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북도/익산시

익산...사자암 석탑

임병기(선과) 2012. 3. 25. 0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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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위 답사의 메카로 지칭되는 금마의 미륵사지를 모르는 매니아들은 없을 것이다. 매니아가 아니더라도 백제문화를 거론할 때 예외없이 회자되는 동서탑에 대해서는 익숙해도 미륵사와 깊은 관련이 있는 사자암은 놓치기 쉬운 답사처이다. 개인적인 답사, 단체로 움직이는 타이트한 동선에서 왕복 1시간은 결코 만만치 않은 거리인 까닭도 있겠지만 설화만 남아 있고 특별한 문화재가 유존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역시 미륵사지를 세번 들렸어도 사자암은 첫걸음이다.

 

 

삼국유사의 기록에 의하면 사자사는  백제 쇠퇴기에 백제의 부흥을 꿈꾸던 무왕의 근거지로 서동요의 주무대이기도 하다. 즉 서동과 선화의 설화에 등장하는 지명대사가 주석한 사찰이 사자사이다. 사자사 창건이 백제의 대표적 사찰로 전해오는 미륵사보다 앞선 시기임을 삼국유사를 통해서 확인된다.

 

"『삼국유사』 무왕조(武王條)에 처음 등장하고 있다. 기록에는 백제 30대 무왕(재위 600~641년)이 부인인 선화공주와 함께 지명법사가 머물고 있는 용화산(지금의 미륵산)의 사자사로 행차하다가, 미륵삼존을 알현하고 미륵사(彌勒寺)를 창건하게 된다는 내용이 있다."

 

익히 잘았고 있겠지만 지명대사의 신통력에 대한 달빛에 젖은 설화를 한국전통사찰정보에서 가져온다.

 

지명(知命). 생몰년 미상. 백제 위덕왕 때의 승려. 익산 용화산(龍華山) 사자사(師子寺)에 있었다. 신라 진평왕의 딸 선화공주(善花公主)와 살고 있던 부여 장(扶餘璋:武王)이 공주와 함께 찾아와, 어려서 마를 캘 적에 땅에서 나온 많은 황금을 신라 왕궁으로 보내달라고 부탁을 하자, 신통력으로써 이를 하룻밤 사이에 신라 궁중으로 보냈다. 뒤에 부여 장이 무왕으로 즉위하여 용화산 아래 못 가운데에서 미륵삼존불이 나타남을 보고 큰 절을 짓고자 하여 못을 메울 방법을 물어오자, 이번에도 신통력으로 하룻밤 사이에 산을 헐어 못을 메웠다.

 

 

무왕과 선화공주, 서동요, 미륵사지, 근자에 발굴된 사라함을 통한 엇갈린 해석 등의 그런 깊이도 없지만 여기서 전개할 내용은 아니다. 답사 기회가 있으면 개별적 관심 분야에 대해서 소프트 터치로 접근해보면 좋을 것 같다. 현재 사자암에는 주전각인 대웅전 삼성각  요사 등의 당우가 있으며 불사가 한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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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웅전 중정의 석탑으로 원래 자리는 남쪽으로 30여m 쯤 떨어진 곳에 있던 탑이라 한다. 석탑과 석등 부재의 조합으로 결합한 탑으로 생각되지만 승탑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특히 지대석, 복련이 핀 하대석, 팔각원당형 간주석, 꽃잎을 위로 올린 상대석은 석등 부재, 1.2층 탑신과 옥개석 2기는 석탑 부재로 보여진다.옥개석 받침은 3단이며 낙수면 물매는 깊지 않다.  석탑은 부재의 결실, 심한 훼손이 심하여 조성 시기가 모호하나 고려탑으로 보인다. 


익산 사자사 석탑

 

논산 탑정리 승탑

 

 

 

 

 

 

 

 

 

 

 

 

 

 

 

 

 

 

 

 

 

 

 

 

 

석탑과 석등 부재의 결합으로 단언할 수 없는 까닭이  논산 탑정리 승탑(옛님의 숨결방 답사기 참조)과의 천연성 때문이다. 탑정리 승탑은 고려 태조가 후백제 견훤과 싸울 때 사령부들 두었던 어린사 경내의 승탑으로 후백제 대명스님 부도라고도 전해오고 있다. 혹? 만약? IF?....아직 유례가 알려지지 않은, 승탑 출현의 편년을 뒤집는 백제계의 승탑??????????

 

 

옛날의 크나큰 절 이제는 황폐했네

 

외로이 피어난 꽃 가련하게 보이도다

 

준왕 남하하여 즐겨 놀던 옛터건만

 

석양에 방초만 무성하구나

 

옛일이 감회 깊어 가던 걸음 멈추고

 

서러워 우는 두견 쫓아 버렸네

 

당간지주 망주인 양 헛되이 솟아 있고

 

석양의 구름 아래 저물음도 잊었어라

-조선시대의 문인 소동명(1590~1673년)의 '미륵사를 지나며'-

 

2012.03.10

♪하늘빛 그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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