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남도/거창군

거창...우두산 고견사

임병기(선과) 2013. 1. 11. 1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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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창 우두산 고견사. 개인적으로는 너댓번 다녀온 절집이다. 대구 달서구에 거주하여 거리상으로 가까운 까닭에 여름 밤이면 아파트 이웃들과 고견사 아래 계곡에 피서를 다녀 오기도 했으며, 부부 동반 모임, 초교.중학 동기회에서도 산행을 하였었다. 이번에도 중학 동기 산악회 모임 등반 목적이었지만 참새가 방앗간을 스쳐갈 수는 없지 않은가?

 

견암폭포

 

여름에는 수량이 풍부하여 장관을 연출하는 폭포이지만 갈수기인 겨울에도  비단을 풀어 놓은 듯한 하얀 물줄기가 이어지고 있다. 명불허전이라 했던가?

 

 

금강문. 일주문처럼 보이지만 금강역사를 모셨다.

 

흄금강

아금강

 

고운의 지팡이가 자란 은행나무.

 

달빛에 물든 이야기면 어때? 즐기면 된다.

 

 

건너편 잣나무

 

 

기자석?

 

민초들의 염원을 간직한 민속과 불교의 습합체가 아닐까?

 

 

 누하주로 판단하기에는 너무 좁고 높고,  정료대로 보기에는 상부 면적이 좁다.

 

위치는 의문이 들지만 청수대가 아닐까?

 

홍천 수타사의 청수대가 떠오른다. 

 

홍천 수타사 청수대

 

아랫구역의 요사.

 

고견사는 주차장에서 폭포를 거쳐 약 3~40분 걸어올라가면 일주문에 이른다. 고견사는 크게  상하 구역으로 구분된다. 아래에는 신라시대 최고운이 짚고 온 지팡이가 자란 나무라고  달빛에 젖은 이야기가 전해오는 수령 700년의 은행나무와 요사가 자리한다. 위의 대웅전 구역에는 민가 솟을문 같은 문을 들어서면 좌측 나한전, 오른쪽에 대웅전이 자리한다. 대웅전 오른쪽에는 범종각, 고려 석불입상, 삼층석탑이 위치해 있다.

 

 

대웅전 구역의 석축

 

 

예전 사진. 지금은 말끔하게 단장을 햇지만 예전에는 대웅전으로 들어가는 문은 민가 솟을문 같았다. 내기억이 맞다면 문위에는 '별유산장 고견사' 현판이 걸려 있었다. 사진에 보이는 솟을문 아래 월대도 생각나고...

 

 

전통사찰관광 정보를 보자. "고견사는 667년(문무왕 7) 원효와 의상 두 스님이 창건했다고 전한다. 한편으로 신라 애장왕(재위 800~809) 때 순응(順應)과 이정(理貞) 스님이 창건하였다고도 하는데, 현재 고견사에서는 앞의 창건설을 정설로 보고 있다.고려시대에서는 1360년(공민왕 9) 달순(達順)과 소산(小山)이 김신좌(金臣佐)와 함께 중건하였는데, 한때 견암(見庵), 견암사(見庵寺·見巖寺), 견암선사(見庵禪寺) 등으로도 불렀다.1395년 조선을 건국한 태조가 고려 왕조의 왕씨(王氏)의 명복을 빌기 위해서 밭 50결을 내리고, 매년 2월 10일 내전의 향(香)을 보내서 수륙재(水陸齋)를 행하게 하였다. 조선 초기에는 교종에 속하였으며, 1414년(태종 14)부터는 1월 15일 수륙재를 행하였다.

1424년(세종 6) 사원의 승려 수와 전지의 결수를 정할 때, 45결이었던 전지를 100결로 늘리고 승려의 수를 70명으로 하였다. 1630년 설현(雪賢), 금복(金福), 종해(宗海) 스님이 중건하면서 고견사로 개칭하였는데, 이는 옛날 원효 대사가 계신 곳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한편으로는 원효 대사가 이 절을 창건할 때 이곳에 와 보니, 전생에 와 본 곳임을 깨달았다는 데서 고견사라는 이름을 지었다고도 전한다.

 

한편 고견사에는 현재 숙종(재위 1675~1720)이 하사했다는 「강생원(降生院)」 편액이 보관되어 있다. 숙종이 고견사를 창건한 원효와 의상 스님을 추앙해서 직접 써서 고견사에 내린 것이라고 전한다. 조선시대 중후기 고견사의 위상을 짐작해 볼 수 있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근대에 들어와서는 1935년 예운(禮雲) 스님이 대웅전과 칠성각을 중수했으며, 1950년에 일어난 한국전쟁으로 소실된 것을 정천(定天) 스님이 중건했다. 1987년에 여러 전각을 새로 짓고 면모를 일신하였다."

 

대웅전

 

정.측면 3칸*3칸의 다포계 겹처마 팔작지붕이다.

 

석가여래삼존

 

석가여래는 우견편단 법의, 온화한 모습을 하고 있다. 좌우에 협시보살은는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다.

 

목조아미타불좌상

 

아미타불을 뵙기위하여서는 스님을 찾아야 한다. 그보다 이 불상에 대한 자료를 찾기가 쉽지 않다. 한국사찰문화유산총람에도 사진과 1761년 조성했다는 기록 외에는 언급이 없으며 문화재청은 물론 일반인이 접근 가능한 사이트에는 언급이 되어있지 않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나는 우리카페 손태호(흔들리는별)님의 동국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 불교미술전공 학위 논문(18세기 조각승 상정尙淨 연구.2012년)을 가지고 있다. 그 논문에 비교적 상세히 설명되어 있어 요약 발췌했으니 관심 있는 분들은 참고하길 바란다. 그나저나 왜 문화재로 지정되지 않았는지?

 

"1761년 상정은 합천 해인사 백련암에서 2구의 불상을 조성하였다.  한구는 백련암에 한 구는 거창 고견사에 봉안 중이다. 두 불상은 불신과 대좌가 거의 같은 형태이다. 다만 고견사 불상이 전체 높이에 비해 머리 높이가 더 크고 무릎폭에 비해 어깨폭이 넓어 좀 더 당당한 모습이다. 나발, 육계는 표현하지 않았고 중앙계주와 정상계주가 있다. 얼굴은 방형, 뺨과 턱을 궁글려 각지지 않고 귀는 크고 귓불은 두툼하다. 눈을 가늘고 길며 눈썹은 초생달 처럼 휘어졌고 미간에는 백호가 선명하다. 코는 두툼하며 입은 미소띤 형태이다.

 

약간 숙인 얼굴 아래에는 삼도가 있고 가슴은 평판적이다.손은 별조하여 끼우는 형태이며 수인은 하품중생인이다.  불의는 통견으로 목을 둘러 한 번 접은 대의가 오른쪽 어깨 가슴쪽으로 커다란 주름 하나를 만들고 그 옆으로 세겹 주름을 길게 상박으로 빠져나가고 있다.

 

양식적 특징은 첫째. 원만하게 공굴린 조각기법에서 나오는 부드러운 곡선미이다. 둘째. 삼각형의 안정된 비례에서 느껴지는 편안한 구도이다. 세째. 인전 조각의 특징인 연봉일체 대의자락이 사라지고 보통의 불상처럼 두 겹씩 접힌채로 마무리가 되었다는 점이다."

 

조성기는 대좌에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상정스님. 대좌.  불상에 대하여 더 깊은 내용을 알고 싶은 분은 흔들리는별님에게 문의 하길 바란다.

 

동종

 

"고견사 동종은 전체높이가 97.2cm이고, 입지름이 59.7cm로 17세기 전반에 제작된 동종 가운데 그 규모가 큰 편이다. 전체적으로 옅은 붉은색을 띠는 동종은 둥글고 높게 솟은 천판위에 음통을 갖추지 않은 쌍룡의 종뉴를 표현하였는데, 특이하게 용의 이마에 ‘왕(王)’자를 새겨 놓았다. 동종은 마치 포탄을 엎어 놓은 형태를 나타내고 있다. 이는 천판에서 시작된 외선이 종신 중단까지 완만한 곡선을 보이다가 하단에서 갑자기 직선으로 내려와 시각적으로 종구가 좁아진 형태를 보이기 때문이다. 종신은 3줄의 횡선을 이용하여 상ㆍ하로 구분할 수 있으며, 그 안에는 다양한 도안을 장엄하였다.

 

먼저 구획된 상단을 살펴보면, 천판 아래에는 넓은 연판문을 부조하였고, 그 밑으로 연곽 4개가 사다리꼴 형태로 배치되었다. 연곽대는 당초문을 사용하였으며, 그 안에 9개의 만개된 연뢰를 표현하였다. 연곽과 연곽 사이에는 불좌상, 불탑, 범자문, 위패 등을 배치하였는데, 4면 모두 동일한 형태이다. 그 아래에는 연화당초문을 사용하여 띠 장식을 장엄하였다. 이러한 상단의 표현에서 주목되는 것은 연곽 사이에 부조된 불좌상, 불탑, 범자문, 위패 등이다. 이 가운데 불좌상과 불탑은 기존의 양식과 차별된 형태로 조선시대 동종에서 그 선례를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유일한 표현이다. 불좌상은 사각과 연화로 구성된 대좌위에 결가부좌한 형태로 구품인의 수인을 취하고 있으며, 불탑은 탑신과 옥개석이 갖춰진 3층의 형태가 연꽃 위에 표현되었다.

 

상단에 비해 하단은 그 구성이 단순한 편이다. 구획된 하단에는 제작연대를 기록한 주성기를 기준으로 위에는 연화당초문과 아래에는 수파ㆍ운룡문을 장엄하였는데, 특히 주성기 아래에 수파ㆍ운룡문은 역동적인 용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표현하여 작품의 완성도를 높여주고 있다...문화재청

 

 

1630년(인조 8년)에 견암사 동종으로 제작한 것이다. 동종에 기재된 견암사는 고견사와 동일한 사찰을 말한다. 667년(문무왕 7년)에 원효대사와 의상대사가 창건 할 당시에 사명은 고견사였지만, 1271년(고려 원종 2년)에 고견사가 거제에 이속되면서 견암사로 사명이 변경되었다. 이후 임진왜란으로 폐허가 된 사찰을 운현(雲賢), 금복(金福), 종해(宗海)세 분의 스님이 중창하면서 고견사로 다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고견사 동종의 명문은 조선후기 일반적인 동종과 다르게 사찰의 연혁, 동종 제작에 소요된 실제기간, 제작에 들어간 물품 등을 자세하게 기록한 기문(記文) 형태라는 점에서 주목할 수 있다. 명문을 통해 동종의 제작 장인은 도대장미지산설봉사문천보(圖大匠彌智山雪峯沙門天?)를 비롯하여 치죽(緇竹), 득남(得男), 득일(得一) 등이 참여하였음을 파악할 수 있다.

이 범종은 조선 후기 범종 중에서도 17세기 전반 승장의 선도적 역할을 하였던 설봉(雪峯)이 만든 기념비적 작품이라는 점과 함께 보관 상태가 양호하면서도 세부 문양 등의 주조 기술이 정교하게 표현되었다"...문화재청

 

배례석

 

대웅전 앞에는 직사각형으로 길쭉한 모양의 배례석이 놓여져 있다. 별다른 조식이 없다. 법당앞의 배례석은 동화사 대웅전, 동화사 금당선원 극락전, 강진 무위사 극락전 앞에서도 볼 수 있다. 숙종이 하사했다는 '강생원(降生院)' 편액과 관련지어서 의미를 부여하는 설도 있다.

 

 

석조 부재

 

석불입상.

 

대웅전 오른쪽 전각에 봉안되어 있다. 얼마전까지도 노천에 있었던 고려시대 석불로 전한다.전체적으로 마멸이 심한 편이라 세부적인 표현은 정확하게 알 수 없다. 2줄 양각선으로 두광과 신광을 구분한 주형거신광배로 한 돌에 표현된 마애불이다.  법의는 통견으로 둥글고 두꺼운 몇 개의 주름만으로 간략히 표현하였으며, 신체에는 볼륨이 없이 편평한 조형감이 강조되었다.

 

 

오른손은 팔을 들고 다섯 손가락을 펴서 손바닥을 밖으로 향한 시무외인, 왼손은 오른손의 다섯 손가락을 아래로 펴서 밖으로 향한 여원인 수인이다.다. 현재는 발 부분이 잘려 있는데 본래부터 없었는지는 알 수 없다.

 

 

육계가 뚜렷한 소발이며, 얼굴에는 눈, 코, 입 등의 희미한 윤곽만이 남아 있다. 귀는 어깨에 닿아 긴 편이며, 목은 짧다. 신체는 비교적 당당해 보이는데, 넓은 어깨와 둥글고 살찐 얼굴 때문인 듯하다.

 

 

구름에서 내려오다 ...이기철

 

고견사(古見寺) 운상선원(雲上禪院)은 꽃으로 덮여 있다
들과 산을 제 색깔과 향기로 채우는 일을
풀과 꽃 아니면 누가 할 것인가

 

사람 대신 꽃 이름 불러보고 싶어
예고 없이 산에 드는 사람의 마음을 아는 이 누구인가
달력의 5월은 아직 산중까지 오지 않아
물소리가 골짜기를 여는 데 아침나절이 걸린다

 

철쭉 지고 나니 설상화가 잎을 내밀어
덩달아 피는 꽃이 산을 무등 태운다
굴참나무 곁에서 바라보면 산이 꽃향기에 실려
구름보다 가볍게 산 아래로 떠내려가는 것이 보인다
꿩비름, 노루발톱풀, 숨겨놓은 햇살이 솔 그늘을 재운다

 

누가 이름하였는가, 운상선원(雲上禪院)엔 비가 오지 않을텐데
갑자기 몰려온 구름 송이가 후두둑 빗방울 뿌려
내 신명을 깨뜨린다
꽃은 지상(山上)에 피고 나는 하산(下山)해야 한다
때 절인 창자와 뇌수를 씻지 않고는 아무도
이 고산(高山)에 들 수 없다

 

나무 이름 꽃 이름 함부로 부르는 것도 내 거짓된 욕망이라고
바위를 스치는 바람 한 폭이 찢을 듯
내 옷소매를 당긴다

 

내려가라 내려가라 운상선원(雲上禪院)엔 오르기도 이렇게 힘겨운데
욕망을 숨긴 운동화 발로 어지 선계(仙界)를 지나
하늘로 오를 것인가
 

 

 

고견사 석탑. 기단부는 방형 부재위에 옥신의 괴임석으로 추정되는 부재를 쌓고 초층 옥신을 올렸다. 옥신은 장방형으로 문비를 새겼다. 초층 옥개석 층급은 4단, 귀에는에는 우동이 보인다. 2층 옥개석에는 불상을 표현한 듯 하다. 층급받침은 3단이다. 

 

3층 몸돌은 결실되었고, 상부에는 옥개석  부재같은 석재가 있다. 상륜에는 노반으로 보이는 부재가 훼손이 심한 상태로 남아 있다. 석불과 함께 고려시대에 조성된 탑으로 여겨진다.

 

 

의상봉 고견사. 2012년 마지막 답사지

 

2013년도 한 결 같은 모습으로 우리님들과 함께하길 바란다.

 

덕유산

가야산

지리산

수도산

 

지금 그대로의 모습으로...유열

 

사랑을 이야기 할때

그대의 눈을 바라보면서

마음을 전하려 할때

그대의 손을 꼭 쥐어요

햇살은 나무위에 걸친
그대의 눈을 반짝이네
투명한 그대의 미소는
나의 욕심을 비워버려요
사랑하는 그대 더 이상의 말도
더 이상의 눈길도 원하지 않아
내겐 필요치 않아
바로 지금 지금 그대로의 모습으로
나에게 남아주오 
 

때로는 그대의 마음에
슬픔의 그늘이 드리우고
때로는 나의 마음에
아픔의 계절이 찾아와요
소중한 우리들의 진실
이슬처럼 반짝이네
초롱한 그대의 눈빛은
나의 가슴을 투명하게 해
사랑하는 그대 더 이상의 말도
더 이상의 눈길도 원하지 않아
내겐 필요치 않아
바로 지금 지금 그대로의 모습으로
나에게 남아주오 

 

2012.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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