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영암군

월출산 불교문화유산을 찾아서...왕인석상

임병기(선과) 2013. 4. 21. 0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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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저녁 식탁

 

 

대구에도 민어회 메뉴를 갖춘 식당도 있을 것이지만 아직 한 번도 맛보지 못했다. 작년 11월 목포에서 이홍식님 소개로 처음 먹어 보았으며 탕도 일품이었다. 그런 민어회가 쇠주 안주로 준비되어 있었다.

 

 

이곳에 와서 홍탁삼합은 기본 아닐까?. 국민은행 김영욱 지점장님께 감사 말씀드린다.

 

 

월곡리마애불두 답사 후 점심 메뉴 더덕구이.

 

 

도갑사 입구 식당에서 점심 식사를 마친 후 1박2일 월출산 답사 마지막 코스인 왕인석상으로 향한다. 길옆에 하얗게 꽃을 피운 삼지닥나무 이다. 삼지닥나무는 옆에 있는 문산재 지침바위紙砧巖 유래와 관련 있는 나무로 보인다.

 

지침바위

 

"종이가 흔하지 않고 모든 것을 자그잦고 하던 때에 주변에 자생하던 닥나무를 채취하여 이 바위에다 놓고 찧어서 종이를 만들었다. 여기서 만들어 낸 종이를 학습지로 사용하여 기록, 저서, 서예 등의 용지로 삼아 수 많은 학자와 문필가 그리고 화가가 배출되었다.

 

이바위는 높이 8m 둘레 25m 되는 큰 바위로 약간 오목하면서 반반하게 패여져 있고 오르내린 발자욱도 남아 있으며 지금도 이마을 사람들은 고마운 지침바위를 애지중지 하여 환경을 깨끗히 정비하고 어린이들의 장난을 금지 하고 있다"

 

 

문산재 직전 늦은 동백(춘백?)이 절정이다.

 

 

사진 작가들이 자주 촬영하는 장면이다. 설정이라고 생각했는데 직접 목격하기는 처음이다. 시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이형기의 낙화는 인구에 회자되지만 조지훈의 낙화는 익숙하지 않을 것이다.

 

낙화...조지훈

 

꽃이 지기로소니
바람을 탓하랴

주렴 밖에 성긴 별이
하나 둘 스러지고

귀촉도 울음 뒤에
머언 산이 다가서다.

촛불을 꺼야 하리
꽃이 지는데

꽃 지는 그림자
뜰에 어리어

하이얀 미닫이가
우련 붉어라.

묻혀서 사는 이의
고운 마음을

아는 이 있을까
저허 하노니

꽃이 지는 아침은
울고 싶어라.

                                          

 

문산재,양사재

 

영암군청 홈페이지에 문산재와 관련된 내용이 있다. "왕인 박사는 백제 제14대 근구수왕(서기 375∼384) 때에 전라남도 영암군 군서면 동구림리 성기동에서 출생하였다. 8세 때 월출산 주지봉 기슭에 있는 문산재에 입문하여 유학과 경전을 수학하고 문장이 뛰어나 18세에 오경박사에 등용되었다. 백제 17대 아신왕 때에 일본 응신천왕의 초청을 받아 영암의 상대포에서 배를 타고 일본으로 간 것으로 구전되고 있다.

당시 왕인은 32세였으며, 상대포는 국제 무역항으로 신라의 학자 최치원이 당나라로 유학을 갈 때에도 이곳에서 배를 타고 떠났다고 전해 오고 있다. 왕인은 논어 열권과 천자문 한권을 가지고 도공, 야공, 와공 등 많은 기술자들과 함께 도일하여 일본인들에게 글을 가르쳐 학문과 인륜의 기초를 세웠으며, 일본가요를 창시하고 기술, 공예를 전수함으로써 일본인들이 큰 자랑으로 여기는 아스카(飛鳥)문화와 나라(奈良)문화의 원조가 되어 일본 사회의 정치 경제와 문화예술을 꽃피웠다.

 

왕인 박사의 묘지는 일본 오사카(大阪府) 히라카타시에 있으며, 1938년 5월 오사카부 사적 제13호로 지정되었다.왕인 박사의 탄생지인 영암군 군서면 동구림리 성기동에는 왕인 박사 유적지를 정화하여 위패와 영정을 봉안하고 매년 양력 4월 초 왕인문화축제 첫째날에 왕인 박사 추모제를 봉행하고 있다."

 

 

문산재 뒷편 석불입상. 문화유적 총람에는 "석인 입상"으로 기록 되어 있으며 왕인을 추모하기 위해 후학들이 세운 왕인상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그런 해석을 부정할 근거가 내게는 없다.  또한 같은 자료에는 "입상은 총고 257cm, 어깨폭 70cm로 존상의 머리 위에 나발이나 육계가 아닌 유교풍의 문관 또는 유건을 쓰고 있는 상이며 얼굴이 풍만하기는 하나 엄숙한 표정을 짓고 있다. 두 팔은 앞으로 팔장을 끼어 공손히 읍을 하고 있는 형상이다."라고 표현하여 왕인상을 인정하는 분위기다.

 

 

방형 돌기둥에 새겨진 불상은 광배를 조성하려는 흔적이 남아 있고 발은 별석이다. 문화재 총람에 유건을 착용했다고 기술했으나 소발에 낮은 육계가 보인다. 눈은 반개한 상태이며 코는 낮고 입술은 두텁다. 귀는 길어 어깨에 닿았고 목에는 삼도가 보인다. 법의는 통견으로 좌우 대칭이다. 수인은 대의자락 속에 감추어져 있다. 동행한 민학기님은  고려초기 불상으로 해석한다.

 

 

민학기님은 불상의 큰 특징으로 큰 입과 두터운 입술 그리고 주먹코를 지목했다. 11세기에 조성된 불상으로 알려진 장성 유탕리 마애불과 친연관계로 보았다.

 

 

또한 민학기님은 이 불상의 가장 큰 특징으로는  수인이 옷속에 감추어진 도상에 있다고 보았다. 이런 수인의 작례는 경주 남산 감실 부처로 부터 남산 일원 마애불-10세기 초기 남원 개령암지 마애불상군의 주존불- 11세기 초반에는 임실 오수리 석불입상,임실 학정리 석불입상, 장수 원흥리 석불입상, 장흥 고산사 석불입상,장흥 미륵사 석불, 영암 왕인석상으로 전파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언급된 불상 사진은 옛님의 숨결 방에 있다)

 

 

왕인 책굴

 

 

왕인상? 석불입상? 명칭 문제는 답사자의 개인적인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정확한 존명은 문화재청 또는 관련기관의 고증과 논의를 통하여 지정 문화재 등록이름으로 부르면 된다. 1박 2일의 월출산 문화재 답사였지만 아직 뵙지 못한 불교유적이  많이 남아 있다. 이번 늦가을에서 내년 봄 사이에 다시 찾을 기회를 잡아야 겠다. 마지막으로 답사를 기획한 이홍식님과 동행한 모든 분들에게 고마움과 감사움을 전한다.

2013.03.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