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장흥군

장흥...가지산 보림사

임병기(선과) 2012. 11. 21. 0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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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3월 21일에 다녀온 답사기가 옛님의 숨결방에 남아 있었다. 유현이랑. 박초시랑 3명이 남도를 다녀온 기록이다. 참 수더분한 감정의 글이다. 지금은 그런 순박한 감성은 내몸 어디에서도 찾기 힘들 것 같다. 그 이전, 이후에도 보림사를 참배했지만 사진은 찍지 않았고 아니 카메라를 소지하지 않았었다. 이제는 카메라로 인해 깊은 느낌을 즐길 수 없는 세태가 되어 안타까웁기 그지 없다.

 

  가지산은 탐진강을 낳고... 장흥 보림사

 

가지산에서 발원한 탐진강 줄기가 어깨동무를 하며 보림사로 이어진 길은 내고향 성주댐에서 수도산으로 가는 길과 비슷하다는 느낌으로 가지산문 보림사 일주문을 들어 섰다. 호남지역의 평지중정의 배치에 충실해 보이는 중심축상에 쌍탑, 석등, 괘불대가 눈에 들어와 동의를 구할려고 옆을 보았더니 유현도,박초시도 보이지 않는다. 일주문을 통과후에는  민들레 홑씨 바람에 날리듯 제각각 흩어졌다가, 마치 약속이라도 한듯 어느 지점에서 만나  일주문을 나설 때는 함께 산문을 나서는 까닭이 서로의, 관심사와 문화재 감상의 편식증도 없지 않겠지만, 구애받지 않고 움직이고 싶은 마음의 표출일 것이다.

구산선문 가람중에서도 가장 남쪽에 위치한 보림사의 남북 중심축 중심에는 대적광전이 자리잡고 있어 동선을 옮기니, 일반적인 괘불대 넓이 보다 폭이 넓고 위치도 의아스럽지만,금당 바로 앞에 조성되는 여타 가람의 배치와는 차이가 있다. 이런 연유가 사찰의 중심이 탑- 법당 으로 변천 과정을 거친 후 야단법석시에 괘불을 올린 자취겠지만 그렇게 큰 괘불이 있었을까?
 

금당 앞 통일신라의 가람배치에 충실한 쌍탑은 전형에 비해 크기, 기단의 탱주가 줄어들고 지붕돌의 반전도 심해 신라하대의 특징을 보여주나, 옥개석의 층급 받침은 아직 5개를 유지하고 있으며 온전한 상륜부가 탑의 가치를 배가시키지만 전성기에 비해 힘이 없어 보인다.그래도 보림사 쌍탑은 발견된 탑지로인해 조성연대를 정확하게 알 수 있어, 탑유형의 편년을 추
적하는데 귀한 양식이라 하겠다.

탑 전면의 배례석도 놓칠 수 없는 즐거움이나, 쌍탑의 중심에 자리한 석등도 신라하대의 팔각원당형 양식으로 상륜부도 남아 있다. 부석사 무량수전 앞 석등을 시원으로 하는 팔각원당형의  석등의 흐름을  살펴볼 수 있는 작지만 쉽게 스쳐갈 수 있는 석등은 아니다.

보림사의 주전각인 대적광전에는 구산선문 개산시기에 모셔진 비로자나 철불이 1000년 이상을 당당한 모습으로 중생을 굽어 보시며 감로법을 설하시고 계신다. 천년 세월을 간직한 체 사라질 위기가 6.25 전쟁시에 있었으나, 보림사의 대부분의 전각이 소실되었음에도, 화재에 취약성을 극복하고 우리 곁을 지키고 계신다.  신라하대 지방호족의 부의 상징으로 조성된 목적이야 차치하고, 나도 몰래 삼배를 올렸다.

그런데, 작지만 당당하고, 검박하지만 아름다운 석탑과, 석등에 어울리지 않게, 고대광실 같은 대적광전에서 비로자나 부처님은 편하실까? 사립문은 초가집과, 한복에는 고무신이  제맛이지 않은가?  대적광전 외벽에는 가지산문의 종조 도의-2대 염거- 보림사 개산조 체징, 가지산문 출신의 일연선사, 혜가 단비도, 혜능 도정도가  팔상도와 나란히 한글로 표기되어 있다. 보림사가 선종사찰의 줄심에 있다는 상징으로 보이나 과연 선사들이 화려하게 치장된 오늘의 모습을 보면 무슨 생각을 하실까?
格이란 은은하게 풍겨 나오고, 소리없이 스며드는 것인데......

여전히 초시는 보이지 않고 대웅보전 근처에서 유현이 날 부른다. 본래 있었는지 모르지만 대웅보전은 보림사의 동서중심축상에 위치한다. 좌우에는 느슨하게 비대칭으로 명부전과 산신각을 배치하여, 좁은 공간에 촘촘한 영남지방 산지중정의 형태를 갖추고 있다. 놀라운 것은 마치 본사인 송광사의 대웅보전을 흉내라도 낼 듯 화려하게 꽃단장한 모습이,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내겐 심사가 편치 않은데 유현이 불단위의 부처님을 가리킨다. 주불과 협시불이 모두 석가모니 부처님이며, 다만 시무외인,선정인,전법륜인의 수인만 다를 뿐인데, 이런 예가 있었는지, 있었다면 상징성은 무엇인지? 더구나 세분의 석가모니불의 협시보살로 지장,보현,문수,관세음을 모셨는데 석가모니불과 어떤 관련성으로 각각의 자리을 잡고 계시는 것일까?

잡다한 상념 버리고 절에 순례왔으면 회개하라는 듯 명부전 외벽의 지옥도, 통도사 극락전 반야용선을 밝게 채색한 분위기의 반야용선도가 사람의 심사를 옭조은다. 명부전은 용마루에 길게 누워있는 용뿐만 아니라 온통 용의 세계여서, 왠지 죄많은 나에게 '용용죽겠지' 라며 놀리는 듯한 느낌은  나의 어리석음 탓인가?

어느새 3명이 보조선사 체징의 부도 앞에 모여, 가지산문의 흐름과 인도,중국의 보림사와 남종선에 관해 유현의 구라가 이어지고, 상감의 미적 감각이 장단을 더하지만, 나는 말없는 관객에 머물고 있다. 내게는 둔중하다는 느낌과, 하대석과 상대석 몸돌에 새겨진 화려하고 섬세하고 다양한 조각에도 불구하고 남성적으로 보여질 뿐이다.

창녕 술정리 동서탑을 답사하려는 사람에게 서탑을 먼저 보라고 말해주었는데, 남도 절집의 부도 순례를 하려는 사람들에게도, 쌍봉사, 태안사,실상사,연곡사 부도를 뵙기 전에 보림사 부도를 먼저 찾으라고 말해주고 싶은 것은 나의 근시안적인 눈높일까?

 

동부도 밭에서도 안내문에 기재된 시대적 배경을 두고 설왕설래,우리들만의 향연을 열면서 토축으로 구분된 각각 부도의 위계에서는 내 특유의 소설도 각색해보았지만, 뭐하나 제대로 갖춘 것이 없는, 그중에서도 미의식을 느끼지 못하고 아니 거부하는, 이몸한테는 통일신라~고려초 구산선문 사찰의 화려한 부도 보다는 단순 명쾌한 조선조의 석종형 부도가 와닿는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회피일까? 개성일까?
                                                                                  2005.03.21

일주문

 

2012년 11월 보림사를 카메라에 담았다. 촬영테크닉도 제로이지만 해질무렵 역광, 날씨마져 한 번 더 오라는 암시일까? 그나저나 예전에 보지 못했던 일주문이다. 일주문 조성전에는 사천문 앞 외호문이 일주문이었다.  이번 태풍에 기와가 날아간 듯 보인다.  금년에는 가지산문 종조인 양양 도의선사 부도, 그가 주석했던 진전사지, 염거화상의 선림원지도  금년에 다시 다녀왔으니 나의 답사는 가지산문과 인연이 깊은 한 해였다.

 

 

신라 구산선문 중에서 제일 먼저 개산한 가지산파의 개조 보조 체징이 860년(헌안왕 4) 헌안왕의 권유로 창건했다. 이어 장사현( 전라북도 고창군 무장면)의 부수 김언경이 체징에게 제자의 예를 베풀고 자신의 봉급과 사재를 희사하여 철 2천5백 근을 사서 비로자나불 1위를 조성했고, 헌안왕은 교지를 내려 망수리 이남의 여러 집에서 금 1백60 근과 곡식 2천 곡(10말)을 하사하여 중창을 도왔다. 그리하여 861년(경문왕 1) 중창을 마쳤으며, 가지산파의 중심 도량으로 발전했다. 880년(헌강왕 6) 체징이 입적할 당시에는 무려 8백여 명의 그의 제자들이 여기에 머물렀다. 884년 헌강왕이 절 이름을 보림사라고 했다.

 

고려시대의 역사는 자세하지 않지만 인종 때 왕사인 원응국사 학일이 잠시 머물렀고, 송광사의 6세 국사 원감국사 충지( 1226~1293)나 각진국사 복구 등 대선사들이 이곳에 머물렀다는 기록이 있어 선맥은 지속적으로 이어졌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1407년(태종 7) 조계종의 자복사찰로 지정되었으며, 이 때에는 가지사라고 불렸다. 그러나 1481년(성종 12)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에는 이 절이 존재한다고 나와 있으나, 1799년(정조 23)에 편찬된 <범우고(梵宇攷)>에는 '지금은 폐사되었다'고 나와 있다. 그 뒤 다시 중창과 중수를 거쳐 1950년 6.25전쟁 때 소실되기 전까지는 20여 동의 전각을 갖춘 큰 절이었다.

그러나 전쟁 중 공비들이 자신들의 소굴로 이용하다가 도주하면서 방화하여 대웅전(당시 국보 제204호) 등 대부분의 건물들이 불에 타고, 단지 천왕문과 사천왕, 외호문만이 남았다. 대웅전은 조선 초기에 중건된 것으로 추정되는 우수한 건물이었으며, 금동석가여래상과 양쪽에 협시불이 봉안되어 있었다. 이후 주민들이 대적광전을 다시 지어 대웅전에 있었던 비로자나불을 모셨다.

보림사의 창건설화도 우리나라 많은 사찰 설화 처럼 악용과 관련된 이야기이다. 불교 전파 과정에서 토속 신앙과 상충 과정을 암시하는 대목으로 보여진다.

 

"신라의 명승 원표대덕이 인도 보림사, 중국 보림사를 거쳐 참선중 한반도에 서기가 어리는 것을 보았다.그는 신라로 돌아와 전국의 산세를 살피며 절 지을 곳을 찾았다.어느날 유치면 가지산에서 참선을 하고 있는데 선녀가 나타나더니 자기가 살고 있는 못에 용 아홉 마리가 판을 치고 있으므로 살기 힘들다고 호소해왔다.원표대덕이 부적을 못에 던졌더니 다른 용은 다 나가고 유독 백룡만이 끈질기게 버텼다.원표대덕이 더욱 열심히 주문을 외었더니 마침내 백룡도 못에서 나와 남쪽으로 가다가 꼬리를 쳐서 산기슭을 잘라놓고 하늘로 올라갔다.이 때 용꼬리에 맞아 파인 자리가 용소(용문소)가 되었으며 원래의 못자리를 메워 절을 지었다"

 

 

보림사 주차장에서 처음 맞이하는 문으로 ‘외호문(外護門)’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이외에도 ‘가지산보림사’, ‘선종대가람’이란 현판도 함께 걸려 있다. 예전에는 일주문 이었다.

 

 

외호문 현판

 

 

외호문 현판

 

선종대가람.옹정4년(영조2년,1726년)

 

사천문

 

외호문에서 바라본 사천문(다른 사찰과 달리 사천문인 까닭이 궁금하다). 호남지역 평지사찰의 전형인 일주문, 천왕문이 일직선상에 놓여 있는 배치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익공계 맞배집이다. 좌우에 대형 목조사천왕상과 소형의 금강역사상 2분을 모셨다. 정확한 건립연대는 알 수 없으나 '보림사중창기'에 1666년 사천왕과 사천문을 중수했다는 기록으로 볼 때 적어도 17세기 무렵 보림사에 사천문이 있었음은 분명하다. 봉안된 사천왕상은 1515년에 조성되었다고 한다.  

 

동방지국천왕.남방증장천왕.금강역사

 

사천문 내부에는 좌우로 대형 목조사천왕상과 소형 금강역사 2분을 모셨다. 사천왕상 안에서 불서가 많이 발견되었는데, 1971년 10월 24일 보수공사 중에 150여권, 1995년의 조사에서 133종 198책이 나왔다. 「보림사천왕금강중신공덕기(寶林四天王金剛重新功德記」에 따라 1515년(중종10)에 제작된 사천왕 추정되며, 현재 보물 1254호로 지정되었다. 사천왕은 검, 비파, 용, 탑 등을 들고 있는 의좌상으로 머리에는 화려한 보관을 쓰고, 신체에는 화려하게 채색된 갑옷을 입고 있으며, 양 어깨에 는 천의자락이 흘러내리고 있다. 얼굴은 방형으로 두 눈은 부릅뜨고, 입과 코는 크다.

 

금강역사상.서방광목천왕. 북방다문천왕

 

기록에 의하면 1515년에 조성된 이후 사천왕상은 1668년(현종9)과 1777년(정조1)에 중수하였다고 전한다. 만약 보림사의 사천왕상이 기록대로 16세기에 조성된 것이라면 현존하는 대형 목조 사천왕상 가운데 가장 오래된 사천왕상이 된다고 한다. 

 

석등. 쌍탑

 

대적광전 앞 두 기의 탑과 한 기의 석등이 나란히 세워져 있다. 두 탑은 비슷한 규모와 형식을 취하고 있다.  1933년에 사리장치를 훔치려다 넘어졌던 것을 그 다음해에 복원할 때 1층 탑신부 사리구멍에서 사리구와 함께 조성내용이 기록된 탑지가 나와 신라 경문왕 10년(870)에 이루어졌음이 밝혀졌다. 

 

북탑

 

두 기의 삼층석탑은 전형적인 신라 탑의 형식을 따른 탑으로 대적광전을 향하여 왼쪽의 남탑이 보륜이 3개, 오른쪽의 북탑이 보륜이 6개인 점이 다를 뿐 형식은 동일하다.  6매 판석으로 이루어진 넓은 지대석 위에 각각 우주와 탱주를 새긴 상하 2중기단을 올렸다. 기단부 위 갑석에는 별석의  3층 탑신과 옥개석을 올렸다. 탑신에는 양우주만을 장식하였다. 석등의 사리구와 탑지가 들어있던 사리공이 발견된 곳은 1층 탑신석의 상부 중앙이었다. 옥개석은 넓고 얇으며 낙수면 물매는 얕다 .전각에는 반전이 뚜렷하다. 옥개석 층급받침은 각각 5단이며, 상층으로 갈수록 줄어드는 체감율은 안정적이다. 상륜부는 노반, 복발, 앙련과 보륜, 보개, 보주를 갖추어 거의 완형을 이루고 있다.

 

 

상륜

 

 

탑신

 

 

기단.배례석

 

 

북탑

 

 

남탑

 

 

상륜.보주가 북탑은 6개, 남탑은 3개이다.

 

 

남탑기단

 

 

발굴된 탑지에 따르면 탑의 건립은 경문왕이 선왕인 헌안왕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건립한 것이라 하며, 또한 진성여왕 4년(891)에는 사리 7과를 봉안하고, 이 후 조선시대 성종9년(1478)과 중종30년(1535), 숙종10년(1648)에 중수가 있었다고 한다.

 

 

석등은 지대석을 제외한 기단, 화사석, 옥개석이 모두 8각으로 이루어진 형태로 통일신라 후기의 석등을 대표한다. 석등은 좌우에 있는 석탑의 탑지의 내용으로 미루어 석탑과 같은 기간 즉 함통 9년(868)에서 함통 11년(870)에 조성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전한다.

 

2단 사각판석형태의 지대석 위에 각 면에 안상이 새겨진 8각기단을 올렸다. 하대석은 복련으로 연잎 중앙에는 당초문형의 화려한 귀꽃을 새겼다. 중대석은 8각의 긴 기둥형태로 상·하에 2단의 갑석을 넣었다. 상대석은 복판의 앙련형으로 각 연판에는 화문을 모각하였다. 화사석 역시 8각으로 앞·뒤면에 장방형의 화창을 두었으며, 화사가 놓이는 곳에는 화사를 놓기 쉽도록 낮게 홈을 팠다. 옥개석에는 기왓골이 없는 형태로 처마 끝에 한 단의 턱을 두어 절수 역할을 하도록 하였다.

 

처마의 곡선은 완만한데, 전각에는 귀꽃장식을 더하였다. 옥개석 상단에는 단판 연화문을 장식하고, 그 위로 원형의 원통형 기둥에 앙련과 복련의 팔엽단판을 조각하고 보개를 올렸다. 보개는 옥개보다 작은 형태로 그 위로는 원형의 보주형 연봉오리를 안치하였다.

 

 

대적광전

 

철조비로자나불

 

국보 117호 대적광전 비로자나불. 858년(헌안왕 2) 무주 장사현 부관 김수종(일명 김언경)이 왕에게 간청하여 그해 8월 22일 왕의 칙령에 의해 조성되었다. 불상 왼팔 뒤편에는 이러한 내용을 기록한 양각으로 새겨진 명문이 있는데, 모두 8행 69자의 해서체로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불상을 조성한 때는 석가여래 입멸 후 1808년이다. 이때는 정왕 즉위3년이다. 대중 12년(헌안왕 2, 858년) 무인 7월 17일 무주 장사현 부관 김수종이 아뢰자 정왕은 8월22일 칙령을 내려 허락했다. 이에 스스로 만들면서도 피곤함을 알지 못하였다.[當成弗時釋迦如來入滅後一千八百八年耳 時情王卽位第三年也 大中十二年戊寅七月十七日武州長沙副官金遂宗聞奏 情 王□八月 廾二日勅下令□躬作不覺勞因也]'

 

 

상호는 살찐 둥근 형태에 나발의 머리에는 낮게 솟은 육계, 계주는 후대에 흙으로 덧붙인 것이라 전한다. 이목구비는 모두 큼직한데 두 눈은 반쯤 뜬 눈으로 아래를 향하고 있다. 좁은 이마에는 백호가 있고, 귀는 길게 늘어뜨렸는데 보수한 흔적이 있으며, 목에는 삼도가 뚜렷하다.  

 

 

신체는 어깨가 다소 좁아 답답한 느낌을 주며 법의는 신체에 밀착되게 표현하였다. 법의는 두 어깨에 모두 걸친 통견식으로 착용하였는데 Y자형으로 여몄으며, 가슴에는 수평으로 내의 자락이 드러나 있다. 어깨에서 흐른 옷주름은 가슴으로 모으고, 소매의 옷주름은 수직의 띠주름의 형태로 표현하였다. 하체는 대의로 결가부좌한 두 다리를 감싸고 있는데 무릎 부분은 다소 형식화된 표현이 엿보이나 발목 중앙에서는 사실적인 묘사를 보인다. 두 손은 왼손의 검지를 오른손으로 감싸 쥔 지권인을 결하고 있는데, 이는 비로자나불의 수인이다.

 

 

대적광전 범종. 높이 66cm, 입지름 53cm으로 비교적 작은 종이다. 종정의 용뉴는  간략한데, 일부 파손되어 고리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종신에는 상대 없이 당초문이 장식된 하대만을 두르고, 상대 위치에는 6개의 원좌 안에 범자문을 넣어 장식하였다. 범자문 아래로는 9개의 종유가 있는 2개의 유곽을 배치하고 사이에 두광을 갖춘 보살상을 새겼다.

 

전면에는 보살상과 유곽 사이에 횡서로 ‘주상삼전하’라 음각하고, 그 아래로 시주자명을 비롯한 참여자의 이름 등의 명문이 새겨져 있다. 당초문의 하대가 둘러진 종의 입지름에는 종이 깨지는 것을 막기 위해 지름 지름 2cm정도 크기의 구멍을 뚫었다. 한편 명문 중에는 경오년 10월에 조성하였다는 구절이 보이는데, 경오년에 대한 견해로는 대적광전이 중창된 해인 영조 25년 즉 1750년으로 보는 설과 종의 양식으로 미루어 보아 고종 7년 1870년으로 보는 설이 있다.

 

 

대웅보전.

 

태풍의 피해를 본 듯 하다. 공사중이어서 아쉽게도 들아가지 못했다.

 

 

삼성각

 

명부전

 

명부전은 대웅보전의 오른쪽에 대웅보전을 향해 있다. 안에는 중앙 불단에 지장보살좌상 만을 모시고 후불탱화로 지장보살탱을 모셨다. 전각 바깥의 양 측벽과 뒷벽에는 지옥도와 반야용선을 그려 장식했다.

 

 

지옥도

 

 

 중앙 불단에 지장보살좌상 만을 모시고 후불탱화로 지장보살탱을 모셨다.

 

 

반야용선.

 

장흥 의상암지 석불입상...문화재청

 

미타전 석불입상. 장흥읍 제암산 중턱 의상암 절터에 있던 불상으로 1994년부터 보림사로 옮겨 모시고 있다. 광배와 목 부분에 약간의 파손이 있지만 전체적으로 양호한 편이다. 민머리 위에 상투 모양의 머리묶음이 높게 표현되었고 얼굴은 계란형이다. 옷은 양 어깨를 감싸고 있으며 가슴 위까지 U자형 주름을 이루고 있다. 양 팔에 걸쳐진 옷자락은 물결 모양의 주름을 만들면서 무릎까지 길게 드리워졌다. 오른손의 엄지와 검지를 맞대고 있는 것으로 볼 때 아마타여래를 표현하고 있는 것 같다. 원만한 얼굴, 높은 머리묶음, 상체의 옷주름 등으로 보아 9세기 후반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불상으로 전한다.

 

 

범종루

 

수각

 

보림사 약수물이다. 대웅보전 뒷편 비자림, 대숲, 차밭의 영향으로 뒷맛이 쌉살하지만 효능이 널리 알려진 약수라고 한다.

 

 

보조선사창성탑전

 

보조선사창성탑비

 

보조선사는 공주 출신으로 법명은 체징이며, 일찍이 당나라에 유학하여 선지식을 두루 섭렵하고 840년(문성왕 2)에 귀국하여 가지산 보림사에 구산선문을 개창하였다. 그는 20여년을 이곳에 머물러 선법을 널리 전파하다, 880년(헌강왕 6)에 입적하였다. 이에 883년(헌강왕 9) 체징선사의 제자 의거 등이 행장을 지어 올려 비의 건립을 청하였으며, 884년 왕이 김영에게 비문을 짓게 하여 시호를 보조선사, 탑호를 창성탑이라 내렸다.

 

글씨는 김원과 김언경(김수종)이 썼고 흥륜사의 현창이 글씨를 새겼다. 이 탑비는 전남지역에서 가장 연대가 올라가는 확실한 금석문으로 보물 제158호로 지정되었다. 크기는 총 높이 3.46m, 귀부높이 1.04m, 비신높이 2.64m로 귀부와 비신, 이수를 갖춘 탑비이다.

 

 

귀부는 입에 여의주를 물고 고개를 꼿꼿하게 든 당당한 형태로 통일신라 일반적인 형태와 같이 높이가 낮은 점이 특징이다. 등에는 6각형의 귀갑문을 장식하였으며, 그 위에 비좌를 두어 구름무늬와 당초무늬로 장식하였다. 비좌 위로는 2단괴임을 두어 비신을 받쳤다. 장방형의 비신은 전면에만 보조국사의 행적과 보림사의 창건, 연기설화 등을 기록한 명문이 있으며 3면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다. 명문은 총 34행으로 가장 긴 행은 64자가 기록되어 있다. 비신 위의 이수도 귀부의 비좌와 같이 연화문과 운문을 가는 선으로 새겼는데 다소 형식적이다. 이수의 운문 위로는 서로 등을 맞댄 두 마리의 용을 좌우로 배치하고 그 위로 앞뒤에 용두를 새겼는데, 후면의 용두는 떨어져 나갔다.

 

이 탑비는 조각 수법이 뛰어난 통일신라시대의 탑비의 전형을 대표하는 우수작이다. 탑비의 비문은 조선금석총람, 해동금석원, 해동금석존고, 한국금석전문 등에 수록되어 있다.

 

보조선사창성탑

 

보조선사창성탑은 보림사 경내 동편에 위치하며, 명문은 없으나 부도 아래에 있는 탑비에 의해 보조선사 체징의 사리탑으로 판명되었다. 크기는 전체높이는 436cm로 조성시기가 거의 뚜렷하고 수법 또한 뛰어나 보물 157호로 지정·관리되고 있다.기단, 탑신, 옥개가 모두 8각인 팔각원당형의 전형을 따랐다.

 

 

탑신도 8각으로 각 모서리에는 우주가 조각되고 우주 상단에는 주두와 평방, 창방 등이 새겨있어 목조가구를 모방하고 있다. 8각 면에는 앞 뒤면에 문비형을 새기고, 그 좌우에 신장상을 새겼다. 탑신 위의 옥개석은 기왓골을 새기고, 그 위 상륜부는 원형은 아니지만 복발과 보륜, 보주를 차례로 올렸다. 제작시기는 창성탑비가 건립된 것이 보조선사 입적 4년 후 884년이므로 이 부도역시 이 무렵 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기단, 탑신, 옥개가 모두 8각인 팔각원당형의 전형을 따랐다. 아래에서부터 8각의 기단부 위에는 얕은 괴임을 두고 그 위에 다시 2중의 8각 하대석을 마련하였다. 하대석 하단 각면에는 안상이 있으며, 상단에는 사자상을 조각한 흔적이 남아있으나 파손이 심한 편이다. 중대석은 배가 약간 부른 배흘림형식의 8각인데, 사이사이 화문을 조식하였다. 상대석 역시 8각으로 2단 갑석 아래에는 단판의 앙련 연화대를 조각하였다.

 

 

탑신 사천왕과 문비

 

창성탑비전 석불입상

 

창성 탑 옆에는 근년에 장흥읍 충렬리(현 장흥군 공설운동장)에서 옮겨온 석불 입상이 있다. 불상은 1970년대 보호전각을 철거하면서 얼굴과 어깨가 결실되었는데, 다행히 이때 잔편들을 목포대학교 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어 앞으로 복원될 가능성이 있다. 광배와 불신이 한 돌로 짜여 있다.

 

어깨부분이 결실되어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신체는 당당하며, 법의는 두 어깨를 모두 덮은 통견으로 두꺼운 옷은 중앙 수직선을 기준으로 좌우 대칭을 이루었다. 수인은 가슴중앙에서 양손을 상하로 잇대고 있어 비로자나불이 취하는 지권인의 변형으로 여겨진다. 광배는 몸 전체를 두르는 거신광으로 가장자리에 화염문을 조각한 형태이다. 석불의 발아래에는 원래의 대좌가 아닌 비신 받침으로 추정되는 석재를 받쳤다. 불상의 제작 시기는 단조로운 옷 주름이나 변형된 지권인의 수인 등을 통해 볼 때 고려시대 제작된 불상으로 전한다.

 

동부도전

 

동부도군은 절 입구 오른편의 당촌마을 뒤편 산기슭에 위치하며, 보물 제155호로 지정된 ‘보림사동부도’를 포함하여 총 7기의 부도가 모셔져 있다. 여기에서 당호가 확인되는 부도는 2기로 향산운파당과 지봉당 부도로, 전자는 주인공이 확인되지 않지만 부도의 양식상 고려 후기의 것으로 추정되며, 후자는 조선후기 18세기에 활동한 지봉당 우기스님 부도로 확인된다.

 

보림사 동부도

 

보물 제155호로 지정된 부도는 동부도군의 가장 위쪽에 있는 것으로 안내판에는 통일신라시대의 부도로 되어 있으나 대부분 학자들이 고려시대 11세기의 것으로 보고 있다. 그 형식은 팔각원당형의 기본을 따른 것으로 팔각의 지대석 위에 기단부로 복련의 하대석과 팔각기둥의 중대석, 복련의 상대석을 갖추었는데, 복련과 앙련은 반구형에 가깝게 두툼하다. 기단부 위에는 문짝과 자물쇠 모양이 조각된 팔각기둥 형식의 탑신을 올리고, 좁고 낮은 옥개석과 간석, 보개, 보륜, 보주가 차례로 얹혀진 상륜부를 갖추었다. 이 부도는 조각기법이 세련되었으나 입체감이 적고 섬약한 느낌을 준다.

 

 장흥 보림사 서 승탑  장흥 보림사 서 승탑

보림사 서부도...문화재청

 

목포에서 약속시간 때문에 미쳐 들리지 못한 서부도군은 보림사 주차장 앞에서 영암으로 가는 도로를 따라 약 600m쯤 떨어진 장흥군청소년수련장에서 서 북쪽에 있는 동쪽 구릉에 위치한다.

 

보림사 가지산문과 관련된 선종과 도의 선사, 구산선문의 도입과 시대에 미친 영향 등의 전문 연구 논문이 수백편이 넘을 것이다. 그러한 자료의 홍수속에 아마츄어인 나의 글은 사족에 불과할 것으로 보여 문화재 설명에 국한하여 글을 마감한다. 아무토록 훗날 님들 답사길에 작은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보림사를 지나며...김삿갓

가난과 영화는 하늘에 달렸으니

어찌 뜻대로만 되리요.

나는 내 멋대로 유유히 지내 왔노라.

고향 하늘 바라보니 천리길 아득하고

남녘을 떠도는 내 신세 허망한 물거품

술잔을 비 삼아 쌓인 시름 쓸어 버리고

달을 낚시 삼아 시를 건져올리네.

보림사와 용천사를 두루 돌아보니

속세 떠난 한가함이 비구와 한가지라.

 

2012.11.02

 

문화재청.장흥군청.한국전통사찰관광정보.부다피아 홈페이지를 참조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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