 아포에서 오봉저수지를 통하였지만 오늘은 조마-감천-농소를 경유 남면 갈항사지로 동선을 잡았다. 예나지나 갈항마을의 돌무더미 당산은 길손을 정겨웁게 맞아주어 문화재 이정표에 울화가 치민 이놈을 달래준다.

 

현재는 구미 공업단지로 인해 금오산 뒷자락 망한절에 불과하지만 한때는 한반도를 호령하던 왕실 원찰이었기에 이곳이 금오산의 앞자락이었음에 분명했겠지만 오래전 고향을 떠나 노스탈져에 잠 못 이룰 갈항사지 동서탑이 있었던 자리는 하이얀 팻말만 안태지임을 알릴 뿐이다. 

 

갈항사지 쌍탑 천보 17년 영묘사의 언적법사와 소문황태후, 경신대왕의 이모의 원력로 세워졌다는 명문이 기단에 새겨져 있어 건립연대가 확실한 탑이다. 천보17년은 경덕왕 시절로 서기 758년이며 이시기는 신라불교문화가 가장 만개한 시기로 불국사 건립도 동시대이다.

 


동탑 기단명문/문화재청

 

갈항사의 역사와 시주 왕족에 관해 좀더 알아 보자!

 

명문은 “두 탑은 천보17년 무술년에 세웠다. 남매매 3인이 업으로써 이루었는데 남자는 영묘사의 언적법사이며 매자는 조문황태후이고 매자는 경신대왕의 이모이시다”.로 되어 있다. 여기서 천보17년은 경덕왕 17년(758)으로 원성왕이 아직 왕위에 오르기 전이다.

 

불국사와 석굴암이 조성되던 무렵으로 통일신라의 문화가 난숙미를 더하던 시기에 해당된다. 조문황태후는 원성왕의 어머니로 박씨인데 계조부인 혹은 지조부인이라 한다. 언적법사는 원성왕의 외삼촌이다. 이로 미루어 보면 이 탑은 원성왕의 외가인 박씨 일가들이 세운 것임을 알 수 있다.

 

탑의 글씨는 탑이 건립되고 30~40년이 흐른 뒤 원성왕이 왕으로 즉위하고 나서 쓰여진 것이다. 이로 보면 갈항사는 승전이 창건할 당시는 크게 주목받지 못했던 것 같고, 원성왕의 외가인 박씨 세력이 탑을 건립하면서 크게 중창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원성왕은 화엄교단을 통해서 불교를 장악해 나간 인물이다. 황룡사 승려 지해를 궁중으로 불러 50일간 화엄경을 강의하게 하고 전국을 관장하는 불교 행정사무를 황룡사 중심으로 펼쳐 나간 것에서 잘 드러난다. 국가적으로는 불교계 장악을 위해 노력하면서 왕실이나 귀족들은 자신들의 원찰을 적극적으로 확충해 나간 당시의 분위기에서 화엄사찰인 갈항사가 원성왕쪽과 관련맺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로 생각된다.


원성왕 외가의 원찰이 된 갈항사는 원성왕 즉위에 일정한 역할을 담당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원성왕의 외숙이 머물렀다는 영묘사는 선덕여왕 때에 옥문지에서 겨울에 개구리가 울어 적병의 침입을 예고해준 절인데, 문무왕때는 설수진의 육진병법을 이 절앞에서 열병하는 등 군사적 기능이 지속된 절이다.


곡사와 원성왕 자신의 창건한 봉은사와 갈항사는 선덕왕 사후 서열 2위인 김경신이 상재인 김주원을 제치고 원성왕으로 즉위하는데 깊이 관여했다는 것을 꿈의 해몽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원성왕이 왕이 된 것을 ‘복두를 벗고 소립을 쓰고 12현금을 들고 천관사 우물로 들어갔다’는 꿈으로 합리화시키고 있다.

 

 꿈의 해몽에서도 처음에는 실직하고 칼을 쓰고 옥에 갇힐 것이라 하여 두문불출했는데, 다시 아찬 여삼이 와서 해몽하기를 “복두를 벗은 것은 위에 거할 사람이 없음이요, 소립을 쓴 것은 면류관을 쓸 징조요, 12현금은 12손이 대를 이를 징조요, 천관정에 들어간 것은 대궐로 들어갈 상서“라고 했다.

 

여기서 원성왕이 왕위에 오르는데 평탄치 않았음이 드러난다. 등장하는 여러 요소들은 원성왕의 지지세력들의 상징이라고 보면 되겠다. 여삼은 아찬이니 6두품의 지원을 받았다는 것이고 천관사 우물과 12현금(가야금)은 김유신가계와 가야계의 지원이 있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원성왕의 손자대인 흥덕왕 때 깁유신이 홍무대왕으로 추존되고 그 묘가 왕릉처럼 정비되는데서도 알 수 있다. 김주원을 제치고 왕위에 올라 정통성이 결여된 원성왕으로서는 무열왕계와 진골귀족과 김유신계의 지지와 불교계의 폭넓은 지원을 받아야만 왕권을 안정시킬 수 있었다. 이 역할을 무장사와 갈항사, 곡사 같은 원성왕계의 원찰들이 성공적으로 추진해 나갔음을 알 수 있다." (영남 불교 문화연구원)

 

동서탑은 그림으로 밖에 볼 수 없다. 오래전부터 한양 답사시 선순위에 자리잡고 있지만 그날이 언제일지는 나도 모른다.

 

 


갈항사 동탑/문화재청



갈항사 서탑/문화재청

 

너무나 보고픈 갈항사지 쌍탑탑지에서 온갖 상념에 젖어본다. 혹 갈항사지 창건을 경덕왕은 인지 못 한 것은 아닐까?  인지는 했지만 물주가 후에 원성왕의 어머니와 외삼촌 이라는 것을 모르지는 않았을까? 동탑 기단부의 명문으로 인해 더욱 상상의 나래를 즐길 수 있는 폐사지 답사처로 여겨진다.

 

석불좌상

 

현재의 탑지로 미루어 전각속에 계시는 나발, 우견편단, 멸실된 오른손이 항마촉지의 수인으로 보이는 석불이 주불은 아닌 듯하다. 왜냐하면 탑과의 거리, 천재지변의 영향인지 모르지만 탑보다 낮은 위치, 크기, 동시대의 석불에 비해 어깨선의 당당함이 모자라고, 눈동자도 일자보다는 통일전 은행알 눈이다. 이따금 찾는이가 보시한 지폐 몇장과, 문벽선에 매직 글씨- "문을 열고플 때는  김** .011-***-***-" 가 따뜻함으로 다가온다.

 

주불이 아니라는 생각은 골육상쟁으로 2인자에서 왕으로 등극한 원성왕 시절은  통일 후 일즉다, 다즉일의 화엄철학이 통치 이념으로 자리잡은 시기이며, 왕자신도 위에서 언급한대로 화엄교단을 통해서 불교를 장악한 인물이기에 갈항사지 주불은 비로자나불이 아니었을까?

 

비로자나불 좌상

                                                         

철제울타리에 갇힌, 멸실된 불두를 새로 조성한 비로자나불 앞에서 근거없는 내생각이 옳지않을까? 라는 건방을 떨고 있는 중에 인기척이 보여 고개를 돌리니, 멀리서 목탁을 쥔 스님이 갈항사에서 나를 향해 내려오고 계신다.

 

글쎄다. 중국의 소상팔경 명승지 영향으로 조선 천지에 **팔경이 없는 고을이 없지만, 성질 더러운 나와는 늘 부조화였지만, 겨울 해질녘에 인적 없는 갈항사지에서 목탁을 쥔 스님의 출현은 뒷골이 쭈볏거릴 만큼 쇼킹한 아름다움이었다.

 

정중히 예를 갖추고 인사를 드렸더니,  추운 겨울 무슨 인연으로 여기까지 오셨냐며 웃음 지으신 후, 전각 안의 석조여래좌상 앞에서 예불을 올리신다.

절집에 울리는 염불은 자주도 들었고, 동참도 했었지만 폐사지에서 염불은 처음 아닌가? 아니 앞으로도 기회가 없을 것이기에 스님의 등을 보며 합장한 체 폐사지에 낮게 깔리는 염불소리에 젖어 들었다.

 

갈항사지는 해질무렵 1300년의 역사를 거슬러 신라불교 황금기의 현장을 거닌다는 착각에 마냥 젖고픈 절집이다. 기회가 된다면 저녁 5시 전후에 들리시면 폐사지에서 스님의 염불에 빠져 들 수도 있을 것이다.

 

2005.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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