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영광군

영광...내산서원

임병기(선과) 2012. 5. 27. 0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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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려문과 강황

 

조선 중기 문신인 강항(1567∼1618)과 그의 제자 윤순거를 추모하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내산內山은 서원 앞 마을에서 바라보았을때 형국이 內자로 보여 불리워지게 되었다고 한다. 인조 13년(1635)에 나라에서 ‘용계사’라는 이름을 내려주었고 숙종 28년(1702)에 고쳐 세웠다. 일제강점기 때에도 고쳐 지었는데 그 뒤로도 여러 차례 보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홍살문 옆에는 강황의 동상이 자리하고 있는 현대감각의 서원이다. 영광의 해설사분들과 약속 때문에 주마간산격으로 둘러 보았다.

 

강황

 

본관 진주, 자 태초(太初), 호 수은(睡隱). 전남 영광군 불갑면 금계리 유봉마을에서 태어났다. 1588년(선조 21) 진사가 되고 1593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교서관박사 ·전적을 거쳐 1596년 공조 ·형조 좌랑을 지냈다. 1597년 정유재란 때는 분호조판서(分戶曹判書) 이광정(李光庭)의 종사관으로 남원(南原)에서 군량보급에 힘쓰다가, 남원이 함락된 뒤 고향 영광으로 돌아가 김상준(金尙寯)과 함께 의병을 모집하여 싸웠다. 전세가 불리하자 통제사 이순신 휘하에 들어가려고, 남행(南行) 도중에 왜적의 포로가 되었다. 일본 오사카[大阪]로 끌려가 학식 높은 승려들과 교유하며 유학을 가르쳐 주는 한편, 그곳의 지리와 군사시설을 비롯한 적정(敵情)을 비밀리에 인편으로 고국에 보고하였으니 그글을 모아 엮은 책이 간양록이다

 

1598년 교토[京都]에 이송되어 그곳에서도 적정을 적어 밀송(密送)하고, 1600년 포로생활에서 풀려나 가족들과 함께 고국에 돌아왔다. 1602년 대구교수(大丘敎授)에 임명되었으나, 스스로 죄인이라 하여 얼마 후 사임하였고, 1608년 순천교수(順天敎授)에 임명되었으나, 역시 취임하지 않았다.

 

경사백가(經史百家)에 통달하고, 포로로 일본에 있을 때 후지와라 세이가[藤原惺窩: 1561~1619)에게 성리학을 전함으로써 일본 성리학의 원조(元祖)가 되었으며, 많은 명유를 배출시켜 일본역사에 찬란히 빛나고 있으며, 억류지였던 일본 대주시에는 추모비가 건립되어 있다.

 

그림에도 뛰어나 인물화와 송화(松畵)에 특기가 있었다. 영광 용계사(龍溪祠)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수은집(睡隱集)》《간양록(看羊錄)》《운제록(雲堤錄)》《건거록(巾車錄)》《강감회요(綱鑑會要)》《좌씨정화(左氏精華)》《문선찬주(文選纂註)》등이 있다.

 

 

전학후묘 영역 외에도 부속건물이 크게 자리하고 있다.  서원이 배산의 종축에서 비켜 앉아 배치한 것은 강황의 산소가 먼저 자리했기 때문일것이다.

 

 

여재문如在門 과 의절묘義節廟. 서원 영역에서 처음 맞이하는 전각이다. 분명 사당이다. 누구를 모시는 사당인가? 자료 검색 결과 수은 선생과 두 부인을 모신 사당으로 매년 단오날 제사를 모신다. 첫부인과 사별 후 들어온 두번째 부인 함평 이씨는 수은 선생이 세상을 떠나자 함께 세상을 등졌다고 한다.  서원 입구의 정려문은 함평 이씨에게 내려진 것이다. 서원의 전형과는 거리가 있으나 내산 서원이 문중 묘역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사례로 보인다.

 

 

외삼문. 솟을 지붕이지만 문을 왜 하나만 달았지? 루대도 없었다.

 

 

내산서원 강학공간. 중앙 대청, 좌우 방으로 대표되는 구조를 탈피한 처음보는 강당 구조이다. 방에 문을 달고 전면에 툇마루를 낸 독특한 배치이다. 기본적으로는 전형인 전학후묘이지만 기이하게도 동서재도 없다. 서원을 현대적으로 해석하여 조성한 것으로 판단된다. 즉 활용하지 않을 기숙공간 동서재 복원에 비용을 투자하지 않고 강학공간을 실용적으로 세운 것으로 보인다. 확인하지 않았지만 중앙 문은 들어열개구조로 되어 여름철이면 개방할 수 있을 것이다. 현판 글씨는 영광의 한학자이신 지수 이학용님의 글이었다.

 

강당 툇마루

 

내삼문. 일성각. 일반적으로 강학 공간 앞에는 삼문을 세우고, 사당 에는 일각문을 배치하는데 내산서원은 그렇지 않다.

 

 

용계사. 다른 서원과 달리 내삼문을 개방하였다. 수은선생과 윤순거 선생의 위패는 여기에 봉안되어 있다. 

 

윤순거 1596(선조 29)~ 1668(현종 9).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노직(魯直), 호는 동토(童土). 아버지는 대사간 황(煌)이며, 어머니는 성혼(成渾)의 딸이다. 큰아버지인 수(燧)에게 입양되었다. 외삼촌인 성문준(成文濬)에게 학문을, 강항(姜沆)에게 시를, 김장생(金長生)에게 예학(禮學)을 배웠다. 1633년(인조 11) 사마시에 합격하여 내시교관(內侍敎官)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636년 병자호란 때 사간으로 있던 아버지가 척화(斥和)를 강력하게 주장하다 영동에 유배되고, 숙부인 윤전(尹烇)이 강화도에서 순절하자 고향에서 학문에 몰두했다. 1645년부터 3년 동안 인평대군(麟坪大君)의 대군사부(大君師傅)로 재직했다. 그뒤 상의원주부·형조좌랑·안음현감을 지내고, 의령현감으로 있을 때 남효온(南孝溫)을 위해 사당(祠堂)을 세웠다.

 

1660년(현종 1) 영월군수로 재직할 때에는 노릉(魯陵) 등 단종의 유적을 수리하고, 〈노릉지〉를 수찬(修撰)하는 등 단종의 위호추복(位號追復)을 위해 노력했다. 이후 장령·세자익위사익위·군자감정·상의원정 등을 지냈다.그는 범중암(范仲巖)·여조겸(呂祖謙)의 종법(宗法) 등을 참고하여 종약(宗約)을 만들고, 남전향약(藍田鄕約)·석담사창법(石潭社倉法) 등을 참고하여 동약(洞約)을 만들었다. 또한 스승인 강항이 일본에서 포로 생활중에 견문한 것을 기록한 〈간양록 看羊錄〉을 편찬했으며, 〈강감회요서 綱鑑會要序〉·〈수은강공행장 睡隱姜公行狀〉 등을 저술했다. 저서에 〈동토집〉이 있으며, 글씨로 〈심원사취운당대사비 深源寺翠雲堂大師碑〉가 철원에 남아 있다. 연산 구산서원(龜山書院), 영광 용계사(龍溪祠), 금구 구성서원(九成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찬선(贊善)에 추증되었다.

 

경장각

 

영광의 내산서원에 소장된 필사본 『건거록(巾車錄)[看羊錄]』, 『강감회요(綱鑑會要)』, 『운제록(雲堤錄)』 3종과 『문선주(文選註)』와 『잡지(雜誌)』 2종 등 5종 10책으로 조선 시대 영광출신의 성리학자 수은 강항(睡隱 姜沆, 1567-1618)의 저술이다. 강항은 정유재란 때 일본군에 포로가 되었는데, 일본에서 경험한 내용을 기록한 책이 바로 『건거록[간양록]』이다. 강항은 왜군에 포로로 잡혀가 자신이 죄인이라는 생각으로 처음에는 서명을 『건거록(巾車錄)』이라 하였는데, 제자들에 의해 1656년(효종 7) 목판본으로 간행할 때 『간양록』으로 개칭하였다. 책의 내용 구성은 적지에서 임금께 올린 「적중봉소(賊中封疏)」, 당시 일본 각지의 특징을 밝힌 「적중견문록(賊中見聞錄)」, 귀국 뒤에 올린 「예승정원계사(詣承政院啓辭)」, 적국에서의 환란생활의 시말을 기록한 「섭란사적(涉亂事迹)」, 포로들에게 준 「고부인격(告俘人檄)」으로 되어 있다.

이 기록들은 적국에서 당한 포로들의 참상과 그곳에서 보고 들은 실정을 빠짐없이 기록해 놓았을 뿐만 아니라, 전란에 대비해야 할 국내정책에까지 언급하고 있어 당시 일본의 정보에 취약했던 부분을 보완해 줄 수 있는 문헌이다. 『건거록(간양록)』의 「적중봉소(賊中封疏)」와 「섭란사적(涉亂事跡)」은 강항의 친필로 보이며 그 밖의 것은 다른 사람의 서체로 보인다. 그러나 이 책은 강항의 친필 여부를 떠나 당시 일본의 지리와 풍속 등의 사실을 수록하고 있어 중요한 사료적 가치를 지닌 문헌이다.

『운제록(雲堤錄)』(3책)은 수은이 평시에 주고받은 쓴 시문을 적은 것을 모아둔 것으로 시문(詩) 54편, 만사(輓詞) ·제문(祭文類) 21편, 관문류(官文類 ; (箋文, 公狀 等) 20편, 서(書) ·계(啓) 10편, 기문 5편, 상량문 2편 등 112편의 글이 실려있다. 운제(雲堤)는 영광에 거주한 진주강씨 일가의 별거(別居)가 있었던 곳으로 수은이 퇴임후 자제와 문인들을 가르쳤던 곳이었다.

『강감회요(綱鑑會要)(3책)는 수은 강항이 중국의 역사서인 『자치통감(資治通鑑)』과 『통감강목(通鑑綱目)』 등을 보완 정리한 것이다. 특히 주희의 『강목(綱目)』에 미진한 점을 보완하기 위하여 소미강씨(少微江氏)의 『통감절요(通鑑節要)』와 유우익(劉友益)의 『강목서법(綱目書法)』과 윤기신(尹起莘)의 『강목발명(綱目發明)』 등을 종합하고, 그 중에서 주요한 요점만을 뽑아내어 편집한 것이다. 이 책은 목판본으로 간행되기 이전에 편찬된 원고본을 필사한 것으로, 목판본의 분량 및 편차로 볼 때 현재는 그 일부만 남아 있는 상태이다. 필사본은 이 책이 유일하다.

『문선주(文選註)』(2책)은 중국 양(梁)나라의 소명태자(昭明太子) 소통(瀟統)이 진(秦)·한(漢) 이후 제(齊)·양(梁)대의 대표적인 시문을 모아 엮은 30권으로 편찬한 『문선』에 수은 강항이 주해를 부친 것이다. 본래 상・중・하 3책으로 정선(精選)하여 주해(註解)하였으나, 현재는 중・하 2책만이 있다. 그리고 『잡지(雜誌)(1책)가 있다.

문화재의 명칭에 있어서는 실물의 표제(標題)가 『巾車錄』으로 나타나 있고 1656년 목판본으로 간행되기 전까지는 저자가 쓴 그대로 『巾車錄』이었기 때문에 『看羊錄』이 아닌 『巾車錄』으로 표기하고 대표적 저술이기 때문에 『건거록』 등 문적 일괄로 지정할 필요가 있다. 다만, 『간양록』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에 이 명칭도 함께 표기(건거록[간양록])하여 관리할 필요성이 있다.

이 필사본은 임진과 정유의 양난을 몸소 체험한 수은 강항의 생생한 기록이 담겨 있어 사료적 가치가 매우 높다. 그리고 『巾車錄[看羊錄]』의 일부를 제외하고 모두 수은 강항이 친히 짓고 쓴 필사본으로 가치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이 필사본 가운데 『강감회요』, 『운제록』, 『건거록(간양록)』 3종은 편찬 이후 문인과 후손들에 의해 목판본으로 간행되어, 이들 사이에 문헌전승의 양상을 파악할 수 있는 학술사와 출판사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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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은정.

 

원도지방의 연지를 조성하고 선생의 호를 따서 수은정을 세웠다. 사모지붕에 절병통이 무거워 보인다. 동선에 포함되지 않았지만 잠시 들려본 내산서원, 무엇때문인지 지금도 허전한 느낌 지울 수 없다. 산소를 들리지 않았기 때문도 아닌데 무엇을 놓쳤을까? 아무래도 남도길에 다시 들려야 할 듯.

 

 2012.0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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